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선 서울옥션 고미술 스페셜리스트⁄ 2026.02.23 11:04:28
경기도박물관에서는 지난해 광복 80주년을 맞아 ‘광복 80-합合’ 특별전을 기획, 동농 김가진과 몽양 여운형에 이어 제3부 위창 오세창을 주제로 전시를 개최했다. 전시명 ‘오세창: 무궁화의 땅에서’는 격변의 시대에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자 언론가로서 독립운동의 중심에 섰을 뿐 아니라 서화가이자 수장가로서 근대기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오세창의 다양한 업적을 조명한다.
특히 간송 전형필의 스승으로 알려진 오세창이 직접 엮은 서첩 ‘근묵’과 화보 ‘근역화휘’ 등에 수록된 역대 명사들의 작품들을 모은 전시로 3월 8일까지 진행된다. 이처럼 민족지도자이자 감식가의 역할을 수행한 오세창의 행적을 서울옥션 190회 경매에 출품된 여러 작품을 통해 조명해보고자 한다.
법고창신(法古創新), 추사 김정희를 본받아 더 나아가다
혼란의 격동기에 여러 분야에서 주요한 역할을 해낸 오세창의 삶에는 청나라를 오가던 역관(현 통역사)이자 서화가, 수장가, 그리고 금석학자였던 아버지 역매 오경석의 영향이 컸다. 오세창은 1879년 역과에 합격했으며, 1885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인쇄소인 박문국으로 발령받아 최초의 언론기관인 ‘한성주보’의 기자가 됐다. 이후 군국기무처, 농상공부, 우정국 등을 거쳐 1894년 우정국(현 우체국)의 통신국장 등을 역임했다.
1895년 10월 을미사변 직후에는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귀국 후, 이듬해 일본 문부성의 외국어학교 교사로 초빙돼 조선어를 담당하는 등 관직과 교육자로서 활동했다. 대한제국기에는 천도교에 입교 후 본격적인 계몽 운동을 펼쳤으며, 1906년 국채보상운동 등을 벌였다. 이후 1918년에 근대 미술 단체의 효시인 서화협회의 창립 멤버로 참여했으며, 1919년 3·1 운동 후 약 3년간 옥살이를 치렀다.
이후 그의 삶은 말년까지 서화가이자 수장가, 금석학자로서 더욱 빛을 발한다. 오세창은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의 서예 부문에서 수상했으며, 1928년 아버지 오경석과 함께 수집해 온 고서화를 토대로 역대 서화가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을 펴냈다. 이어 1930년대 편찬한 서화가들의 인장을 모은 ‘근역인수’까지, 지금까지도 한국 미술사의 주요한 길잡이가 되는 책들을 집필했다. 이렇게 축적된 그의 감식안은 간송 소장품뿐 아니라 여러 작품에서 확인된다.
수운 유덕장, ‘묵죽도’
속도감 있게 담긴 대나무의 모습
첫 번째 작품(도판 1)은 길게 솟은 대와 날카롭게 뻗은 댓잎이 눈에 띄는 대나무 그림 한 점이다. 작품 내에 작가의 서명이나 도장은 남아 있지 않으나 화폭의 오른쪽 아래에 적힌 배관 ‘수운의 묵군. 부탁을 받아쓰다. 위창’을 통해 그린 이를 추정할 수 있다.
수운은 영조 때 서화가이자 탄은 이정, 자하 신위와 더불어 조선의 3대 묵죽화가로 손꼽히는 수운 유덕장을 의미하여, 묵군은 수묵으로 그린 대나무를 뜻한다. 작품 일부가 소실돼 정확한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으나 누군가의 부탁을 받은 오세창이 유덕장의 그림임을 그의 식견으로 감정한 후 글을 남긴 것이다.
실제 먹의 농담 변화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속도감 있게 그린 대나무의 모습이 현전하는 유덕장의 그림들과 유사하며, 액자 또한 오래된 형태로 대나무로 틀을 갖춘 점이 특징이다.
추사 김정희, ‘간찰’
동료와의 문화적 교류
두 번째 작품(도판 2)은 추사 김정희가 남긴 간찰로, 제주도 유배 시절 가깝게 지냈던 인물 홍보서에게 적어준 것이다. 해당 시구는 김정희의 글을 엮은 시문집인 ‘완당전집’에도 수록된 구절로, 봄 밭갈이를 보며 남긴 개인적인 감상을 담고 있다. 비가 내리고 싹이 트는 우수를 갓 넘긴 지금의 계절과도 상통하는 시구는 다음과 같다.
‘입춘 뒤 다섯 번째 무일을 앞두고 서쪽 들판에 다가온 봄, 비와 바람이 적당해 대풍년이 들겠네. 전국시대 여섯 나라의 황금 인장을 지닌 자들을 비웃나니, 성 동쪽의 두 이랑 밭과도 바꾸지 않으리. 붓을 들어 보서에게 써주다. 보서는 나와 가까운 제주도 홍종시의 족숙 이름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제주도에 계실 때 써 주신 것이다. 기묘년 여름에, 오세창 쓰다.’
이 시를 통해 김정희는 두 이랑의 밭을 전국시대 황금 인장과도 바꿀 수 없다며 한층 봄물이 오른 자연을 예찬했다. 글의 막바지에는 홍보서에게 써준다는 글귀와 함께 ‘김정희인’과 ‘완당’이라는 도장을 남겼다. 이어 작품과는 별개로 표구 부분에는 오세창의 배관이 전해 홍보서의 조카뻘 되는 홍종시라는 인물이 위창과 가까운 지인으로, 선대부터 보관해 오던 이 글씨를 들고 와 감식을 부탁했음을 알 수 있다.
기묘년에 해당하는 1939년, 당시 오세창도 추사의 글씨를 제주도 유배 시절 필적으로 봤다. 홍종시는 일제강점기 초대 제주 읍장을 역임하는 등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김윤식 등의 유배인들과 어울리며 개화사상에 눈을 뜬 인물이다. 또한 김윤식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 홍종시의 집안에 귀한 작품들이 다수 소장돼 있었으며, 홍종시 본인도 서화에 뛰어났다고 전한다.
이처럼 오세창과 김정희, 그리고 그 지인들과의 인연은 고증학과 금석학의 분야에서도 두드러진다. 오세창은 조선 후기 김정희에 이어 금석학자로 활동한 인물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역대 서화가들의 인장 모음집을 집대성한 전각의 분야 외에도 와당, 석벽 등 다양한 사료들을 직접 수집하고 탁본을 제작하며 이를 지인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위창 오세창, ‘와당문’
금석처럼 변하지 않는 지조
작품(도판 3)을 살펴보면 오세창 자신이 직접 소장해 오던 기물인 중국 한나라 때 거울과 고구려 성벽의 글씨, 그리고 신라시대 석벽에서 따온 경전으로 제작한 벼루를 탁본한 후 그 밑에, 탁본에 해당하는 내용과 소장 이력을 기록했다. 글의 마지막에는 이를 누구에게 선물하기 위해 만들었는지 제작 경위를 적어 두었다.
‘갑자년 정월 보름에 집안 소장의 길금낙석(吉金樂石)을 손수 탁본해 인향각(紉香閣) 주인에게 드린다. 찬 겨울에도 변치 않는 금석 같은 맹약을 다시 떠올리며, 금석처럼 장수하시길 축원한다. 패지외사(佩芝外史) 오세창.’
길금은 길상의 의미를 지닌 금속기로 주로 고대 청동기나 제기 등을 의미하며, 낙석은 글씨가 새겨진 돌로 비석이나 경전, 석물 등을 뜻해 진귀한 골동품과 예술품을 포괄하는 의미로 쓰인다. 즉 이를 손수 탁본해 갑자년에 해당하는 1924년, 인향각 주인인 구한말 관리이자 서화가 구룡산인 김용진에게 선물한 것이다. 이는 금석처럼 변하지 않는 지조와 오랜 세월에도 굳건한 건강과 안위를 축원하는 의미로, 당대 문인들에게는 길상과 지성을 겸비한 최고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근대기 두 서화가의 교유관계뿐 아니라 오세창이 고증학자로서 얼마나 박식했는지, 또 금석학을 통해 자신만의 서체와 전각의 예술세계를 완성해 내는 데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이는 민족대표 33인으로서 독립운동에 앞장선 업적과는 또 다른 의미의 문화사적 민족운동의 형태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