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시작되며 부채질은 멈췄지만, 여전히 부채로 가득한 공간이 있다. 이곳에서는 한국 전통 부채가 현대미술과 만나 시각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새롭게 태어났다.
동화약품과 가송재단이 주최하는 ‘여름생색展’이 재작년에 이어 올해 다시 열렸다. 가송예술상은 접는 부채 ‘접선’을 주제로 신진 예술가를 발굴·지원하는 공모전이며, 여름생색展은 그 공모전 본선에 오른 10인의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다.
접선으로 비춘 인간의 삶과 사회의 풍경
입구에 들어서면 정면 끝에 배준형 작가의 ‘파천접선전’이 눈에 띈다. 이 작품은 관객이 직접 참여하는 게임 형식으로, 참가자는 부채 모양 컨트롤러를 손에 끼고 빔프로젝터로 비친 화면을 보며 게임을 진행한다.
영웅 ‘파천’이 접선을 휘둘러 기후 위기에 처한 행성들을 맘대로 구해내는 과정을 담았으며, 이를 통해 기후 문제에서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을 지배하는 ‘기후 식민주의’ 구조를 꼬집는다. 독특한 세계관을 담은 게임 형식의 작품은 참가자들에게 감각적으로 몰입 가능한 체험을 선사한다.
바로 왼쪽에는 박경 작가의 ‘인궤도’가 벽면 한쪽을 큼직하게 차지하고 있다. 접선의 의미를 사람들의 흔적에 대한 기록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수많은 선과 그 선들로 이뤄진 원들이 등장한다.
서로 다른 색으로 빼곡히 그어진 선들은 무수한 관계 속에 얽힌 250여 명의 삶을 드러내며, 원형은 부채춤에서 여러 부채가 모여 하나의 원을 이루는 모습을 표현한다. 삶의 순환 구조를 전자기 회전 운동에 빗대어, 인간의 반복된 운명을 파동과 접선의 이미지로 환원해 보여준다.
‘인궤도’가 인간 삶의 궤적을 선 형태로 담았다면, 권인경 작가의 ‘열린 방 2025’는 방이라는 개인적 공간에 스며든 거주자의 흔적에 집중한다. 책장으로 둘러싸인 공간 안에 의자가 놓인 설치 작품으로, 군데군데 비어있는 책장 틈새와 문이 없는 구조로 인해 방 안에서 밖을 바라볼 수 있고, 밖에서도 안을 들여다볼 수 있다.
‘방’이라는 공간을 통해 세상으로부터 숨고 싶은 동시에 열린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양가적 심리를 표현했다. 회화와 설치가 결합된 이 작품은 감상자의 위치에 따라 다른 시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전시 공간의 반대편으로 들어서면 기민정 작가의 ‘겹쳐지는 목소리’가 관람객을 맞는다. 우수상에 선정된 이 작품은 작가가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해 들으며 회화로 기록한 작업이다. 마치 소리꾼이 몸으로 소리를 익히듯, 작가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시각화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목소리, 몸의 붓질, 종이 세 매체의 접점을 면이 겹치고 접히는 부채의 이미지로 표현했다. 반복되는 붓질의 역동성은 거센 바람을 떠올리게 하고, 난해한 글자 형태는 곧 사라질 듯한 목소리를 연상시킨다.
바로 옆에는 박준석 작가의 연작 ‘고요한 무지’가 시선을 끈다. 두 점의 회화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작가는 캔버스에 암벽의 단면을 담았고, 인공지능이 이를 학습해 재구성한 이미지를 대형 캔버스에 출력한 뒤 붓으로 보완해 완성했다.
암벽의 단층을 붓으로 얇게 덧칠함으로써 불안과 상실 직전의 적막감, 인간 심리의 지층을 드러내고자 했으며 샤머니즘에 집중해 접선의 의미를 확장했다. 강렬하게 표현된 산의 모습은 인간의 살을 연상시키며 고요한 밤하늘과 대비돼 초현실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자연과 시간으로 확장된 접선의 서사
이어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박해선 작가의 ‘조용히 영원히’가 보인다. 작가는 접선의 핵심요소인 바람과 종이를 중의적으로 해석했다. 접선은 종이와 바람같이 연약하고 쉽게 사라질 수 있는 것들을 글과 그림으로 새겨 찰나의 아름다움을 즐겼던 선조들의 풍류 문화를 상징한다.
눈 덮인 풍경을 담은 회화 작업은 사라짐과 흔적이 공존하는 지점을 비추며, 유한한 시간을 붙잡고자 하는 인간의 바람을 드러낸다. 작품은 회화 이미지와 각목들로 구성되며, 관객은 이미지 사이를 거닐며 전통 회화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마주할 수 있다.
그 옆에는 노해율 작가의 ‘Movable’이 자리한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작품은 움직임을 예술에 담은 키네틱 아트로, 천장과 바닥에 설치된 30개의 오브제가 반투명 재료와 내부 전구로 구성돼 좌우로 움직인다.
관객이 직접 오브제를 움직일 수 있도록 한 형식을 통해 부채를 매개로 사물과 인간 사이를 오가는 에너지의 흐름을 시각화한다. 빛과 형태, 운동으로 구성된 반복적 연출은 요소 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드러내며, 긴 감상에 지친 관객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대상작인 김미래 작가의 ‘바람의 노래’가 벽 한쪽을 넓게 차지하고 있다. 작가는 부채의 의미를 어머니가 아이에게 자장가를 부르며 부채질해 주던 기억에서 끌어왔다. 어머니에게 받은 부채질이 다시 자신의 아이에게 전달되듯, 세대를 거쳐 순환하는 사랑의 구조를 표현한다.
소녀로 보이는 인물을 비롯해 꽃, 나무, 별똥별 이미지가 곳곳에 등장한다. 종이에 흑연으로 그린 드로잉은 신비롭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세부 이미지들은 환상과 은유를 담아 확장돼 전체를 이룬다.
박주영 작가의 ‘閒間 - 달과 해 사이’는 여러 장의 사진 엽서를 모아 놓은 듯한 작품이다. 이미지 사이의 틈을 중심으로 하나의 프레임을 거부하며 파편화된 이야기를 다채롭게 풀어낸다.
관객은 이 틈새를 통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해석할 수 있다. 작가는 접선의 개념을 바람(wind)과 일상 속 소망(wish)이라는 두 축으로 표현하며, 기존 사각 프레임 속 회화 이미지를 해체해 단편적인 일상 이미지들로 재구성한다.
뒤를 돌면 멸종위기 조류인 도요새 이미지가 종이 위에 수직으로 이어진 츄리 작가의 ‘날개짓’이 눈에 들어온다. 김동식 부채장인과 협업해 콜라보레이션 수상작으로 선정된 이 작품은 작가가 충남야생동물구조센터에서 관찰한 도요새의 삶과 죽음, 그 경계의 흔적을 담았다.
전통 책 형식인 아코디언북과 부채 구조를 결합해 관객이 시간의 흐름 속 도요새의 흔적을 따라가도록 구성했다. 전통 부채인 접선과 유럽 석판화 기법을 접목해 문화와 자연 속 사라져가는 것들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동화약품 관계자는 “이번 여름생색전의 이름은 단오에 부채를 선물하던 풍속에서 비롯된 ‘여름 생색은 부채’라는 문구에서 착안했다”며 “접선의 전통성과 현재가 만나는 지점을 찾는 것이 전시의 정체성”이라고 말했다. 이어 “시각작가들이 섬세히 풀어낸 접선의 의미를 관객들이 발견해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문화경제 한시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