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의 하얀 흔적들과 바닥의 기다란 나무 조각, 계속해서 들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까지, 일반적인 ‘전시’ 현장과는 달랐다. 언뜻 보면 로비를 공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또 일반적인 공사 현장도 아닌 것 같다. 그렇게 묘한 풍경에 더 관심이 사로잡혔다. 스페이스 이수가 마련한 ‘VHS’ 기획전 현장 이야기다.
일상적인 회사 로비 공간 속 ‘고주파’의 정체
‘VHS’는 ‘Very High Singnals’의 앞 글자를 딴 것으로, 작품들은 희미하게 들리는 고주파처럼 전시 공간 안에서 일종의 신호로 기능한다. 이 미세한 신호를 통해 일상에 아주 사소한 균열을 만들고, 이 균열로 인해 일상에 변화를 주는 것, 그것이 이 전시의 핵심이다.
특히 이 효과는 회사 로비라는 장소에서 이뤄지며 더 극대화됐다. 스페이스 이수는 이수그룹 회사 사옥 1층 로비에 위치한다. 미술 전시만을 위해 구분된 미술관이나 공간들과는 태생적으로 다른 목적과 형태를 갖고 있다. 직원들이 출근하려면 자연스럽게 거치는 공간이기도 하다.
전시를 기획한 전효경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의 출발점은 회사 로비 공간이었다. 회사 직원들에게 스페이스 이수는 매일 출퇴근 시 접하기에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일상적인 공간이다. 동시에 그들은 전시를 가장 자주 접하게 되는 관람객이기도 하다”며 “이렇듯 일상으로 인식했던 공간에 아주 사소한 변화를 일으켜 새롭게 의식하게 되는 과정에 주목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사소한 균열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전시에서 기대하는 형태와 ‘시각적 아름다움’에서 벗어나면서 시작된다. 벽엔 작품이 걸리지 않았고, 바닥과 창문, 숨겨진 공간 등에서 어떤 오브제들이 발견된다.
전 큐레이터는 “시각성을 앞세운 미술은 멋있고 볼만한 것이어야 한다는, 권위적인 측면 또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를 오히려 소거해 눈에만 의존하지 않고, 몸의 감각을 일깨워 감상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보고 싶었다”며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공간에 왔을 때 ‘평상시와 다른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고 느끼며 자연스럽게 관심을 기울이게 하기 위한 요소에 집중했다”고 말했다.
고대영·최선아·홍애린 작가, 예측·기대에 서서히 틈을 내다
공간에 신선한 변화를 일으키는 주역은 고대영(1992), 최선아(1998), 홍애린(1991) 작가다. 모두 90년대생으로, 국내 미술계에서 단체전의 형태로는 작품을 소개한 적이 거의 없는 작가들이다. 이들은 사회적 약속에 대한 예측과 기대에 서서히 틈을 내는 방식으로, 로비 공간 안에 슬며시 개입한다.
최선아 작가의 ‘진지바’는 스컬피를 건물 외벽에 붙인 작품이다. 멀리서 봤을 땐 하얀 페인트 덩어리 같지만, 작품 가까이 다가갈수록 다른 느낌을 받는다. 최 작가는 손가락으로 눌러 형태를 변형시킬 수 있는 소조 재료인 스컬피를 사용해 14m에 달하는 로비 공간 구조에 덧입혔다. 그래서 손가락 힘의 흔적들이 결과물에 자연스레 남아 있다. 꼭 창이라는 캔버스에 손가락이라는 붓을 통해 스컬피로 그림을 그린 것 같기도 하다. 전시장을 찾은 날은 매우 추웠던 날이라 꼭 창에 눈이 내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해가 뜨고 질 때 생기는 그림자로 인해 아침과 점심, 저녁마다 모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슬리드’는 물렁해 보이는 진지바의 소재와 달리 딱딱한 나무 소재로 이뤄졌다. 위치 또한 창문 높이 솟아난 듯한 진지바와 반대로 바닥에 드러눕혀져 있다. 작가가 칼로 조각을 낸 이 작품 또한 가까이 다가갈수록 날카로운 나무 질감이 돋보이며 색다르게 다가온다. 군데군데 하얀색으로 오일 파스텔 칠도 돼있는데, 하얀 색감으로 인해 창문의 진지바와 연결되는 듯한 느낌도 든다.
전 큐레이터는 “최선아 작가는 조각가로서 ‘물질 그 자체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고민하며 작업을 이어왔다”며 “이번 전시에선 시각보다 촉각적으로 다가간다. 또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어딘가에 붙어 존재하는 작품을 통해 고정된 조각의 개념에서 탈피하는 시도를 한다”고 말했다.
로비 한 가운데 세워진 가벽에서 들리는 소리는 홍애린 작가의 작품이다. 가벽 안에 스피커를 달아 놓았는데, 이 소리의 출처를 따라가면 벽 안 숨겨진 공간의 ‘뮤직 사이렌’을 발견할 수 있다. 작품명은 1950년 야마하에서 만든 제품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 야마하 회사의 사장이 경고용 사이렌의 강력한 소리 몇 조를 모아 멜로디를 연주해 마을 사람들이 감상할 수 있는 소리를 제공하고자 뮤직 사이렌을 고안했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사건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사이렌 소리는 종전 후에도 여전히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당시 뮤직 사이렌은 이 전쟁의 기억을 다른 것으로 전환하고자 한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홍 작가 또한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시도를 한다. 소리의 출처를 모르는 사람들은 로비 가운데 가벽에서 무분별하게 들리는 소리로 인해 처음엔 낯섦, 공포, 호기심 등을 느낀다. 그런데 그 소리의 출처는 3cm 남짓한 크기의 나비 모양 장난감이다. 나비 날개에 달린 모터가 움직일 때마다 나는 소리를 공간에 충분히 울릴 수 있는 크기의 피아노 소리로 증폭한 것. 이를 통해 관람객은 대단해 보였던 그 실체가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로비의 또 다른 한켠에 설치된 홍 작가의 ‘브랫’ 또한 익숙해 보이지만 뭔가 달라 보이는 화면을 통해 친숙함과 낯설음을 동시에 느끼는 감각을 제공한다. 과거 인기 게임 ‘프린세스 메이커 2’의 화면으로, 해당 게임은 1993년 일본 가이낙스가 출시한 육성 시뮬레이션 장르의 시초다. 플레이어는 소녀가 18세가 될 때까지 돌보는데, 게임에서 딸이 가출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이때 소녀가 사라진 텅 빈 방이 등장하는데, 홍 작가는 이를 리마스터링해 로비에 디지털 화면으로 소환해 놓았다. 빈 방은 게임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치 로비 인테리어 디자인의 한 요소로 생각할 법도 하다.
로비 안쪽 마치 숨겨진 듯한 공간에 들어가면 고대영 작가의 작업을 만날 수 있다. 먼저 접하는 ‘헤일로’는 언뜻 보면 기하학적인 설치물로 보이는데, 그 정체는 자동차 부품이다. 헤일로는 경주용 차 조종석 앞면에 붙은 위시본(wishbone) 형태는 티타늄 덩어리로, 사고가 났을 때 운전자의 머리를 큰 충격에서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고 작가는 이 헤일로를 전시장 안에 들여놓았다. 실제 기능은 소거된 채 형태만 존재하는 헤일로는 이를 접하는 사람들로 인해 또 다른 의미와 기능을 얻게 될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어 ‘파피옹’ 영상 작업이 이어진다. 고 작가가 과거 주변 사람들과 주고 받은 것을 담은 영상을 AI(인공지능) 툴을 통해 80~100배로 확대한 작업이다. 인공적으로 채워진 픽셀과 높아진 해상도는 이미지의 질감을 낯설게 만든다. 그리고 이는 앞서 로비에서 접한 최선아 작가의 작업처럼 멀리서 봤을 때와 가까이에서 봤을 때 다르게 다가오는 감각과도 연결되는 느낌이다. 이렇듯 고 작가의 개인적 기억의 조각들은 다른 세계에서 일종의 허구적 이미지로 재현된다.
시각 대신 일깨워지는 감각들
이번 전시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가장 중요하게 두진 않는다. 하지만 오히려 다른 감각들을 시시각각 일깨우며 특별하지 않았던 일상에 신선한 균열의 틈을 낸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일상의 고정관념에서도 벗어나고자 한다.
전 큐레이터는 “전시 공간에서 참여 작가들은 소리의 미묘한 진동을 만들고 공간 안에 슬며시 개입해 전시 시작 이전의 상태와는 다른 곳을 만든다”며 “2개월에 달하는 전시 기간 동안 사람들은 전시의 내용을 눈치 챌 수도, 눈치 채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와중에도 전시 공간은 미세하게 균열을 내며 평범했던 일상풍경과 조금씩 달라진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는 현재 너무도 수많은 ‘볼 것’에 휩싸여 살고 있다. 그래서 도리어 다른 감각을 잘 사용하지 않기도 한다”며 “이번 전시는 ‘응시할 곳 없음’의 상태로, 바라볼 대상을 지시하거나 안내하는 기존 미술 전시 습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무엇을 봐야하는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주체는 바로 관람자다. 바로 그 관람자가 돼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3월 20일까지 열린다.
한편 스페이스 이수는 예술과 일상의 새로 보기를 제안하는 공간으로, 2020년 이수그룹 본사 사옥의 로비를 재정비해 개관했다. 스페이스 이수는 이수그룹의 문화예술 후원을 통한 사회 환원의 일환으로 기획된 열린 공간으로서 도심 속 누구나 동시대 미술과 문화를 가깝게 접할 기회를 마련한다.
특히 올해는 재능 있는 젊은 작가들 발굴에도 힘을 쏟을 계획이다. 최수영 스페이스 이수 대표는 “새해를 연 이번 기획전을 통해 보다 젊은 작가를 유입하고자 한다. 35살 이하 작가들을 지원하는 전시를 비롯해 그룹 30주년 기념 전시 등도 준비 중”이라며 “동시대 미술을 비롯해 디자인, 가구, 패션 등 다양한 문화예술 콘텐츠를 소개하는 장으로 더 거듭나겠다”고 말했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