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지만 동시에 대중에게 다소 어렵고 멀게 느껴지는 ‘판화’의 매력을 제대로 살펴보는 자리가 마련됐다.
세종문화회관이 기획전 ‘판화 오디세이’를 마련했다. 세종문화회관은 매년 다양한 기획전을 선보여 왔는데, 올해는 판화를 주제로 선정했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수작업으로 이뤄지는 전통 판화가 갖는 의미와 그 독특한 새김과 찍어내기의 확장성이 현대 예술에 미친 영향을 되짚어보는 자리다.
판화는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한 인쇄술의 발달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으며, 그 역사는 매우 오래됐다. 그러나 판화가 본격적으로 예술의 한 장르로 자리 잡은 것은 불과 1950~60년대다. 당시 미술대학에 판화과가 생기기 시작했고, 판화는 기법적으로도 매우 다양해 볼록판화, 오목판화, 평한화, 공판화 등 각기 다른 기술과 표현 방식을 통해 풍부한 예술 세계를 보여줬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면서 미디어의 급격한 발전과 미디어 아트, 융복합 미술 등 첨단기술을 앞세운 새로운 매체 미술이 주축을 이루면서 전통 판화는 대중의 관심에서 다소 멀어졌다. 그럼에도 판화는 여전히 회화와는 다른 독특한 매력을 지닌 예술 장르로서의 가치를 잃지 않고 있다. 이번 전시는 그런 판화의 매력에 깊이 있게 접근한다.
특히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판화의 예술적 표현미를 중심으로 주제별로 총 6개 섹션을 구성했다. 어떤 작품은 수채화 같기도, 또 다른 작품은 추상화 같기도 한 다채로운 매력들이 돋보이며 판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다.
세종문화회관 전시팀 유보은 큐레이터는 “판화를 주제로 한 전시는 ‘기법’ 또는 ‘연대’순으로 구분 짓는 형태가 보통인데, 이번 전시는 소재에 집중했다”며 “사람과 동물, 사물 등 일상의 소재와 추상이라는 주제로 나눠, 각 주제에 따른 작가들의 다채로운 예술적 감각을 살필 수 있다”고 말했다.
판화 1세대 원로작가부터 실험적 작가까지 아울러
첫 번째 섹션 ‘새김의 시작’은 조선시대 목판 등 다량 생산 기반의 유물을 통해 판화의 기원을 조망한다. 판화의 근원은 결국 ‘새김’의 행위로부터 비롯됐는데, 특히 벽에 형상을 새기는 암각화는 문자가 발명되기 전의 선사시대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자료이기도 하다. 이 그림들은 점차 형상 문자로 발전하고, 활자가 돼 새김문화의 기초가 됐다.
우리나라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고려, 보물 1132호)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술로 제작된 ‘팔만대장경’(고려, 국보 32호)을 지닌 나라로, 판화의 역사가 유구하다. 첫 섹션은 이런 ‘새김’의 시작을 알 수 있는 목판 유물로 한글성경목판 등을 소개한다.
다음으로는 인물과 동물을 주제로 한 ‘우리의 모습’ 섹션이 이어진다. 사회 비판이나 현실 드러내기를 직설적이지 않고 은유적이며 상징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오윤, 판화와 설치미술을 융합해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이는 권순왕 등 작가 9명의 작품을 전시한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풍경을 담은 민경아의 작품도 눈길을 끈다. 서울 상암동 방송국 거리와 광화문 신문사 거리를 재구성한 배경 위에 한국의 정체성을 담은 민화 호랑이, 안동 하회탈춤, BTS 등 다양한 요소를 결합해 과거와 현재, 동과 서, 자연과 인공이 갈등하고 화해하는 작품을 선보인다.
유보은 큐레이터는 “우리는 여행 중 다양한 사람과 동물을 만나고, 이를 통해 현재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기도 하는데, 사람과 동물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통해 판화 작품들과 긴 여행의 시작을 알리고자 했다”며 “살아있는 생명이 지닌 표정과 행위, 그 안에 담긴 다양한 분위기를 작품을 통해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자연의 숨결’에서는 김승연, 이상국, 김준권 등 작가 14명이 자연을 주제로 한 작품 40여 점을 선보인다. 불빛이 화려한 도시 야경을 흑백의 동판화로 표현한 김승연의 작품의 경우 세밀한 표현이 눈길을 끈다. 다색목판화의 대가인 김준권은 이번 전시에 압도적인 몰입감을 주는 대작 ‘산운(山韻) 2301’을 선보인다. 때로는 대범하게, 때로는 세심하게 표현된 다채로운 판화 작품에서 산과 강, 꽃과 나무 등 자연과 풍경의 아름다움이 예술로 재창조된다.
‘혼돈 속 질서’에서는 김형대, 김상구 등 작가 7명이 추상적 표현에 집중한 작품을 전시한다. 특히 이 섹션에서는 김구림, 프랭크 스텔라의 작품 배치가 눈길을 끈다. 이번 전시는 국내 작가뿐 아니라 알렉스 카츠, 우고 론디노네, 아니쉬 카푸어 등 해외 유명 작가의 작품도 아우르는데, 섹션 4에서는 동갑내기이자 실험적인 작품 스타일의 대명사인 김구림, 프랭크 스텔라의 작품을 서로 마주보게 배치한 것.
유보은 큐레이터는 “전시된 작품에서 김구림이 부드럽고 미묘한 색채를 활용하면서 여백의 미가 드러나는 반면, 프랭크 스텔라는 강렬한 색을 사용해 화면을 꽉 채운 특징이 있다”며 “판화 장르에서도 작가마다 각각의 특징을 어떻게 매력적으로 드러내는지 살필 수 있다”고 말했다.
‘일상의 경계’는 김구림, 강승희, 배남경 등 작가 8명이 집과 자동차, 책, 그네 등 일상 속 사물을 주제로 한 작품을 소개한다. 우리가 흔히 지나치는 사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와 감정을 끌어내는 자리다.
전시의 마지막은 ‘개념의 무한함’ 섹션이 장식한다. 기법, 형식, 재료, 매체의 경계 없이 판화의 개념을 확장시킨 작품들을 소개하는 장이다. 작가이자 미술평론가인 김노암은 코딩과 판화의 유사성을 언급하며 두 분야가 패턴 생성과 복제라는 본질적인 특징을 공유한다고 짚었는데, 이처럼 첨단 기술을 활용한 판화의 확장성에 주목한다.
종이 대신 호일에 이미지를 찍어내는 새로운 작업을 시도한 최혜민 작가, 패턴(알고리즘, 코드 구조)을 만들고 그 패턴을 컴퓨터가 여러 번 반복적으로 실행하게 한다는 점에서 판화와 공통된 본질적 특징을 지닌 코딩을 통해 디지털 작업을 하는 디지털 미디어 아티스트 서효정, 미디어아티스트 칼로스의 작품을 통해 재료의 경계를 뛰어넘는 판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조망한다.
세종문화회관 안호상 사장은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술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그에 걸맞게 뛰어난 판화 작가들이 많이 있다”며 “그러나 판화는 여전히 대중에게 다소 어렵고 멀게 느껴지는 장르다.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 현대 판화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예술적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전시는 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 1~2관에서 내년 1월 5일까지 열린다.
한편 세종문화회관은 이번 전시에 대한 관람객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 직접 판화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판화 전문 연구기관인 PARC(Print Art Research Center)와 협력해 판화 공방을 재현한 특별존을 마련, 동판 프레스, 종이함, 종이 건조대, 브레이어, 쇠 브러쉬 등 판화 제작에 필요한 다양한 도구들을 전시한다. 또한 판화 제작 과정을 함께 체험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도 진행할 예정이다.
사전 예약을 통해 진행되는 ‘판화 인쇄 체험’에서는 전문가의 지도 아래 다양한 판화 기법을 배우고 직접 자신의 작품을 제작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밖에 상시 프로그램으로 ‘크리스마스 오너먼트 및 연말 판화 카드 제작 체험’을 진행한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