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 알록달록한 꽃 모양의 모자를 쓰고 나타난 작가는 그야말로 자신의 작품 속에서 바로 걸어나온 듯 했다. 주인공은 무라카미 다카시 .
세계 최대 화랑인 가고시안 갤러리가 서울 용산의 아모레퍼시픽 본사 1층의 프로젝트 공간인 APMA 캐비닛에서 무라카미 다카시 작가의 개인전을 마련했다.
이번 전시는 2023년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작가의 대규모 회고전 ‘무라카미 다카시: 무라카미좀비’ 후 선보이는 국내 전시로, 삼성미술관 플라토 ‘무라카미 다카시의 수퍼플랫 원더랜드’(2013) 이후 서울에서 열리는 작가의 첫 개인전으로 눈길을 끈다.
이번 전시명은 ‘서울, 귀여운 여름방학’이다. 작가는 “일본 애니메이션 등에서는 ‘여름방학’이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보더라도 모든 일이 여름방학과 함께 시작되고, 방학이 끝나면 사건도 마무리된다”며 “앞선 미술관 등의 전시에서 거대한 스토리텔링을 끌고 나갔다면, 이번엔 여름방학처럼 특별한 이벤트와도 같은 시간을 관객과 공유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는 그가 수학한 일본 전통 회화 양식이자, 자연 형태를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둔 ‘니혼가’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했다.
작가의 작업은 ‘활짝 웃는 꽃’ 이미지로 대표된다. 1995년 작가의 작업에서 처음 등장한 해당 모티프는 전통 기법과 대중적 이미지, 특히 애니메이션과 만화에서 차용한 시각적 요소, 특정 분야에 심취하는 오타쿠 문화, 그리고 귀여움을 뜻하는 ‘카와이’ 감성을 평면 위에 복합적으로 융합한 ‘슈퍼플랫’ 미학과 맞닿아 있다. 모든 분야가 위계 없이 수평화한다는 개념이다.
작가는 “약 20년 전 슈퍼플랫을 처음 구축해갈 땐 서양과 동양의 표현 방식이 달랐다. 하지만 소셜미디어(SNS)가 발달하고, 이젠 인공지능(AI) 시대가 오면서 모든 사람들이 지식을 공유하는 사회가 됐다”며 “이를 통해 모두가 수평인 사회로, 플랫함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꽃 아이콘은 곰을 닮은 미스터 디오비(Mr. DOB)와 같은 다른 도상들과 더불어 판화, 영화, 디지털 아트, 상품, 회화, 조각 등 수많은 매체로 확장되는 작가의 방대한 작품세계 속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았다. 작가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역사적·동시대적 형식과 주제를 넘나들며 글로벌 미술 시장의 흐름과 변화를 관통하는 예술세계를 그려낸다.
가고시안 갤러리 측은 “아이코닉한 초상으로 단독 묘사되거나, 별자리처럼 정교하게 배열되기도 하는 꽃 모티프는 숙련된 장인정신과 대중적인 매력을 결합해 고급 예술과 대중매체의 서사를 아우르는 작가의 상징적 도상으로 자리매김했다”며 “생동감 넘치는 모습으로 회복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듯하지만, 그 이면엔 후기 자본주의 소비문화와 취향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통찰이 담겨 있다”고 밝혔다.
꽃 모티프 ‘슈퍼플랫 플라워’ 눈길
블랙핑크 등 케이팝 아티스트 협업도 화제
이번 전시에도 슈퍼플랫에서 출발한 작가의 대표 연작 ‘슈퍼플랫 플라워’가 여러 점 걸렸다. 특히 에도시대 화가 오가타 고린(1658~1716)의 ‘국화도’ 병풍을 무라카미의 방식으로 오마주한 작품 ‘타치아오이-주(Tachiaoi-zu)’(2025)가 눈길을 끈다. 무라카미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해골 문양이 양각된 금박 위에 일본 전통 회화에 나오는 붉은색, 분홍색, 흰색 접시꽃을 그려놓았다.
작가는 “수년 전 에도시대를 다룬 쇼군(장군) 드라마를 방영했는데 그 시대 시각으로 작업한 작품”이라며 “금박은 일본 미술사에서 자주 사용된 기법이다. 17세기 당시 채광이 잘 들지 않는 교토의 집들이 촛불 빛을 반사해 집을 밝히기 위해 많은 집에서 해당 그림을 걸었다”고 설명했다. 가고시안 갤러리 측은 “현대미술의 최전방에 서 있는 무라카미가 17세기 전통 화가 오가타 고린을 레퍼런스해 작품으로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작품”이라고 부연했다.
해골 문양이 양각된 금박의 화면 위를 슈퍼플랫 플라워로 한가득 채운 ‘썸머 베케이션 플라워스 언더 더 골든 스카이(Summer Vacation Flowers under the Golden Sky)’(2025)는 이번 전시의 대표작이다. 만화경에서 쏟아져 나온 듯 만개한 꽃들로 가득한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헬로 플라워리안(Hello Flowerian)’(2024)도 볼 수 있다. 동일한 제목의 두 조각 작품이 좌대 위에 서 있는 작품이다. 꽃 얼굴의 작은 인물 형상으로, 한 점은 선명한 무지개색 채색으로, 다른 한 점은 반짝이는 금박 마감으로 제작됐다. 표면적으로는 다른 전시작들과 다름없이 밝은 모습이지만,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하게 묘사된 캐릭터들의 외관은 전후 일본이 겪은 경제적·사회적·심리적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밖에 화면을 가득 채운 벚꽃 아래 이를 즐기고 있는 작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작품 등 전시는 ‘카와이’한 요소가 가득하다.
본래 작가는 글로벌적인 행보로 유명세가 높았지만, 블랙핑크, 지드래곤, 뉴진스 등 케이팝 아이돌과 협업하며 국내에도 두터운 팬층과 인지도를 쌓았다. 최근엔 힙합 가수들과의 협업도 준비 중이라고. 작가는 추가 협력 가능성에 “언제든 열려 있다”고 답하면서 “이들이 왜 나를 불러주고 협업하려 하는지 나 또한 궁금하다. 내가 그들에게 오히려 이유를 묻고 싶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이처럼 작가는 장르를 넘나드는 작업으로 앞으로도 그만의 특별함을 꽃피워갈 계획이다. 전시는 다음달 11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