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소비가 아니다. 구입하고자 하는 상품이 자신의 만족뿐 아니라 도덕적 신념에 부합하는지 꼼꼼하게 살펴본 뒤 소비하는 ‘가치 소비’가 뜨고 있다. 실제로 시장조사 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성인 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착한 소비’ 관련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8.9%는 ‘윤리적 경영을 실천하는 기업 제품이면 비싸더라도 구매할 의향이 있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가치 소비 추세의 흐름을 확실히 볼 수 있는 사례가 지난해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다. 지난해 7월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에 대항한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국민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촉진됐다.
이 여파로 지난해 하반기 일본 맥주의 월별 전년 대비 매출 신장률은 –52.2%로 절반 이상 떨어졌고, 12월엔 –93.8% 수치를 기록했다. 패션 브랜드 유니클로도 타격을 입었다. 올해 초 유니클로의 지주회사인 패스트리테일링은 연수익 전망을 당초 예상보다 1000억 원 이상 낮춰 잡았다. 한국의 불매 운동에 따른 겨울 상품 판매 부진에 따른 것이라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반면 삼일절을 맞아 3·1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기 위해 전개된 삼일절 마케팅은 주목받았다. 3월 1일, 스타벅스 카페와 이월드의 액세서리 브랜드 라템, 편의점 GS25가 무궁화, 생존 애국지사의 어록을 담은 스티커 물결에 휩싸였다.
스타벅스와 라템은 무궁화를 모티브로 한 제품을 선보였고, GS25는 국가보훈처와 손잡고 ‘생존 애국지사 30명이 우리에게 전하는 진심’을 주제로 어록 스티커를 제작해 판매하는 도시락 전 상품에 부착하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또 스타벅스와 라템 측은 각각 무궁화 에디션 판매 수익금 일부를 “광복절 독립유공자 자손 대학생을 위한 장학금 후원 사업,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에 기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GS25 측도 “삼일절 101주년을 맞아 조국 광복을 위해 힘쓴 생존 애국지사가 후세대에 전하는 어록을 알리고 독립유공자의 뜻을 기억하기 위해 이번 캠페인을 기획했다”며 “‘아픈 역사를 잊으면 우리 자신도 잊힌다’는 유훈을 이번 캠페인에서 소개하고, 캠페인 종료 후엔 국민들의 메시지를 영정에 바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단순 수익 목적이 아닌, 애국의 가치를 담은 마케팅은 소비자의 마음을 끌었다. 평소 스타벅스 상품(MD)에 관심이 많아 새로운 상품이 나올 때마다 매장을 찾는다는 30대 김지수 씨는 “예쁜 디자인과 실용성도 중요하지만, 삼일절 기획 상품은 애국의 의미를 되새긴다는 점에서 더 뜻깊은 소비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또 이 상품을 구매하는 행위로 독립유공자 자손 대학생을 위한 장학금 후원 사업에 함께 참여하며 힘을 보탤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다.
일본 제품 불매 운동과 애국 마케팅
가치 소비에 관심이 많은 소비자는 해당 제품뿐 아니라 그 제품을 만드는 기업이 어떤 활동을 하는 지 또한 주의 깊게 살핀다. 크게 눈에 띄는 주제가 ‘환경 보호’, ‘동물 복지’다. 롯데칠성과 동원산업은 친환경을 넘은 필(必)환경 시대에 환경 보호의 목소리를 높인 활동을 전개해 눈길을 끌었다.
롯데칠성은 2월 말 서울시와 버스정류장 주변 환경을 쾌적하게 개선하는 ‘버스정류장 쉘터 녹화사업’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버스정류장 쉘터 녹화사업은 버스정류장 주변 환경 개선을 위해 쉘터를 자연 친화적으로 탈바꿈하고 녹색 문화를 확산하고자 기획됐다.
롯데칠성 관계자는 “연말까지 양화신촌로 중앙버스 정류장 18개소를 선정하고 쉘터의 지붕, 벽면 및 주변 펜스에 공기 정화식물을 심은 ‘바이오 월(Bio wall)’을 설치해 해당 공간을 녹색 청정구역으로 개선할 계획”이라며 “칠성사이다 70주년 캠페인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이번 사업은 미세먼지를 비롯한 각종 대기오염 물질과 삭막한 도로 경관에 노출된 시민들에게 잠시나마 쾌적한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추진된 친환경 사업”이라고 말했다.
동원산업은 비슷한 시기 ‘플라스틱 저감화 3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매년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이기 위한 취지다. 이를 위해 동원산업은 TPO(Total Plastic officer, 토탈 플라스틱 오피서)라는 직책을 신설했으며, 선박별로 플라스틱 관리팀을 구성해 전사적인 플라스틱 절감 운동을 관리 감독한다는 계획이다.
동원산업 측은 “앞으로 3년간 총 40척의 자사 원양어선에서 사용하는 플라스틱 소모품 양을 2019년 연 409.8톤에서 2022년까지 연 141.6톤으로 약 65.4% 절감할 계획”이라며 “또 해양 환경 보호에 대한 필요성과 플라스틱 저감화에 대한 직원들의 인식을 고취할 수 있도록 매월 정기교육과 분기별 해양 환경 정화 봉사활동도 진행하고 향후 NGO 단체와 협력을 통해 플라스틱 해양 투척 방지 캠페인도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환경과 더불어 주목받고 있는 주제는 동물이다. 벤앤제리스, 뉴오리진, 롯데리아는 동물을 사육하는 대상이 아닌,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 인식하는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점차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동물 복지’ 가치에 주목했다.
벤앤제리스는 “성장 촉진 호르몬을 투여하지 않는 젖소의 우유와 자유 방목으로 기른 닭의 달걀을 사용해 아이스크림을 만든다”고 밝혔으며, 유한건강생활의 건강라이프 스타일 브랜드 뉴오리진은 “자유방목 인증 농가의 노하우로 자란 닭이 낳은 달걀”이라고 ‘산림방목 태초란’을 소개하며 “닭이 뛰어 놀고 먹는 흙에 살충제와 농약은 없는지와 항생제 없는 사료를 먹고 자라는지 등 토양부터 먹이까지 검증 과정을 거친다”고 밝혔다.
롯데리아는 ‘낫 비프, 벗 피브(Not Beef, But veef)’를 콘셉트로 식물성 패티, 빵, 소스로 만든 ‘미라클버거’를 출시했다. 콩 단백질과 밀 단백질의 비율을 조합시켜 패티를 만들었고, 소스엔 달걀 대신 대두를 사용했으며, 빵도 우유 성분이 아닌 식물성 재료로 만들었다. 롯데리아 관계자는 “국내 외식업계에 윤리적 소비에 관심을 두는 소비자가 늘어나면서 미래 먹거리로 주목받는 시장 트렌드를 반영했다”며 “환경과 건강을 생각하는 다양한 식물성 대체 햄버거를 즐길 수 있도록 지속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롯데마트는 ‘친환경’과 ‘동물 복지’ 가치를 결합시킨 성과를 인정받기도 했다. 롯데마트의 ‘같이가요 캠페인’이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인 ‘IF디자인 어워드’에서 브랜딩 카테고리 커뮤니케이션 부문 본상을 수상한 것. 지난해 9월부터 매장에서의 장바구니 사용 권장을 시작으로 환경 보호 참여를 독려하고자 진행해 온 캠페인으로, 장바구니와 상품들의 디자인은 바다에 사는 고래와 거북이, 산에 사는 곰과 다람쥐, 하늘에 사는 새 등 자연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물들로 표현됐다.
롯데마트 서현선 디자인 경영실장은 “고객이 생활 속에서 동참할 수 있는 캠페인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목표다. 상대적 약자인 동물들이 함께 살아가자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와 함께 소비자의 동참을 끌어내기 위해 슬로건도 ‘깨끗한 지구, 같이 만들어가요’로 선정했다”며 “좋은 기업, 친환경 사회적 기업, 고객 공감 가치를 높이기 위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소비 가치에 관심 높은 MZ세대
이처럼 가치 소비 트렌드에 올라타려는 업계의 움직임은 앞으로 보다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GS25 측은 “1인 가구의 증가와 함께 현재의 만족과 자신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확산됨에 따라 개인별로 가치를 두는 상품에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포미족(For me)이 늘어나고 있다. 이에 올해 가치 소비에 중점을 둔 소비 트렌드가 더욱 강화되고 확산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전망했다.
이어 “▲편리함에 중점을 둔 가치 ▲만족감 있는 한끼에 중점을 둔 가치 ▲재미와 감동에 중점을 둔 가치 ▲건강과 환경에 중점을 둔 가치 등 4가지 핵심 가치를 중심으로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다양한 상품을 적극적으로 기획해 선보일 방침”이라고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업계 관계자는 “소비의 주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다. 그렇기에 소비자들은 소비 행위를 통해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에 관여하고,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데 관심이 많다”며 “특히 수많은 정보를 빠르게 습득하고 공유하는 데 주저함이 적은 MZ세대(밀레니얼+Z세대·2030세대를 아우르는 말)는 SNS를 통해 자신이 어떤 소비를 했는지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등 가치 소비 트렌드는 점점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고 말했다.
소방관이 사용했던 방화복을 재활용한 제품을 판매해 수익금의 절반을 공상 불승인 소방관(업무 중 상해를 입었지만 국가 보상 승인을 받지 못한 소방관)에게 기부하는 사회적 기업 119REO의 이승우 대표는 “사회적 의미와 가치까지 담은 제품에 관심이 많은 20~30대 층이 주요 고객층을 이루고 있다”며 “이들은 물건 하나를 주고받을 때도 기왕이면 긍정적인 가치 실현까지 담아 전달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다”고 특징을 짚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과거 소비는 먹고살기 위한 행위가 중심을 이뤘다. 하지만 경제가 발전하면서 소비자들은 소비에 자신의 취향을 반영하기 시작했고,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소비로 정체성과 신념을 표현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불매 운동을 비롯해 지난해 영화계에서는 ‘82년생 김지영’ ‘미쓰백’ ‘걸캅스’ 등 여성 캐릭터가 중심이 된 영화를 응원하는 ‘영혼 보내기’(영화의 흥행을 위해 직접 극장에 가지 않더라도 좌석을 구매하는 것) 열풍이 관람객 사이에 불기도 했다. 앞으로는 상품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해당 상품에 어떤 가치를 담아 긍정적인 이미지까지 보여줄 것인지가 치열한 경쟁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가치 소비 트렌드에 대한 우려 또한 있다. 소비로 서로의 목소리를 공유하는 움직임이 과거에 비해 활발해졌지만, 그렇기에 자칫하면 잘못된 정보가 SNS 등을 통해 빠르게 전파돼 갈등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 또 타인에게 자신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소비 가치를 권유하는 것이 아닌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실제로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한창 불거졌을 당시 해당 브랜드의 제품을 구매하거나, 해당 매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온라인을 타고 한창 이뤄지기도 했다.
업계 관계자는 “가치 소비는 당시 사회가 어떤 분위기에 놓여 있고, 무엇이 유행인지에 따라서 휩쓸리기 쉬운 경향이 있다”며 “따라서 기업과 소비자 모두 충동적 또는 무조건적으로 분위기에 휩쓸리거나 따라가지지 않고, 주체성을 먼저 단단히 기르면서 트렌드를 읽는 것이 앞으로의 가치 소비에 있어 중요한 덕목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