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도 롯데뮤지엄에서 미로 같은 느낌의 전시를 접한 적이 있지만, 이번엔 유독 더 미스터리한 공간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전시의 시작부터 끝까지 쭉 걸어가는 게 아니라, 막다른 공간에 다다라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와서 다른 공간으로 또 넘어가는 것이 꼭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게임 속 캐릭터가 돼 현실과 가상을 오가는 듯 묘했다. 그런데 그 묘함이 흥미로웠다.
초록빛 복도 따라 전시로 ‘로그인’
롯데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롯데뮤지엄이 옥승철 작가의 개인전을 마련했다. 전시를 기획한 롯데뮤지엄 전시사업팀 이민지 팀장은 “글로벌 아트축제 프리즈 시즌엔 해외에서도 많은 관람객이 작품을 보기 위해 한국을 찾는다. 이 시기에 맞춰 전시장을 찾는 관람객에게 국내의 유망 작가를 소개하고자 옥승철 작가의 전시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작가는 원본성과 실재성, 디지털 이미지와 물성을 가진 작품 사이에 형성되는 관념들을 탐구해왔다. 특히 애니메이션을 연상시키는 캐릭터의 얼굴을 화면 위에 크게 구성한 작업으로 유명하다. 작가는 만화, 영화, 게임 등에서 끊임없이 복제, 변주되며 가볍게 소비되는 디지털 이미지를 작품의 원본으로 삼는다
이후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벡터 그래픽으로 제작한 이미지를 캔버스, 물감 등 전통 매체를 활용해 회화, 조형 등의 방식으로 출력한다. 즉 작가의 화면 위에선 디지털 이미지의 ‘가벼움’과 예술 작품의 ‘무거움’이 충돌하며 긴장감과 모순이 발생한다. 작가는 여기서 과연 ‘원본’은 무엇인지, ‘예술’은 무엇인기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이번 개인전 ‘프로토타입’에선 작가의 초기작부터 신작을 아우르는 회화, 조각 등 80여 점을 통해 작가의 작업 세계를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특히 ‘완성’이 아닌 ‘과정’에 접근한다. 전시명인 프로토타입에서도 이 점이 엿보인다. 프로토타입은 무언가를 만들기 전에 시험적으로 제작해보는 시제품을 뜻하는데, 작가 또한 자신의 작품을 완성본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전시에서 프로토타입은 원본이 되는 디지털 데이터를 기반으로, 전시장 안에서 일시적으로 출력, 가시화된 형식으로 존재한다는 설명이다.
작가는 롯데문화재단과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작품들은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변형되는 샘플링의 과정 속에 존재한다”며 “관객은 각자 자신이 가진 원본을 향해 접근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작가는 이런 이미지가 소비되고 유통되는 방식에도 주목한다. 이를 통해 관객 모두가 복제된 이미지를 만들고 유통하며 소비하는 동일한 흐름 위에 있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가장 중점에 둔 것은 이미지의 소비와 유통 방식의 변화”라며 “오늘날 음원과 영상은 원본 소유에서 플랫폼을 통한 구독으로 바뀌었든, 이번 전시도 실체 없는 유통 구조의 플랫폼처럼 설정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전시 공간은 소프트웨어 유통 방식인 ‘ESD(Electronic Software Distribution)’를 모델로 설계해 전체 400여 평에 이르는 전시장 공간을 하나의 거대한 가상공간으로 연출했다.
전시장은 가운데 십자 복도를 중심으로 ‘프로토타입-1’, ‘프로토타입-2’, ‘프로토타입-3’으로 명명된 세 개의 섹션으로 구성된다. 각 섹션을 보는 순서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으며, 관람객이 전시장 공간을 탐험하듯 주체적으로 다른 경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과정을 통해 이미지의 호출, 변형, 유통이 끊임없이 이뤄지는 디지털 환경을 감각적으로 체험하도록 이끈다.
‘완성본’이 아닌 ‘과정’에 있는 작품들
전시의 시작점인 십자 복도엔 녹색 조명이 불을 밝힌다. 이는 방송이나 영화에서 배경 합성에 사용되는 크로마키 기술을 상징화한 것으로, 전시장을 가상과 현실의 경계의 공간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이 복도를 지나 각 섹션에 진입할 때마다 관객은 자신이 마치 데이터의 일부처럼 ‘로딩’되는 듯한 감각을 받을 수 있다.
작가는 “이번 전시 포인트 중 하나는 출구와 경계가 모호해진 초록색 십자 통로다. 이 공간은 관객의 동선을 일방적인 흐름이 아닌 선택적으로 만들고,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야 하는 구조를 통해 마치 ‘로그인’ 절차처럼 다음 전시장으로 넘어가는 경험을 제공한다”며 “크로마키 공간에 들어온 듯한 비현실적인 초록색은 이전 전시장의 정보를 지우고, 새로운 전시장의 정보를 받아들이게 한다”고 말했다.
이 초록빛 십자 통로를 지나 환한 분위기로 반전되는 공간에 프로토타입-1이 나타난다. 작가는 회화 작업이 유명한데, 여기서 높이 2.8m에 이르는 대형 조각 신작을 볼 수 있다는 점이 특별하다. 작가는 “이번 신작에선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드러내는 데 중점을 뒀다. 이를 위해 거대한 조각으로 비현실감을 극대화하고, 거울과 빛을 활용해 경계를 시각화했으며, 평면과 입체가 교차하는 구성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이 거대한 조각을 거울과 조명이 둘러싸고 있는데 마치 우주선에 들어온 듯한 판타지적인 느낌도 든다. 관련해 이민지 팀장은 “옥승철 작가는 만약 작가가 되지 않았으면 영화감독이 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영화에 관심이 많다. 특히 그는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며 “이 영화는 이후 세대에서 우주 개발의 프로토타입이 됐는데, 작가 또한 전시를 통해 프로토타입의 작품을 선보인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공간에선 증명사진을 모티프로 삼아 인물의 정체성과 형태를 탐색하는 ‘ID 픽쳐’ 시리즈와 거울을 활용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시각화한 ‘아웃라인’ 시리즈가 이어진다. 프로토타입-1의 마지막 방에서는 ‘캐논’ 시리즈 등 고전 석고상을 연상시키는 무채색의 드로잉, 평면 조각, 회화 작품이 등장한다. 입시미술에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줄리앙’은 실존 인물의 흉상에서 출발해 대리석, 석고상, 회화로 이미지의 변형이 이어졌는데, 이는 오늘날 디지털 환경에서의 이미지 소비 구조와 겹쳐지며 원본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프로토타입-2 섹션엔 헬멧과 고글을 착용한 인물들을 담은 ‘헬멧’, ‘플레이어’ 등 작가의 주요 회화 시리즈가 설치됐다. 화면 속 인물들은 마치 전투에 임하는 듯 비장하다. 이민지 팀장은 “회화의 평면성에 의해 충돌 직전 정지한 듯 마주본 화면 속 인물들은 비활성된 전장을 연상케 한다”며 “또한 관객의 위치와 시선에 따라 이미지의 의미가 충돌하거나 무력화됨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프로토타입-3 섹션은 반복을 통해 감각이 무뎌지고, 익숙함이 오히려 불편함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시각화한 작업들을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약물의 내성처럼 반복되는 이미지에 익숙해지는 감각을 은유한 회화 신작 ‘타이레놀’, 가공 방식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녹차처럼 사람마다 경험이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현상에 주목한 ‘테이스트 오브 그린티’, 하나의 상징이 서로 다르게 인식되는 상황을 다룬 ‘언더 더 세임 문’ 등이 있다.
작가는 “질감을 배제한 표면을 지닌 가상의 익명 인물들은 디지털 데이터가 반복, 조합, 시뮬레이션, 필터링 등의 과정을 거쳐 물성을 획득한 형태로, 현실과 가상의 경계 위에 존재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민지 팀장은 “작가는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끝내 남지 않을 수 있는가’를 묻는다. 유사한 구도의 초상들 속 오묘하게 달라진 표정, 머리카락, 시선을 통해 동일한 사건이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낳는 과정, 경험이 계속될수록 점차 흐려지는 반응을 보여준다”며 “이를 통해 우리가 기억한다고 믿는 감각이 실은 나열된 습관의 호출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지 되묻는다”고 말했다.
전시의 마지막은 ‘트로피’가 장식한다. 첫 번째 섹션의 대형 조각 프로토타입과 연결되며 전체 전시를 수미상관 구조로 마무리 짓는다. 특히 전시 마지막 공간은 전시장 밖에서도 작품이 보이는 쇼윈도 설치인 점도 눈길을 끈다.
작가는 “이번 전시의 또 하나의 포인트는 전시장 밖에서 보이는 쇼윈도 설치 회화”라며 “이 작품은 전시장의 안과 밖을 구분 짓는 동시에 내부를 훤히 드러내 경계를 흐린다”며 “전시의 시작과 끝을 잇는 이 작품이 이번 전시에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작가 자신에게도 특별한 지점으로 자리 잡았다. 작가는 “2018년은 롯데뮤지엄이 개관한 해이자, 제 첫 개인전이 열린 해다. 그리고 7년이 지난 2025년, 올해는 과거의 제가 간절히 꿈꿨던 목표를 이루는 해이자, 다시 한 번 더 멀리 있는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싶은 출발점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작가는 꾸준히 작업을 이어갈 전망이다. 프로토타입을 통해 ‘과정’에 있음을 밝힌 작가는 “영화 속 대사처럼 무계획도 하나의 계획이라고 생각한다”며 또 다른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전시는 롯데뮤지엄에서 10월 26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