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머물다 떠나는 나그네 길은 흰 구름 같은가. 매월당은 이제 신륵사를 떠나 원주행 길을 떠난다. 동으로 길목을 잡으면 남한강을 끼고 내려와 이호리에 닿는다. 우리 시대에는 여주 시내에서 넘어오는 이호대교가 42번 국도로 거침없이 뻗어나가 문막으로 향한다. 매월당도 이 길을 통해 원주로 향했을 것이다. 이 지역은 여주 강천면이다. 그 끝에는 그다지 높지 않은 산 삿갓봉이 길을 막는다. 아마 매월당도 이곳 고갯길을 넘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이제는 터널(부평터널)이 뚫려 수고스러움이 없다.
이 터널 밖은 강원도 원주 지역 문막읍 반계리이다. 조금 과장한다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생긴 은행나무가 길손을 기다리는 곳이다. 800년도 넘었다는데 그 앉은 자리며 벌린 팔이며 가을날 들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하는 나무다. 천연기념물 167호.
큰 나무가 대개 그렇듯 내력도 가지고 있는데 지나가던 어느 노스님이 지팡이를 꽂았는데 거기에서 싹이 터 이런 거목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무 속에는 흰 뱀이 살면서 이 나무를 지키는 신성한 나무라서 나무에 손을 대면 큰 액(厄)을 면키 어렵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서 작은 강이 펼쳐진다. 섬강(蟾江)이다. 송강 정철은 관동으로 가는 길에 이 강을 건너며 ‘관동별곡’에 실릴 한 구절을 읊었다.
“蟾셤江강은 어듸메오, 雉티岳악이 여긔로다.”
어찌해서 이 강은 ‘두꺼비(蟾) 강(江)’이 되었을까? 섬강은 태기산에서 발원하여 횡성을 지나 이곳 문막 끝에서 남한강으로 들어간다. ‘동국여지승람’에도 섬강(蟾江)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고, “주(州) 서남쪽 50리에 있다” 했으니 오래전부터 부르던 이름이다. 이 강 중류쯤 되는 간현역 앞 병암(屛巖)에 있는 두툼한 바위가 ‘두텁바위’다. 이 두툼한 바위가 ‘두껍바위’(蟾岩)로 오해되면서 섬암강(蟾岩江)이 되더니 아예 섬강이 되었다.
비슷한 예가 서울에도 있다. 후암동 쪽 남산 아래에는 두툼한 두텁바위가 있었다. 다행히 이 바위는 두껍바위가 되지 않고 후암동(厚岩洞: 두텁바위 동)이란 지명으로 남았다.
이 강이 남한강으로 들어가는 합류 지점은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였다.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가 만나는 지점인 데다가 고려 때부터 주변 지역(원주, 평창, 영월, 정선, 횡성 등)의 세곡(稅穀)을 모아 수도(개성, 한양)로 옮기는 13 조창(漕倉)의 하나인 흥원창(興原倉)이 자리해 조운(漕運: 뱃길로 운반함)의 중심지가 되었다. 매월당의 시절에도 번창했을 것이다. 섬강 나루 주변은 중앙선 기차가 뚫려 물류의 이동이 철도로 넘어가기 전까지 번창했다고 한다.
경제력이 받쳐주다 보니 지방 세력도 상당해서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대찰(大刹)들이 세워졌다. 지금도 우리 곁을 넉넉하게 해 주는 옛 절터들, 즉 법천사지(法泉寺址), 거돈사지(居頓寺址), 흥법사지(興法寺址)와 그곳에 서 있는 석탑, 부도, 탑비는 1000년을 넘어서도 우리 시대에 살아 있다. 매월당은 이 대찰에는 들리지 않은 것 같다. 그의 발길은 문막 동화산(桐華山)의 동화사(桐華寺)로 이어진다.
동화사에 머물다 원주
동화산은 높아 하늘에 꽂혔는데
동화 옛 절은 구름에 떠 있다
산속 노승은 제 정취에 젖어
누워 바라보네, 푸른 산봉우리 피어나는 흰 구름
화기로운 봄날 사람도 따듯한데
산살구는 꽃 틔우고 매화 열매 맺히기 시작하네
골짜기 아래 미나리 싹 어리기가 실낱 같아
뜯고 뜯어 상 차리니 채반상이 새롭구나
만릿길 다니다 보니 가을은 다시 봄이 되었고
멧새 우는 곳에 산 꽃도 웃고 있네
동쪽 바라보니 청봉(靑峰)이 푸른 하늘에 기댔는데
햇빛 속 산 기운은 파란 하늘 층층이
세상일 모두 봄 꿈인 것을
오대산으로 은사(隱士)를 찾아가리
하늘 보며 크게 웃고 호연히 떠나가는데
우리가 어찌 벌레 같은 인생이리?
宿桐花寺 原州
桐花之山高揷天. 桐花古寺浮雲煙. 山中老僧自有趣. 臥看白雲生翠巓. 怡怡春日煖可人. 山杏吐萼梅始仁. 澗底芹芽嫩如絲. 采采行廚蔬盤新. 遨遊萬里秋復春. 野鳥啼處山花嚬. 東望靑峯倚碧天. 嵐光滴翠空嶙峋. 世間萬事屬春夢. 我向五臺尋隱淪. 仰天大笑浩然去. 我輩豈是蟲臂人.
매월당은 동화산(桐華山) 동화사에 여장을 풀었다. 산살구 꽃 흐드러진 봄날 햇미나리가 공양상에 올랐다. 눈은 산살구 꽃과 매화가 갓 열매 맺고 있는 산 나무를 보고, 입은 햇 채반상으로 봄을 느끼고 있다. 동화사 노승은 산봉우리 떠가는 흰 구름을 보며 탈속을 하는데, 매월당은 푸른 산과 그 위에 펼쳐진 산을 보면서도 세상 모든 것이 봄 꿈이라 한다. 세상을 버리듯이 떠도는 그에게 봄 산인들 큰 위로가 되겠는가? 오대산으로 스승 찾아 가겠다고 한다.
동화사는 어떤 절이었을까? 아쉽게도 창건과 폐사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채록된 이야기가 있다.
“한 승려가 동화골을 지나다가 오동나무 한 그루를 주면서 이 나무를 잘 기르면 자손과 마을이 번창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부처골로 들어가 절을 지었다. 그렇게 지어진 절에는 큰스님과 동자 한 명이 살고 있었는데 동자는 총명하여 큰스님의 가르침을 잘 소화했다. 어느덧 동자는 작은 스님이 되고 큰 스님은 기운이 쇠약하여지자 장차 이 절을 맡기려 했다. 제자에게 자신은 불공을 드릴 테니 마을에 가서 시주를 하여 가지고 오라 했다. 그리고는 주의시키기를 돌아올 때 절까지 오는 동안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 하였다. 돌아오는 길, 제자가 동화산 중턱에 다다랐을 때 굉음이 울리고 광풍이 불더니 천년 묵은 빈대가 소리를 지르며, 빨리 절에 가서 부처를 가지고 오면 내 큰스님의 목숨을 살려주겠노라, 하였다. 큰스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부처를 가져 오지 말라 소리를 질렀다. 제자는 절을 향해 뛰고 있었는데 그때 큰스님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제자는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빈대가 죽으면서 큰스님의 목소리를 흉내낸 것이었다. 바로 그때 빈대는 마지막 힘을 다 해 꼬리로 방심한 큰스님을 후려쳤다. 큰스님은 쓰러졌고 제자는 절을 향해 도망치다가 백년 바위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원래 절을 세운 곳은 빈대의 소굴이었는데 큰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절을 지었고 천 년 묵은 빈대는 큰스님의 기운이 쇠약해질 때를 기다려 싸움을 건 것이었다. 이 싸움의 모습을 제자가 볼까 봐 시주를 보낸 것이었다. 그 후 절은 폐허가 되었고 오동나무만 남았는데 그 후부터 이 산을 동화산이라 하고 마을은 동화골이라고 불렀다 한다.” (원주시 자료를 부분 수정)
빈대와 관련된 폐사의 스토리에는 빈대가 지겨워 절을 불 질렀다는 것이 많은데, 동화사 이야기는 또 다른 버전의 빈대 이야기다. 그나저나 옛날 절집의 빈대는 큰 골칫거리였던 모양이다.
동화사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 원주목 기록에는 도야니고개(都也尼峴)에 있다 했고, 도야니고개는 주(州) 남쪽 30리에 있다 했다. 또 동화사가 자리한 명봉산(鳴鳳山)은 도야니고개(돼니고개)와 마찬가지로 주(州) 남쪽 30리에 있다고 했다. 또 여지도서에도 명봉산(鳴鳳山)은 궁문 서남쪽 30리에 있다고 했다(宮門西南 三十里).
매월당이 기록한 동화산은 동화사가 있어서 명봉산을 그렇게 부른 것이다.
매월당이 머문 동화사, 그 빈터라도 찾아보러 문막읍 동화리로 길을 나선다. 동화골 골짜기를 찾고 찾아도 빈터의 흔적이 묘연하다. 겨우 찾은 개울가 기슭에 남은 기와 한 조각, 주춧돌, 무너진 축대. 매월당의 발자취만큼이나 남은 것이 없구나. 명봉산은 매월당의 산살구 꽃은 없어도 산벚 꽃과 진달래는 온 산을 덮고 있었다. 한편 매월당이 다녀간 뒤 또 한 사람이 이곳에 들려 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숙주의 손자 신광한(申光漢. 1484~1555년). 그의 문집 ‘기재집(企齋集)’에 남아 있는 기록을 보자.
“마침 봉명산 동화사에 도착했는데 조의(祖義)라는 승려가 자신은 진주인(眞珠人)이라면서 시를 써 달라 한다. 내가 일찍이 이 고을 수령으로 있었기에 무정하게 대할 수 없어 절구(絶句) 한 수 남겼다(偶到鳴鳳山桐花寺. 有僧名祖義者. 求詩. 自云眞珠人. 我曾宰是府. 不能於此人無情. 書一絶以遺).
이제 명봉산중 숙소에 왔구나
(내) 일찍이 이 고을 수령이었지
웃으며 반기는 승려가 마침 나를 알아보는 듯
“예전에도 행화촌에 머무셨지요”.
今來鳴鳳山中宿. 曾是眞珠舊使君. 迎咲有僧如識我. 昔年云住杏花村“.
이 승려는 신광한에게 술을 내었을까? 문득 작은 두보라 불린 두목의 싯구가 떠오른다.
짐짓 묻노니 주가(酒家)는 어디메뇨? 목동 아이 손 들어 행화촌을 가리키네
借問酒家何處有 牧童遙指杏花村
흔적조차 찾기 힘든 동화골 옆 골짜기에는 근년에 동화사라는 이름으로 절이 들어섰다. 다행히 매월당의 정서를 훼손하지 않을 만큼의 격(格)을 갖추었다. 아쉬운 점은, 이 절 어느 기둥에 매월당이 남긴 ‘동화사에 머물며’ 시 한 수라도 적어 놓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또 하나 동화골에는 동화마을 수목원이 들어섰다. 동화마을(童話마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어린이 동반 숲 공원이다. 비록 동화사는 사라졌지만 이곳 마을 이름은 동화리로 남았고, 동화마을 수목원도 생겼고, 동화사도 새롭게 태어났으니 매월당이 다시 들러도 그다지 서운하지는 않을 것 같다.
다음 날 아침 매월당은 돼니고개 넘어 원주관아로 향한다. 지팡이 짚고 봄바람 맞으면서. 나무 사이에는 봄 안개가 뽀얗다. 강원 감영이 있는 곳이지만 인적은 많지 않다. 짚신은 다 닳고 저 멀리 하늘은 휑하니 열려 있다. 어디를 간들, 봄꽃 피고 산새 지저귄들, 나그네에게는 늘 비어 있다.
원주 가는 길
봄바람에 석장(錫杖) 짚고 관동으로 향했네
원주길 들어서니 나무에는 연무 꼈네
공관에는 인적 드물고 거마(車馬)도 많지 않은데
긴 정자에 비 지나니 해당화 붉게 폈네
오랜 나그네 길에 짚신 두짝 다 닳고
만리 하늘 땅은 풀무처럼 텅 비었네
시상(詩想)과 나그네 정 나를 흔드는데
하물며 꽃떨기 속 산새 소리 들려옴에야
*乾坤一橐(탁: 전대): 노자는 도덕경에서 ‘天地之間 其猶槖籥乎(천지간은 마치 풀무와 같구나)’라 하였다(槖籥/탁약 = 풀무). 매월당은 이 표현을 살려 하늘과 땅 사이가 텅 비었음을 표현하였다.
原州途中
春風一錫向關東. 路入原州煙樹中. 公館人稀車馬少. 長亭雨過海棠紅. 十年道路雙鞋盡. 萬里乾坤一橐空. 詩思客情俱攪我. 況聞山鳥語花叢.
원주는 1395년부터 1895년까지 500년 동안 강원 감영이 자리 잡았던 강원도 행정의 중심지였다. 매월당이 들렀을 때도 강원도의 중심지였다. 관동 지방으로 가는 사람들이 들러 가는 관동대로의 중간 거점 도시였기에 사람과 물산이 모이는 곳이었다. 조선이 망하고 차례차례 없어졌던 관아 건물이 하나씩 복원되고 있다. 매월당의 흔적은 찾을 수 없지만 복원된 관아 연못가 봉래각에 앉아 매월당을 생각한다.
이날은 아울러 봄날 관동대로에서 원주의 여류(女流)들을 생각하고 그 자취를 밟아 본 날이기도 하다. 박경리 선생, 조선 여류 선비 지윤당 임씨, 14세 나이에 남장을 하고 금강산 여행을 떠난 시인 김금원(金錦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