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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47) 궁산 탑산 ②] 겸재 작 ‘종해청조’는 공간이동의 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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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64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0.01.13 09:04:59

(CNB저널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필자의 친구 어떤 이는 지난 호에 실린 ‘시화상간도’를 보고 묻기를, 겸재와 사천이 인왕산 기슭 소나무 아래에서 마주보며 앉아 나눈 이야기를 그린 것이냐고 묻는다. 필자인들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겸재가 사천의 ‘시와 그림을 바꾸어 보자’는 제안의 뜻을 살려 그냥 그렸을 것이다. 그리고 겸재가 그린 시화상간도는 상당히 정형화되어 있던 그림을 겸재의 솜씨로 살린 것이리라. 후세의 화가이지만 이인문의 송하한담도(松下閑談圖, 그림 1), 단원의 남산한담도(南山閑談圖, 그림 2), 윤두서의 또 다른 송하한담도(松下閑談圖, 그림 3)도 겸재의 시화상간도와 같은 구도를 가지고 있다.

필자는 그림과는 연(緣)이 없는 사람이지만 베이징(北京) 갈 일이 있으면 시간을 내어 유리창(琉璃廠)에 들르곤 한다. 담헌이나 연암이 그랬던 것처럼 흉내를 내 보는 것이다. 책방에 들러 이 책 저 책 들척이는데 그중에 들쳐보는 책에는 화보(畵譜)도 있다. 개자원화전(芥子園畫傳), 고씨역대명인화보(顧氏歷代名人畵譜-顧氏畵譜)는 상당히 재미가 있다. 언젠가 우리 박물관에서 보았던 옛 그림의 본(本)이 되었을 것 같은 그림도 있고, 화조(花鳥), 초충(草蟲), 산수(山水), 인물(人物) 등의 부분 부분도 재미있게 그려져 있어 누구누구 그림의 한 부분은 이 화보집을 공부한 결과이겠구나… 이런 추측과 함께 하는 시간여행은 나름대로 재미가 있다. 소나무 아래 앉아 한담하거나 서서 물을 바라보는 모습도 화보집 메뉴이다 보니 아마 겸재의 시화상간도 그랬을 것 같고 다른 그림들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림 1. 이인문 ‘송하한담도’. 
그림 2. 단원 작 ‘남산한담’. 
그림 3. 윤두서 작 ‘송하한담’.

어디서 그린 것인지 도저히 납득 안 돼

이제 양천현아와 관련된 겸재의 다른 그림을 보자. 필자에게 가장 난해한 그림은 겸재가 양천현아 동헌(東軒, 官舍)인 종해헌(宗海軒)에서 조수(潮水) 소리를 듣는다는 종해청조(宗海聽潮)라는 그림이다. 이 종해헌은 겸재의 그림 종해청조, 양천현아(陽川懸衙)도에 남아 있고, 리움 소장 김희성의 그림 양천현아에도 고스란히 그려져 있다. 게다가 규장각 소장 양천현 옛 지도에도 또렷이 그려져 있다. 최근 겸재미술관이 여러 자료를 검토하여 미니어처로 재현해 놓은 양천현아의 모습에도 종해헌은 잘 자리 잡고 있다. 이후에는 1797년 정조가 들려 ‘양천(陽川)의 관각(官閣)에 제(題)한다’는 시를 남긴 곳이기도 하다.

홍재전서 제7권에 그 시가 소개되어 있다.

한강 가을 파도, 옷감 가로 펼친 듯 江漢秋濤匹練橫
홍교를 밟고 넘는 가벼운 일만 발굽 虹橋踏過萬蹄輕
사방 황금 벌판 바라보려고 爲看四野黃雲色
오십리 길 양천에 군사 잠시 머물었네 一舍陽川少駐兵

 

그림 4. 겸재 작 ‘종해청조’. 

그런데 겸재의 종해청조는 어디에서 그린 것을까? 수 차례 답사하고 이런 자료들을 짜맞추어도 종해청조는 해득이 안 된다. 뷰포인트는 과연 어느 방향인가? 우선 겸재의 그림 종해청조(그림 4)를 보자. 그림 속 번호 1은 말할 것도 없이 종해헌이다. 2는 향교의 홍살문이다. 3은 한강, 4는 남산의 동봉과 서봉으로 보인다. 5는 산의 형상으로 보아 관악산이 틀림없다. 6은 의견이 다를 수 있으나 아마도 공암(탑산, 소요산)일 것이다. 종해헌에서 향교 홍살문을 바라보는 각도, 즉 동(東)에서 약간 북(北)을 향한 방향 동북동(東北東)으로 강과 남산, 관악산은 무리 없이 펼쳐져 있다.

그런데 문제는 종해헌에서 홍살문을 바라보는 좌측에는 겸재의 그림처럼 비스듬한 하향 슬로프와 그 아래 한강이 아니라 성산(城山, 宮山)과 우청룡인 산줄기가 현아지를 에워싸고 겸재미술관을 지나 양천향교역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 겸재의 그림처럼 보이려면 궁산과 그 산줄기를 그림의 시선 우측 강 반대 방향으로 공간이동 시키지 않으면 종해청조 같은 그림은 그려지기 어려울 것 같다.

 

지도 1. 양천현아 터의 현재 지도. 

실제로 겸재의 그림은 좌가 낮고 우가 높다(左低右高). 종해헌이 마치 궁산 넘어 강가에 자리 잡은 것처럼 그려져 있다. 지도 1은 현재의 궁산 근처 지도인데 필자가 ㅁ으로 표시한 곳이 종해헌일 것이고 여기에서 향교의 홍살문을 바라본 시각이 겸재의 그림일 것이다. 짙은 녹색으로 표시했듯이 궁산과 그 산줄기 아래에 종해헌이 있다. 산줄기를 없애지 않고는 종해헌이 강가에 닿을 수가 없다. 겸재 자신의 그림 양천현아(그림 5), 리움 소장의 김희성 작 양천현아(그림 6), 규장각 소재 양천현 지도(지도 2), 겸재미술관에서 만든 양천현아 미니어처(사진 1)를 보아도 결론은 동일하다.

 

그림 5. 겸재 작 ‘양천현아’. 
그림 6. 김희성 작 ‘양천현아’. 
지도 2. 양천현아 건물 위치도. 

도대체 어찌된 것일까? 겸재미술관 뒤 ‘겸재의 붓’ 조형물을 세워놓은 망동산에서 바라보면서 궁산을 공간이동 시켜 그린 그림일까? 아니면 드론을 띄우듯이 조감법으로 내려다보면서 아예 궁산과 그 줄기는 평면도처럼 높낮이를 없애고 그린 것일까?

 

망동산 터임을 알리는 표석. 

소악루가 자리했을 궁산 동쪽 산줄기(좌청룡)으로 올라가 현아 터를 바라본다(사진 2). 사진에서 번호 1에 화살표를 덧붙인 방향이 종해헌이 있었을 곳이다. 번호 2는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향교, 3은 좌청룡 산줄기가 내려가는 방향이다. 그 아래쪽에 객사가 있었다. 번호 4의 화살표 방향이 소악루가 있었을 곳이다. 5는 궁산 정상 방향. 관아 터는 철저히 무(無)로 돌아갔다.

 

사진 1. 양천현아 미니어처. 사진 = 이한성 옛길답사가
사진 2. 양천현아 터 주변의 요즘 모습. 사진 = 이한성 옛길답사가

집들이 없는 밭 가장자리를 돌아보며 몇 개의 기와편을 모아 본다(사진 3). 양천관아, 몇 개의 기와편과 겸재의 그림으로 남았구나. 이제 종해청조도는 전문가의 자세한 해석이 나오기를 기다려야겠다.
 

사진 3. 현장에서 주워본 기와 조각들. 사진 = 이한성 옛길답사가

그제나 이제나 서민들의 시름은…

양천현아 주변의 그림을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 ‘빙천부신(氷遷負薪)’도다(그림 7). 간송의 최완수 선생에 의하면 천(遷)은 우리나라에서만 쓰는 의미로 벼랑이란 의미라 한다. 자전(字典)을 찾아보면 맨 끝에 ‘벼랑, 낭떠러지’라는 뜻이 새겨져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 문화를 반영해 우리나라에서만 쓰는 글자를 국자(國字)라 한다. 예를 들어 돌쇠 돌(乭), 논 답(畓) 같은 것들이다. 따라서 빙천부신(氷遷負薪)이란 ‘얼어붙은 벼랑길에 나뭇짐을 진다’는 뜻이다. 그림을 보면 궁산 뒤편 즉 한강가 벼랑길은 얼어 붙어 있는데 두 짐꾼이 나뭇짐을 지고 위태롭게 가고 있고 또 한 사람은 배 옆에서 나뭇짐을 한 아름 안고 있다. 그 옆 얼어붙은 강가에는 제법 나무가 쌓여 있는데 강이 얼어 붙기 전 나무 하기 수월한 지역에서 나무를 해서 강물길로 옮겨 쌓아 놓았다가 겨울에 내다 팔았다고 한다. 지금은 이 가파른 궁산 뒤편이 더욱 가팔라지고 올림픽대로가 지나가고 있는데 그 옆으로는 강변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빙천부신’도에는 사천의 제화 시가 남아 있다.

 

그림 7. ‘빙천부신’. 

層氷薪在負 층층진 얼음길 나뭇짐 지고
登頓不言難 머릿털 주삣해도 어렵단 말 않네
惟恐洛城裡 단지 두려운 건 한양 성 안에
曲房歌舞寒 은밀한 방에 가무 그칠까 하는 것이지.

아마도 은밀한 기방(妓房)에 손님 없으면 좋은 값에 나뭇단을 팔 수 없을까 걱정하는 시일 것 같다. 나무꾼의 삶은 몸의 힘듬보다 나무 안 팔릴까 하는 그것이 더 걱정스럽다. 예나 지금이나 서민의 삶은 그런 것인가 보다.

금성평사에서 금성은 어디?

다음 그림은 ‘금성평사(錦城平沙)’다. 양천 궁산쯤에서 난지도 방향을 바라보며 그린 평화로운 그림이다(그림 8). 그림 속 번호 1은 양천 궁산 주변, 2는 난지도 주변에 쌓인 모래톱이며 3은 수색-화전 지역, 4는 절두산, 5는 산 모양으로 볼 때 아마도 남한산성 줄기로 보이고 6은 선유봉일 것이다.

 

그림 8. 겸재 작 ‘금성평사’. 

강가에는 ‘빙천부신’에서 보듯 수양버들이 강가에 축축 늘어져 있고 한강(漢江, 大江)에는 돛단배 세 척이 평화롭게 떠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의 제목 금성(錦城)은 무슨 뜻일까? 평사(平沙)야 그림처럼 난지도 주변 펼쳐진 모래임이 분명하건만. 집히는 것은 세종의 여섯째 아드님 금성대군이다. 세조의 왕위찬탈이 일어나자 세종의 아들들은 수양대군(후에 세조)을 지지하는 편과 견제하는 편으로 갈린다. 이때 세조를 견제하고 단종을 옹호한 금성대군은 순흥에 안치된다. 이에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행동에 나서려 했던 대군(大君)은 고변되어 죽음을 맞았다. 후세에 의로운 대군을 모시는 사당들이 세워졌는데 그중 하나가 마포구 망원동에 세워졌다. 70년대까지도 건재했는데 개발에 밀려 사라지고 이제 서울에는 진관동 금성당만 남았다. 이 망원동 금성당이 있던 산을 바라보며 겸재는 금성이라 했을 것이라 한다. 그곳이 성뫼인데 성산(城山), 또는 성뫼산 → 성미산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그림에 붙어 있는 사천의 시는 이렇다.

欄頭來晩色  난간머리에 저녁빛 오고
十里夕陽湖  십리 석양빛 비치는 호수
拈筆沈吟久  붓 잡고 나지막이 읊기를 한참
平沙落雁圖  평사에 내려 앉는 기러기는 그림

 

그림 9. ‘설평기려’. 

양천현아에서 마지막으로 만나는 그림은 ‘설평기려(雪平騎驢)’다(그림 9). 눈 온 평원에 나귀 타고 간다는 뜻이다. 새벽 무렵 한 나그네가 나귀 타고 길을 나선다. 앞에는 두 봉우리가 우뚝하다. 최완수 선생에 의하면 화곡동 우장산이라 한다. 찾아보니 고도 96m밖에 되지 않는 조그만 산이다. 나그네는 겸재라 한다. 눈 오는 아침 잠도 없는 중노인네가 길을 나섰다. 현아에서 나와 양천향교역을 지나고 마곡나루역을 향해 간다. 나귀 타고. 사천은 제화시를 달았다.

長了峻雙峰 길고 우뚝한 두 봉우리
漫漫十里渚 멀기도 해라 십리 물가 길
祗應曉雪深 다만 새벽 눈 깊은 것에 응하다 보니
不識梅花處 매화 핀 곳 알지 못하네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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