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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리뷰] 지옥을 경험한 타나아미의 유산, 짙은 日色 팝아트

‘케이이치 타나아미: I’M THE ORIGIN’ 특별전 다섯 개 층을 둘러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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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88호 김응구⁄ 2025.01.17 17:30:59

설치 작품 ‘백 개의 다리’(위)와 병풍 콜라주에는 수탉이나 잉어, 목이 긴 요괴, 뱀 모양의 여인까지 조금은 괴기스러운 이미지로 가득하다. 사진=김응구 기자
 

“만약 내 그림에서 환각 또는 사이키델릭한 감각을 느낀다면, 아마도 그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전쟁이라는 경험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새빨갛게 물든 밤하늘을 가르던 탐조등의 빛은 내 어린 시절의 눈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케이이치 타나아미(網敬一田名)의 유년은 지옥이 멀리 있지 않았다. 바로 눈앞이었다. 그에게 전쟁은 만화나 영화의 소재가 아닌 현실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평생을 트라우마에 갇혀 살았다.

그가 재작년 일본 라이프 매거진 ‘SPUR’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전쟁 중에는 죽음이 너무나 흔한 일이어서 일상적인 사건처럼 여겨졌다. 나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아이들이 계속해서 트라우마를 겪는다고 생각한다. 예술을 창작하는 일은 전쟁으로 인한 왜곡과 어둠이 내 영혼을 잠식하지 않도록 환기하는 방법이었다. 예술은 나를 구원했지만, 나는 여전히 죽음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혀있다. 사람들은 그 공포를 이해한다지만, 그것이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대부분 다른 사람의 문제로 여기는데, 이것이 정말 무서운 점이다. 전쟁은 지옥이며,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을 피해야 한다. 아무도 다시는 그런 비극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란다.”

어쩜, 타나아미의 작품은 그의 생애 전부 혹은 단편이기도 하다. 생사를 넘나드는 지옥 같은 어제와 오늘을 캔버스에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그는 생의 굴곡을 너무도 빨리 경험했다. 1981년에는 결핵으로 입원했다. 이때도 생사를 오갔다. 그 기로(岐路)에서 환각과 환영을 경험했다. 역설적으로 이는 그만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만들어 내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나에게 대담하고 흥미로운 일이 아니라면 해봐야 의미가 없다.”

흔히 타나아미를 ‘동양의 앤디 워홀’로 부른다. 동의하지 않는다. 타나아미는 타나아미다. 분명 앤디 워홀에게 영향받았지만, ‘팝아트’라는 장르적 유사성을 가져다 붙여 이해를 요구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그래서 동의하지 않겠다. 그는 경험했고 싸웠고 표현했다. 그것도 아주 치열하게. 그걸로 타나아미임을 증명했다. 앤디는 앤디고,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로이 리히텐슈타인이다. 타나아미는 타나아미다.

 

케이이치 타나아미의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기작과 포스터·콜라주 작품에선 어떤 방식으로 자신만의 제작 방법을 확립하고 예술 세계를 확장해 나갔는지 보여준다. 사진=김응구 기자
 

유년 시절 꿈은 만화가, 성인 돼선 그래픽디자이너로 활동

1936년 일본 도쿄 한 섬유도매상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꿈은 만화가였다. 자라선 무사시노(武蔵野) 미술대학 그래픽디자인학과에 진학했다. 전공을 살려 졸업 후에는 그래픽디자이너로 활동하며 미국 록밴드 ‘제퍼슨 에어플레인’이나 ‘몽키즈’의 앨범 표지를 디자인했고, 그 와중 아방가르드 잡지가 주최한 반전(反戰) 포스터 대회에 ‘노 모어 워(No More War·1967)’를 출품해 수상하기도 했다.

조금 의외지만 타나아미는 영화도 만들었다. 유년 시절 도쿄 메구로(目黑)시네마에서 서부 영화와 디즈니 만화를 접했던 그는 일찌감치 영화에 매료됐다. 1960년대 초 한 스튜디오에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하며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고, 1965년 첫 애니메이션 작품 ‘가면을 쓴 꼭두각시(Marionettes in Masks)’를 선보였다. 이는 그해 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 상영돼 주목받았고, 이를 계기로 1971년 니혼TV 프로그램 ‘11PM’의 애니메이션 제작을 의뢰받았다.

1970년 뉴욕을 방문했을 때 케네스 앵거, 앤디 워홀, 요나스 메카스의 독립영화에 영감받았고, 이후 여러 편의 실험 영화를 제작했다. 그 작품들은 일본, 독일, 미국, 캐나다 등에서 상영되며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2000년대 들어선 영화 ‘은하철도 999’,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 등의 제작에 참여했다.

타나아미는 생전 70편 넘는 영화를 만들었다. 그에게 영화는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새로운 창작의 영역을 탐구하는 수단이었다.

“창의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려면 계속해서 흥미로운 일을 해야 한다. 거창할 필요는 없고, 그저 산책하거나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꾸준히 작업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타나아미의 작품은 뉴욕 현대미술관, 시카고미술관, 워싱턴D.C. 국립초상화미술관, 홍콩 엠플러스 등 여러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케이이치 타나아미는 1981년 결핵에 걸려 생사를 오갔다. 투병을 마치고선 꿈, 환각, 환영에서 영감받아 제작한 작품들과 드로잉 시리즈를 선보였다. 사진=김응구 기자
 

Keiichi Tanaami: I’M THE ORIGIN

대림미술관의 문은 지난해 12월 14일 열었다. 올해 6월 29일까지 6개월 넘도록 문을 열어놓으니 천천히 방문해도 좋다.

전시는 미술관 1층부터 4층, 그리고 그 건물 바로 옆 ‘미술관 옆집’ 2층까지 총 다섯 공간에서 펼쳐진다. 그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쉽도록 층마다 각각의 주제로 나눴다.

대림미술관 1층은 ‘INTO TANAAMI’S WORLD’다. 전시의 시작이다. 작품은 두 개. 그중 아치형 다리(橋) 여러 개를 쌓아 올린 커다란 설치 작품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백 개의 다리(A Hundred Bridges·2024)’다. 케이이치 타나아미에게 다리는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의 경계이자 또 다른 만남의 장소다. 이 다리들에는 서로 다른 이미지들이 프로젝션(투영)되며 움직인다. 수탉이나 잉어, 목이 긴 요괴, 뱀 모양의 여인까지 조금은 괴기스러운 이미지로 가득하다.

그 옆에는 커다란 병풍 콜라주가 놓여있다. 폭마다 ‘백 개의 다리’에 수놓은 이미지들로 채웠다.

심하게 어두운 공간. 설치 작품과 병풍. 미술관 문밖 현실로부터 신비로운 타나아미의 세계로 초대하며 전시의 시작을 알리는 이곳은, 마치 파인다이닝의 아뮤즈 부쉬(Amuse-Bouche)를 맛보는 것처럼 가슴을 울렁이게 만든다.

 

2층은 ‘IMAGE DIRECTOR’다. 타나아미는 그래픽디자이너이자 예술가로서 자신을 ‘이미지 디렉터’라고 칭했다. 어린 시절 만화가를 꿈꿨던 그답게 잡지·만화·영화 속 이미지로부터 영향받아 장르와 규칙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실험을 해나갔다.

이 공간은 타나아미의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기작과 포스터·콜라주 작업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자신만의 제작 방법을 확립하고 예술 세계를 확장해 나갔는지 조명한다.

1968년 도쿄 긴자의 디스코텍 ‘킬러 조(Killer Joe’s)’에서 아트 디렉터로 활동하던 때의 작업물과 앞서 말한 ‘노 모어 워’ 포스터가 자리하고 있다. ‘웨이트리스(Waitress·1973)’ 등 아크릴 회화 작품들은 원래 잡지 표지를 위해 만든 것이다. 그중 ‘금붕어(Goldfish·1975)’는 타나아미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금붕어를 처음으로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사실, 금붕어는 그가 어린 시절 경험한 2차 세계대전의 기억과 긴밀히 연결된 소재다. 피난처였던 외조부 집 정원에서 키우던 금붕어가 쏟아지는 조명탄 불빛을 반사하며 반짝이던 모습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이후 그의 창작 세계를 구축하는 강력한 시각적 모티브로 자리 잡았다.

 

전시는 대림미술관 바로 옆 ‘미술관 옆집’으로도 이어진다. 사진=김응구 기자


콜라주 작품 중에선 아주 익숙한 얼굴도 마주했다. 고 김대중 대통령.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전시 관계자에게 물었다. 그는 타나아미의 1969년 뉴욕 방문을 먼저 얘기했다.

“타나아미는 당시 벌어진 인권 운동이나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 등의 정치적 혼란과 다운타운 지역의 약물 문화를 직접 목격했어요. 이는 1950년대 일본으로 유입된 B급 잡지 속 화려하고 이상적인 미국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현실의 미국을 발견하는 계기가 됐죠. 타나아미의 빈티지 콜라주 시리즈는 2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한 삼촌이 남긴 유물을 활용해 제작했어요. 그 유물에는 미국 대중문화와 전쟁 관련 이미지가 다수 포함돼 있었고, 타나아미는 이를 통해 환상과 현실의 대비를 탐구하며 작품으로 구현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역시 이 같은 맥락에서 전쟁 이후 평화와 저항의 상징으로 활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이에 대한 작가의 직접적인 언급은 확인되지 않았어요.”

 

3층은 ‘CREATIVE ILLNESS’다. 이곳에선 타나아미가 투병을 마치고 꿈, 환각, 환영에서 영감받아 제작한 작품들과 드로잉 시리즈, 특히 2020년 이후 팬데믹 당시 몰두했던 피카소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그는 1981년 결핵으로 투병하며 삶의 큰 전환을 맞았다. 디자이너라는 커리어를 정리하고 전업 작가의 삶을 시작한 타나아미는 생사의 기로에서 경험한 환각·환영의 트라우마를 토대로 강렬하고 독자적인 시각적 스타일을 정립했다. 이 시기 작품들에는 삶과 죽음을 상징하는 모티브가 등장하거나 회화·드로잉·조각 등 매체를 넘나드는 시도로 다양한 재료를 탐구하는 등 새로운 작업 방식이 등장한다.

중국 방문 경험을 토대로 동양의 길상(吉祥) 아이콘들을 활용해 제작한 ‘도키와마츠(Tokiwa-matsu)’ 시리즈(1986~1987)라든지 어린 시절의 경험과 기억을 모티브로 한 ‘생명 탄생(The Birth of Life)’ 시리즈(1990)와 ‘엘리펀트 맨(Elephant Man)’ 시리즈(1990), 팬데믹 기간 꾸준히 제작한 ‘피카소 모자상의 즐거움(Pleasure of Picasso-Mother and Child)’ 시리즈(2020~2024)는 끊임없는 예술적 탐구와 혁신을 증명하고 있다.

4층은 ‘TANAAMI’S UNIVERSE’로 꾸몄다. 타나아미 스타일의 정수를 보여주는 조각과 영상, 실크 스크린이 전시돼 있다. 기괴한 모양의 생물을 혼합해 생명력 넘치는 조각상으로 묘사한 ‘기상천외한 몸(Incon-ceivable Body·2019)’을 필두로, 만화가 아카츠카 후지오(赤塚不二夫)와 함께한 ‘거울 속의 내 얼굴(My Face in the Mirror·2022)’ 등은 그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온전히 느끼게 한다.

 

케이이치 타나아미의 실물 크기 마네킹은 전시를 보는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사진=김응구 기자


‘미술관 옆집’ 2층은 ‘TANAAMI’S CABINET’이다. 타나아미의 캐비닛을 들여다보는 듯한 재미가 쏠쏠하다. 다양한 기업과 컬래버레이션한 각종 오브제를 비롯해 그의 풍부한 창작 세계를 담은 실험 영화, 애니메이션, 도서 등을 선보이고 있다. 그러니까 이 공간은 순수예술의 틀을 넘어 상업 디자인, 대중문화를 결합한 타나아미의 비전을 탐구하는 장이다.

타나아미는 메리 퀀트, 아디다스, 그라운드 와이, 바비 등 글로벌 패션 브랜드나 여러 음악가와 작업하며 자신의 창작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실제 이 공간의 모든 오브제, 이를테면 운동화나 티셔츠, 인형이나 서핑보드에는 그만의 입체와 색과 모양으로 뒤덮여 있다. 유카타(ゆかた)처럼 보이는 크고 화려한 겉옷을 입은 타나아미의 실물 마네킹도 무척 인상 깊다.

케이이치 타나아미는 이번 전시를 보고 싶어 했다. 실제 오겠다고도 했다. 허나, 개관 4개월을 앞두고 그는 조용히 숨을 거뒀다. 그의 생애 마지막 전시는 대림미술관에서 마무리하게 됐다.

〈문화경제 김응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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