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파일럿’은 과연 인간 조종사를 추월할 수 있을까? 정답은 ‘Yes’다. 지난 2020년 미 국방부가 실시한 인간 파일럿 대 AI 파일럿의 모의 시뮬레이션 도그파이트(공중전)에서 인간 파일럿은 AI 파일럿에 5대 0으로 완패했다. 당시 인간 파일럿은 미 공군의 교관을 맡은 베테랑이었으나 AI 파일럿의 창의적이고 공격적인 전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는 건 이후 이야기다. 공군에서도 사용하는 비행시뮬레이션게임 DCS(Digital Combat Simulator)의 1위 프로게이머로 현 KAI 미래소프트웨어(SW)기술팀 소속 연구원인 한성호 씨가 ‘인간 대표’로 AI 파일럿에 도전했고, 초반 3라운드에서는 연패했지만, 이후 4라운드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둔 것. 이후 5라운드에서도 우위를 유지했지만 무승부로 끝나 최종 스코어는 3패 1승 1무로 마무리됐다.
마치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을 연상케하는 이 에피소드는 AI 파일럿의 개발 수준이 이미 세인들의 상상을 훨씬 넘어선 단계에 이르렀음을 짐작케 한다.
일반적으로 ‘AI 파일럿’은 인공지능(AI)을 활용하여 인간 조종사의 역할을 대체하거나 보조하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단순히 비행체를 조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투 상황에서의 실시간 의사결정, 데이터 분석, 목표 탐지 및 공격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개념이다.
AI 파일럿은 센서 데이터를 분석하고, 환경을 인식하며, 사전에 프로그래밍된 알고리즘 또는 학습된 모델을 통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그로 인한 장점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반응 속도와 정확성, 그리고 24시간 운용 가능성 등이다. 중력가속도(G) 9배 이상의 기동을 견디고, 피로 없이 24시간 작전을 수행한다는 건 인간 조종사에겐 불가능한 영역이다.
미국·중국 경쟁력 한 발 앞서
AI 파일럿은 최근 몇 년간 급격한 발전을 이루며 실전 배치에 가까워지고 있다. 특히 미국, 중국, 러시아 등 군사강국들은 너나없이 AI 기반 무기체계 개발에 막대한 자원을 투입하고 있다.
AI 파일럿 개발의 선두주자는 단연 미국이다. 2024년 4월, 미 공군은 세계 최초로 인간 조종사와 AI가 조종하는 전투기 간의 공중전이 캘리포니아 에드워즈 공군 기지 상공에서 진행됐다고 밝혔다. 이 훈련에서 두 대의 F-16 전투기는 최대 1200mph의 속도로 비행하여 공중 전투 중 600미터까지 접근, 도그파이트를 전개했다.
두 전투기 중 하나는 유인 항공기였고, 다른 하나는 AI가 조종하는 X-62A VISTA(가변 비행 시뮬레이터 테스트 항공기)라 불리는 무인 항공기로, F-16의 개조된 버전이었다. 이날 대결의 승자가 어느 쪽이었는지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AI 파일럿은 실시간으로 비행 경로를 조정하고, 모의 전투 상황에서 표적을 식별하며, 인간 조종사 수준의 기동을 수행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최근 미 공군은 2028년까지 총 60억 달러(약 80조원)을 들여 AI 기반 무인 전투기 1000대를 배치하고, 2030년에는 전력화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DARPA(미국 국방고등연구계획국)가 연구 중인 미군의 미래 군사작전 수행방식 모델인 ‘모자이크 전(Mosaic Warfare)’ 프로젝트에 따르면, AI 파일럿은 단순한 비행 조종을 넘어 전술적 의사결정까지 담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개발돼 미래 전장의 ‘게임체인저’로 자리잡게 된다.
중국 역시 AI를 ‘지능화 전쟁’의 핵심으로 인식하고 있다. 중국 인민해방군(PLA)은 자율 군용 로봇과 드론 개발에 집중하며, AI 파일럿을 통한 무인 전투 플랫폼을 실험하고 있다. 지난 2023년 인민해방군 산하 연구소에서 AI 파일럿과 인간 조종사가 모의 공중전을 벌였으며, 현재 AI 파일럿 관련 논문의 대다수가 중국에서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과 중국에 비해 한국과 유럽, 일본, 러시아 등은 상대적으로 뒤처진 상태로 평가된다. 2020년 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국방 기술 수준을 100으로 볼 때 한국은 75 수준으로, 한국의 기술력이 미국보다 약 10년가량 뒤처졌다는 분석이 나왔다.
KAI “산학협력, 해외기술 도입 등 전력 드라이브”
한국항공우주산업(KAI, Korea Aerospace Industries)은 1999년 창립 이래 T-50 고등훈련기, KF-21 보라매 등 국산 항공기 개발을 선도하며 국가 방위산업에 기여해온 대한민국 대표 항공우주 기업이다.
KAI는 지난해부터 AI 파일럿 개발을 본격 추진해왔다. KAI는 AI 파일럿을 한국형 초음속전투기 KF-21을 활용한 차세대 공중전투체계(NACS, Next-generation Air Combat System)의 핵심으로 설정하고 있는데, NACS는 KF-21과 무인전투기(USCV), 다목적무인기(AAP), 저궤도 통신위성이 연계된 공중전투체계다. KF-21 조종사가 USCV와 AAP로 구성된 무인기 편대를 통제하며 고위험 임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모델이다.
NACS의 구현을 위해 KAI는 2023년 하반기부터 AI 파일럿의 항공기 제어기술 연구를 시작으로 지난해 2월 AI, 빅데이터, 자율·무인 기술 연구에 1025억 원 규모의 투자를 단행하며 기술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먼저, KAI는 국내 AI 생태계를 구축하며 산학 협력과 투자에 적극 앞장서고 있다. 서울대학교와 2023년 MOU를 체결해 가상 환경에서의 대규모 훈련이 가능한 AI 시뮬레이터 고도화와 가상 항공기 설계를 공동 연구하고 있다. KAIST와도 파트너십을 체결, AI 파일럿 기술 고도화를 추진 중이다.
또, AI 빅데이터 기업인 코난, 의사결정 AI 전문기업 펀진, AI기반 국방 합성데이터 솔루션기업 젠젠에이아이(GenGenAI) 등 AI 전문 강소기업에 지분 투자를 실시해 AI 파일럿 소프트웨어와 합성 데이터 개발 역량 확보에 나서고 있다.
해외 선진 기술 도입에도 적극적이다. 지난 3월 KAI는 미국의 무인전투기 제작업체 ‘쉴드 AI’와 ‘HME(Hivemind Enterprise)’ 소프트웨어 사용 계약을 체결했다.
HME는 무인항공기 드론에 임무 수행을 위한 자율성을 구축, 평가, 검증하는 소프트웨어로, 2018년부터 F-16 (X-62 VISTA), GA-ASI MQ-20 Avenger, Kratos MQM-178 Firejet 등에 적용되어 AI 기반 자율비행 능력을 선보인 바 있다.
KAI는 HME를 활용해 독자적으로 개발 중인 AI 파일럿의 자유비행 기술을 검증하고 다목적무인기(AAP) 축소기에 통합하여 실증에 나설 계획이며, 이를 통해 AI 파일럿 개발 기간을 단축하고 기술을 고도화한다는 전략이다.
“2030년 완전 자율화 실현” 목표
2025년 4월 기준, KAI의 AI 파일럿 개발은 초기 실증 단계를 넘어 실전 적용을 준비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2024년 KAI는 경남 고흥의 전용 비행장에서 AAP 축소기에 AI 파일럿을 탑재해 기본 항법과 장애물 회피 비행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는데, 이는 AI 파일럿이 실질적인 비행 환경에서 작동 가능함을 입증한 사례다. 올해는 마하 0.6 속도로 비행하는 3.1m 길이의 AAP에 AI 파일럿을 탑재해 자율 비행 실증 연구를 추진할 계획이다.
이어 2027년까지 FA-50에 AI 파일럿을 탑재해 반자율 편대 비행과 전술 훈련을 실증하고, 2030년 이후에는 AI 파일럿이 단독 임무를 수행하는 완전 자율화를 실현한다는 계획이다.
지난 1월 KAI는 ‘K-AI 파일럿’ 네이밍 공모전을 열어 개발 중인 AI 파일럿의 새로운 이름을 ‘KAILOT(카일럿)’으로 확정했다.
KAI 최낙선 AI·항전연구센터장은 “KAI가 자체 개발하고 있는 AI 파일럿 기술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빠르게 검증하고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며 “대한민국 대표 AI 파일럿 ‘카일럿’이 진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관심있게 지켜봐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