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쇄
  • 전송
  • 보관
  • 기사목록

[매월당 싯길 (19) 치악산] 경주만큼 절 많던 원주, 지금은 기억마저 흐릿

  •  

cnbnews 제799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5.07.14 08:57:25

(이한성 옛길 답사가)

원주 감영을 떠나 매월당은 관동을 향하여 길을 나선다. 먼저 그의 눈길을 빼앗은 것은 용(龍)의 자태처럼 뻗어나간 치악산(雉岳山) 연봉들이었을 것이다. 치악산은 원주의 진산(鎭山)으로 원주와 관동을 가르는 크나큰 산줄기이다. 관아를 나서서 동으로 향하면 먼저 발길에 닿는 곳이 봉산천(鳳山川: 원주천)이다. 개울을 건너면 자그마한 산이 길손을 맞는다. 원주 동쪽 앞동산 같은 봉산(鳳山)이다. 산 아래에는 옛부터 원주 백성들이 모여 사는 봉산동(鳳山洞)이 자리 잡았다. 원주의 여류 선비 지윤당 임 씨도 이곳 출신이고, 최규하 전 대통령도 이곳 출신이다. 90년이 다 돼 가는 원주초등학교도 이곳 봉산 자락에 기대어 있다.

매월당이 관동으로 향한 길은 어느 길인지 잘 알 수는 없다. 그런데 원주 감영을 나와 매월당이 향한 길은 지금의 횡성군 강림면을 거쳐 옛 관동대로로 길을 잡았으니 아마도 봉산을 거쳐 갔으리라. 이 자그마한 봉산은 원주 읍내의 불국토(佛國土)였다.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고적도보’에는 봉산에 있던 탑과 불상들이 사진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말과 고려에 걸쳐 백성들이 정성으로 조성하고 근세에까지 의지하던 불보(佛寶)들이다.
 

원주의 동쪽을 둘러싼 치악산 연봉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일제가 앗아간 원주의 보물들

이때 총독부의 의뢰를 받아 조사에 나선 이들이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동경제대 교수)와 조수 야츠이 세이이치(谷井濟一) 등이었는데 사진은 주로 야츠이가 찍었다. 기록을 남긴 고마움도 있지만, 일제가 산업 발전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경복궁 전각들을 부수고 이른바 공진회(共進會)라는 박람회를 개최하면서 여러 곳의 탑, 부도, 석등, 불상 등을 공진회장으로 옮겨 장식품으로 사용하였다. 이때 봉산동 불보와 함께 원주 여러 곳의 불보들도 반출되어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실향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 후 야츠이는 이 조사 경험을 살려 조선 역사를 폄훼하고 발굴품을 밀반출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아직도 이곳에 남아 있는 봉산의 보배들을 만나러 간다. 작은 개인 절 미륵암(현재 주지 스님은 비마라사라 한다)에 서 있는 석불, 이제는 끊긴 철길 넘어 신선암의 일주문처럼 절을 지키는 석불, 지윤당 임 씨가 살던 골목 앞을 지키는 당간지주, 그리고 근처 절터에서 수집해 온 불보들이 가득한 시립박물관이다. 모두 봉산동에 있다.

 

치악산 상원사.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제 매월당이 발길을 옮긴 치악(雉岳)으로 향한다. 우리 시대에는 국립공원으로 힐링의 공간, 산행의 공간으로 익숙해진 치악산은 과연 어떤 산이었을까? 필자가 처음 치악산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아마 여덟, 아홉 살 때였던 것 같다. 아버지가 구독하시던 OO일보에 어느 날 선전물이 끼어 들어왔다. 그 신문사가 주말에 발행하는 ‘소년OO일보’라는 어린이 신문이었는데 그 신문 한쪽 면에 민담, 전설 이런 것을 소개하는 코너가 있었다. ‘은혜 갚은 꿩’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치악산 상원사 전설에 관한 것이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어느 날 한 선비가 산길을 가는데 꿩이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것이었다. 왜 그런가 가 보니 마침 구렁이가 꿩 새끼들을 잡아먹기 직전이었다. 선비는 활을 당겨 구렁이를 죽이고 꿩을 구해 주었다. 길을 가다 보니 날이 저물었다. 산속 외딴 등불이 보여 하룻밤 잠자리를 청하고 고단한 몸에 잠이 들었다. 잠결에 온몸이 갑갑하여 눈을 뜨니 구렁이가 칭칭 감고 있었다. ‘네가 오늘 활을 쏘아 죽인 이가 내 남편이다. 너를 당장 죽이고 싶지만 동이 뜰 때까지 저 상원사의 종이 세 번 울린다면 부처님의 뜻으로 알고 살려주겠다”. ‘아니 절이 비었다던데 이제는 죽었구나….’ 바로 그때였다. 저 멀리 상원사에서 댕~ 댕~ 댕~ 종소리가 울려 왔다. 그렇게 해서 살아난 선비는 궁금해서 상원사로 올라갔다. 종 앞에는 머리가 깨져 피투성이가 된 꿩 세 마리가 떨어져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때까지 단풍이 들면 온 산이 붉게 탄다 해서 적악산(赤岳山)이라 부르던 산 이름을 치악(雉岳)으로 바꾸었다는 이야기다.

동국여지승람과 원주읍지에는 치악산이 어떻게 소개되어 있을까?

치악산(雉岳山)은 주의 동쪽 25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오대산에서 분기하여 횡성을 지나 우뚝 일어섰다. 고려 때에 진보궐(陳補闕)이라는 사람이 치악산의 서쪽을 지나가는데 소나무와 전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고 수석(水石)이 그윽하고 기이하였다. 마음으로 기뻐하여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니 초가 두세 간이 수풀 사이로 어렴풋이 있는데 한 늙은 승려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시냇가 돌에 앉아 있었다. 진보궐이 말에서 내려 함께 이야기하였는데, 승려는 기상과 운치가 범상(凡常)하지 않았다. 보니 종이부채 하나 가졌는데 반송(蟠松)이 그려져 있었다. 진(陳)이 부채 뒤에 글을 쓰기를,
“스님은 늘 푸른 수염 노인(치악산 소나무)을 벗하는데,
어찌 다시 옮겨 부채 속에 넣으셨소?”
노승이 즉시 화답하기를,
“봄바람이 눈썹(蛾尾岺)에는 오지 않았지만
질박한 땅 교룡(반송)은 똬리를 틀었지요.”


신선의 대화처럼 치악산을 소개하고 있다. 원주읍지에 비로봉 설명도 비슷하다. “비로봉은 동쪽으로 50리에 있다. 봉우리 위에는 철마가 있는데 사람들이 전하기를 신선이 와서 노는 곳(仙人來遊處)이라 한다”.

매월당도 치악산 시 한 편을 남겼다. 그는 치악산을 어떻게 맞이했을까?

치악산
치악은 가파르게 푸른 하늘에 솟아
아침이내 저녁놀 명멸(明滅)하며 있는 듯 없는 듯
큰 소(沼) 봄물에 이끼 끼어 미끄럽고
천 길 푸른 벼랑에는 철쭉이 붉구나

구비길 층층봉에 잔설은 아직인데
바위 감돌아 돌 잔도(棧道: 벼랑에 붙은 길)에는 저녁 구름 짙구나
푸른 산 곳곳 가는 곳 다 좋은데
다리 힘은 그렇고 산은 끝이 없네

雉岳山
雉岳崢嶸聳碧空。煙霞明滅有無中。一泓春水莓苔滑。千丈蒼崖躑躅紅。路轉層峯殘雪在。巖廻石棧晚雲濃。靑山處處行應好。脚力有窮山不窮。

매월당이 치악에 닿은 것은 아마도 5월 말이나 6월 초순이었을 것이다. 요즘도 치악 철쭉은 이때 핀다. 이때는 매월당의 시에서처럼 골짜기 깊은 음지에 아직 잔설이 남아 있다. 그는 가파르게 솟아올라 하늘에 닿은 치악산을 바라본다. 1288m나 되는 높은 산이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찼을 것이다. 눈 녹아내린 계곡물은 흘러 소(沼)를 이루고 바위에는 이끼가 자라기 시작했다. 짚신으로 밟으면 많이 미끄러웠을 것이다. 산길은 왜 이렇게 가파른가? 천 길 벼랑에는 바위를 감돌아 가는 잔도(棧道)가 있었는데 그나마 넝쿨을 잡고 오르고 돌 수 있었다. 치악산은 그런 곳이었다. 우리 시대 산꾼들도 치악산을 까치산(雉岳山)으로 보지 않고 치악산(齒齷山; 이 갈리는 산 또는 齒喔山: 이 갈리고 악 소리 나는 산)이라 농담할 정도이니 점잖게 표현한 매월당의 시 속에서도 악 소리가 나는 듯하다.

드디어 그는 항복하고 만다. 다리 힘은 다 되었는데 산은 끝날 줄 모른다(脚力有窮山不窮)고 했다. 그렇다면 그는 치악산 정상(毘盧峰)에 올랐던 것일까?

다리 힘은 다하고 산은 끝이 없다 했으니 아마도 비로봉에는 오르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그는 하늘 높이 솟은 비로봉, 계곡 속 깊은 소(沼), 깎아지른 벼랑, 그 벼랑으로 이어지는 잔도(棧道) 길, 이런 치악산 오르는 길을 모두 맛보았던 것이다.

필자도 이 글을 쓰기 전 실로 6년 만에 치악산을 향하여 다시 배낭을 메었다. 500여 년 전 매월당도 맛보았던 치악산 오르는 길을 다시 경험하지 않고 글을 쓴다는 것은 어딘가 마음에 짐으로 다가왔다.

치악산을 오르는 방법은 일반적으로 둘로 나뉜다. 하나는 종주 길로서 보통 치악 남녘에서 출발하여 봉우리는 남대봉, 향로봉을 거치고 옛 절은 영원사, 상원사를 거쳐 비로봉으로 오른다. 하산길은 구룡사 또는 입석사를 통하는데 보통은 구룡사로 하산한다. 이 길을 역코스로 종주하는 방법도 있는데 대중교통은 구룡사가 편하므로 일반적으로 구룡사 하산 코스를 택한다.

또 다른 방법은 최고봉 비로봉(毘盧峰)만 오르는 산행길이다. 입석사 길은 거리는 최단 코스이지만 돌이 많고 가팔라서 잘 택하지 않는다. 이날 필자도 구룡사로 올라 구룡사로 내려왔다. 6년 전에도, 그 이전에도 치악산에 오면 남대봉 상원사 거쳐 비로봉에 올랐건만 이제는 매월당처럼 다리 힘도 그렇고(脚力有窮) 해서 비로봉 정상(頂上) 찍기 산행으로 그쳤다.

 

치악산 일대의 황금송을 못 자르도록 경고하는 황장금표.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구룡사 입구에는 황장금표(黃腸禁標)가 치악산의 성격을 말하고 있다. 황장금표란 이른바 황장목(黃腸木)을 베지 말라는 나라의 명령이다. 황장목이란 죽죽 뻗어 올라간 소나무인데 노란 송진이 가득하다. 다른 이름은 금강송(金剛松). 나무의 색깔은 붉은색이라서 적송(赤松) 중 빼어난 개체다. 우리나라 동쪽 백두대간, 낙동정맥과 여기에서 뻗어나간 산줄기에 엣부터 자생해 왔다. 대궐의 재목으로, 큰 사찰이나 중요 건물의 재목으로 쓰였고 임금이 돌아가시면 그 재궁(梓宮: 관)의 소재가 되었다. 남대문이 불에 탔을 때 그에 쓸 만한 황장목을 찾지 못하여 삼척 준경묘에서 우리 시대 어명으로 황장목을 베어 왔던 기억도 새롭다. 치악산은 동쪽 백양산(白楊山)과 함께 나라에 주요 황장목 공급처였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황장목이 베어진 아픔을 치악은 간직하고 있다.
 

궁예를 품어준 양길의 거점이었던 영원산성으로 오르는 길.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궁예의 본거지였던 불국토

이제 구룡사(龜龍寺)를 지나 계곡과 소(沼)를 끼고 오르면 조그만 폭포 세렴폭포(細簾瀑布?)에 닿는다. 여기서부터 치악산 등산로가 시작된다. 수직에 가깝게 가파른 길에 사다리처럼 데크가 놓여 있다. 다행히 길을 정비해서 매월당 시대와는 달리 잔도(棧道)라 할 만한 곳은 직선화해 놓았다. 그래도 숨은 턱에 차고 다리 힘은 빠진다. 이 오르막길을 우리 시대에는 ‘사다리 병창’이라 부르고 있다. 병창이란 이 지역 사투리로 벼랑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 ‘사다리 병창’은 사다리를 놓아야 할 만큼 가파른 벼랑길이란 뜻이다.

 

비로봉 정상에서 용창중 씨가 쌓은 돌탑과 함께.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렇게 숨이 턱에 차게 두세 시간 오르면 드디어 비로봉. 높이 1288m를 알리는 정상석이 숨찬 산객(山客)을 맞는다. 그곳에는 치악 정상을 상징하는 돌탑이 푸른 하늘에 머리를 적시고 있다. 미륵탑이라 부르는 3기(基)의 돌탑인데 각각은 용왕탑, 신선탑, 칠성탑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원주 시민 용창중 씨가 꿈을 꾸고 여러 해에 걸쳐 쌓았다 한다. 대단한 공력이다.

 

가파르게 치솟아 올라가는 사다리 병창길.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치악산에 오르니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600여 년 전 치악산 어느 산사에서 부처님 공부에 몸을 바쳤던 승려이다. 이름은 석경전(釋敬田). 이름이 보여 주듯이 부처의 세계에서 마음 밭을 닦았을 것이다. 공부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그는 송도(松都)로 가서 천태종 승과(天台宗 僧科)에 응시한다. 결과는 보기 좋게 합격. 그는 치악산으로 돌아오면서 목은 이색(牧隱 李穡)에게 시 한 수 받아온다.

치악산에서 나와
천태산 아래 와서 놀았네
바람 따라 또 돌아가나니
아득한 흰 구름 가을이로세
雉岳山中出 天台山下游 隨風又歸去 渺渺白雲秋

오랜만에 비로봉에 오르니 필자도 누구에겐가 시 한 수 받고 싶어진다.

그런데 이 광명천지에 누가 저런 케케묵은 시를 지어주리. 에라, 목은 선생 시에 운(韻)을 맞춰(화운: 和韻) 자작시라도 한 수 읊조려야겠다.

다단한 세상살이 잠시 떠나서
치악 준봉에서 노닐었다네
구름 벗 삼아 돌아오는 비탈길
세렴폭포 뽀얗게 흘러내렸지

多端市井離 雉岳峻中游 雲侶歸家徑 霏霏細瀑流
*霏霏(비비): 눈비 흩날리는 모양. 안개 같은 것이 흩어지는 모양

 

입석사 입석대. 치악 8경 중 하나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그나저나 흰 구름 속 가을날 석경전은 어느 절로 돌아왔을까?

치악산은 불국토였다. 지금도 구룡사, 입석사, 관음사, 성문사, 국형사, 보문사, 상원사, 영원사 등이 치악산에 전등(傳燈)의 빛을 밝히고 있다. 불교가 쇠퇴해 가던 1800년대 원주읍지(原州邑誌)에도 치악산의 사찰을 비롯한 원주의 사찰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원주는 동으로는 치악산, 서로는 섬강, 남으로는 남한강을 면해 교통이 편리하고 물산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후기 신라가 설치한 오소경(五小京) 중 북원경(北原京)으로 충주 이북의 대표적 거점 도시였다. 이러한 지역 특성을 배경으로 치악산과 원주는 경주 다음가는 불국토로 성장하였다. 아쉬운 점은 경주와 달리 이에 대한 기록이 없어 사람들의 뇌리에 남은 기억이 없다는 점이다. 매월당도 동화사와 각림사만 시에 남겼을 뿐이다. 아쉬운 대로 원주읍지에 남아 있는 이름이라도 한 번 살피고 가자. 그때까지 현존해 있던 절이다.

각림사, 법천사, 동화사, 흥법사, 거돈사, 문수사, 천왕사, 산성사, 상원사, 영원사, 구룡사, 홍산사, 흥녕사, 성왕사, 성남사, 고산사, 법흥사, 석경사, 용흥사, 반암사, 밀산사, 은적암, 은수암….

곰곰 살펴보면 대부분 치악산에 있던 절들이고 일부는 남한강, 섬강, 원주 시내에 있던 절들이다. 현존하는 절도 있고 가슴 시린 절터로 남은 절들도 있다. 그리고 잊힌 절들도.

치악산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치악산을 살피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비운의 궁예(弓裔). 삼국사기 궁예열전(弓裔列傳)을 보자.

궁예는 신라인이니 성은 김 씨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 의정이요,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중략) 그는 이윽고 세달사로 갔다. 지금의 흥교사가 바로 그 절이다. 그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이라고 불렀다(便去世達寺 今之興敎寺是也).

진성왕 재위 5년, 대순 2년 신해에 그는 죽주에 있는 반란군의 괴수 기훤의 휘하로 들어갔다. (중략) 경복 원년 임자에 그는 북원의 반란군 양길의 휘하로 들어갔다. 양길은 그를 우대하고 일을 맡겼으며, 마침내 군사를 나눠주어 동쪽으로 신라의 영토를 공략하게 하였다. 이에 선종은 치악산 석남사에 묵으면서 주천, 나성, 울오, 어진 등의 고을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雉岳山 石南寺)


궁예는 처음 집을 나와 영월 세달사(世達寺: 영월군 남면 흥월리)에서 머리를 깎았고 절을 나온 후 죽주의 기훤(箕萱) 휘하에 있다가 다시 북원(원주)의 양길(梁吉) 휘하로 들어가면서 태봉국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가 초기에 자리 잡은 곳이 석남사(石南寺)인데 치악산 남쪽 줄기(신림면 성남리 절골)로 지금도 석남사 터가 남아 있다. 살펴보면 태봉국은 치악산 석남사에서 시작되었고 고려는 태봉국을 이었으니 결국 고려의 뿌리도 치악산인 셈이다.

이제 다시 치악산과 섬강, 남한강이 수도권의 문화유적 보고로 우리의 곁으로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치악산을 내려오던 날, 하늘은 흰 구름을 피워 올렸다.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많이 읽은 기사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