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걸어 나와 무대 한 가운데에 마련된 의자에 앉는 순간. 아직 한 마디도 내뱉지 않은 채 도도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지만, 관객들은 그 순간부터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 그녀가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에도 절로 귀를 기울인다. 그녀는 연신 외친다. “지루하다”고. 하지만 그녀를 지켜보는 관객들은 도통 지루할 틈이 없는 긴장감의 연속이다.
헨리크 입센 고전 명작, 현대적 각색으로 무대 채워
연극 ‘헤다 가블러’가 베일을 벗었다. 헤다 가블러는 세계적인 극작가 헨리크 입센이 1890년에 집필한 고전 명작으로, ‘여성판 햄릿’으로도 불리는 작품이다. 주인공 헤다 가블러는 누구나 우러러 볼만큼 우아하고 아름다운 귀족 여인이다.
하지만 그녀의 이면엔 불안, 욕망과 파괴적인 본성이 숨겨져 있다. 헤다는 충실한 학자인 조지 테스만(김정호)과 충동적인 결혼 후 이전 성인 헤다 가블러가 아닌, 헤다 테스만이 된다. 하지만 극 진행 과정 내내 그녀를 ‘헤다 테스만’이라고 똑바로 부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보다는 헤다, 헤다 가블러라는 이름이 더 많이 나온다. 연극 제목 또한 한 남자의 아내보다는 독립적 개인임을 상징하는 헤다 가블러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헤다는 테스만과의 충동적인 결혼 후 권태를 느낀다. 그러던 중 옛 연인 에일레트(이승주)를 만나고 다시금 그를 통제하고픈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여기에 자신이 예전 하찮게 여기던 동창 테아(백지원)가 에일레트를 변화시키고, 그가 뛰어난 글을 쓰는 데 영감을 준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질투심도 극에 달한다. “내 인생에서 한 번쯤 한 사람의 인생을 조종해보고 싶었다”는 헤다의 뒤틀린 욕망은 더 이상 안에 숨지 않고, 바깥으로 꿈틀대며 나오기 시작한다.
작품은 사회적 제약과 억압 속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심리를 탐구한다. 극 중 헤다는 여성으로 출산과 육아를 강요당하긴 하지만, 꼭 여성에 국한된 문제로만 느껴지진 않았다. 그보다는 자유에의 강한 열망으로 타들어가는 한 인간의 심리가 처절하게 느껴졌다.
이는 현대적 각색의 영향으로 보인다. 이번에 공연되는 헤다 가블러는 영국 공연예술상인 올리비에상의 베스트 감독상, 베스트 리바이벌상(2006) 수상작이자, 본 작품을 각색하고 직접 연출한 바 있는 리처드 이어가 현대적으로 각색한 버전을 바탕으로 한다.
관련해 전인철 연출은 “헤다 가블러는 1890년에 쓰였지만, 읽을수록 대단히 현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인이 지닌 불안과 욕망을 잘 드러내 2025년 동시대 관객에게도 충분히 공감과 울림을 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빛 발하는 배우 이영애의 존재감
무엇보다 이 헤다를 연기하는 이영애의 존재감이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영애는 이번 작품을 통해 32년 만에 연극 무대로 복귀했다. 헤다는 누구보다 자유를 갈망하지만 계속 억압당하고 스스로의 존재가 아닌 남편의 트로피가 돼버린 자신의 현실을 마주하며 점점 미쳐가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영애는 이 광기어린 헤다의 모습을 설득력 있게 구축해 나간다.
누구나 “예쁘다”고 칭송하는 헤다의 매혹적인 모습을 그리면서도 거침없이 총을 드는 과격한 모습, 그러다가 한순간에 어린아이처럼 ‘꺄르르’ 웃어버리는 천진난만하면서도 섬뜩함을 넘나드는 헤다의 변주가 이영애로 인해 다채롭게 표현된다.
전인철 연출은 연습 과정에서 “매일매일 이영애가 새로운 헤다를 보여준다. 연습하면서 배우 이영애는 진중하면서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면도 많다는 걸 느꼈다. 그렇기에 헤다의 여러 면을 무대 위에서 보여줄 것”이라고 밝혔는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납득이 가는 현장이었다.
LG아트센터는 헤다 역으로 이영애를 캐스팅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LG아트센터 이현정 센터장은 “이영애 배우는 LG아트센터가 역삼동에 있을 때부터 연극을 보러 자주 왔는데, 평소 연극 무대에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을 통해 전해 들었다”며 “언젠가 작품을 같이 하고 싶다고 꿈 꿨는데, 이번에 헤다 역에 딱 걸맞다고 생각해 제안했다”고 캐스팅 비하인드를 전했다.
LG아트센터는 지난해엔 배우 전도연의 27년만의 연극 복귀작 ‘벚꽃동산’으로 흥행한 바 있는데, 올해는 이영애가 그 화제성을 톡톡히 이어갈 전망이다.
클로즈업 실시간 영상 등 영리하게 활용
배우들의 연기와 더불어 신선한 무대 연출도 눈길을 끈다. 극 중 헤다는 탈출할 곳이 전부 가로막힌 듯한 좌절감을 느끼는데, 무대 또한 창문 하나 없다. 배우들은 무대에 들어서는 순간 퇴장 없이 극 내내 무대를 맴돈다. 헤다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닭장’으로 비유하기도 하는데, 그녀의 말처럼 극 중 인물들은 모두 하나의 큰 새장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 색 또한 무채색으로 삭막하다.
이 삭막한 무대에서 유일하게 화려하게 빛나는 것은 각양각색의 풍선들이다. 하지만 이 풍선들 또한 드넓은 하늘로 자유롭게 비행하지 못한다. 잠시 인물들의 손에 떠밀려 날아오르는가 싶다가도 꽁꽁 묶인 채 다시 땅에 가라앉는다. 계속해서 좌절되는 헤다의 자유 의지와도 같다.
영상을 영리하게 활용한 방식도 인상적이다. 1300석 규모의 대극장에서 관객은 무대에 선 헤다의 세세한 얼굴 표정까지 보기 어려운데, 이번 공연은 실시간으로 헤다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무대 뒤편에 큰 화면으로 이를 바로 보여준다.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이영애는 소위 ‘얼빡샷’을 당하는데 굴욕 없이 매혹적인 헤다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이 클로즈업은 헤다와 에일레트가 서로의 뒤틀린 속내를 털어놓는 장면, 헤다가 에일레트의 소중한 원고를 처리하는 장면에서 몰입도를 높인다. 해당 장면들 이후 이영애는 감정이 북받친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관객들 또한 같은 장면에서 더욱 숨죽인 채 공연에 몰입했다.
결코 가벼운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아니기에 극이 내내 진중하고 우울할 것 같지만, 공연은 극 중간 중간 웃음이 터지는 포인트를 배치해 지루하게 흘러가지 않도록 신경 썼다. 헤다와 테스만의 의외의 티키타카가 이어지기도 하고, 헤다를 억압하려는 판사 브라크만(지현준)의 깜짝 등장 등을 배치해 에너지 밸런스가 맞춰진 듯한 느낌이다.
헤다의 마지막 선택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갈릴 듯하다. 원작이 오랜 과거에 쓰인 만큼 당 시대엔 가장 충격적인 선택이자, 항거의 의지로도 읽혔지만 현 시대의 감수성에서는 회피로 읽힐 여지도 있다. 이는 공연이 무대에 오를 때마다 항상 따라붙었던 논쟁으로, 이번에도 다양한 의견들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공연은 LG아트센터 서울에서 다음달 8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