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의 미학을 잃어가는 시대다. 끝없는 발전을 추구하는 시대적 상황 속 무언가를 하지 않고 있으면 ‘나태하다’고 손가락질 받기 십상이다. ‘그렇게 가만히 있을 바에야 뭐라도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쉬는 순간조차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 누운 채로도 스마트폰을 들고 SNS를 살피고 여러 정보를 탐색하거나, 앉아서 또는 길을 걸으면서도 바로 다음 순간들을 계획하는 것처럼.
이 가운데 파운드리 서울이 오롯이 고요한 쉼의 순간을 즐기는 전시를 마련했다. 전시명부터 ‘돌체 파 니엔테(Dolce Far Niente)’다.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달콤함(the sweetness of doing nothing)’이라는 이탈리아의 개념에서 영감을 받았다.
여기서 말하는 쉼은 게으름이 아니다. 시대에서 일반적이라고 강요받는 속도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신의 감각과 존재에만 집중하는 주체적인 시간이다. 즉, 삶에 꼭 필요한 성찰과 돌봄의 시간이다.
윤정원 파운드리 서울 이사는 “속도, 생산성, 효율성, 성취가 강요되는 시대에 우리는 멈추지 못하고, 그렇게 사유의 시간 또한 잃어가고 있다”며 “개관 5년차를 맞은 파운드리 서울 또한 바쁘게 이어져 온 여정을 돌아보며 잠시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새로운 시각과 견해의 필요성을 느껴 외부 큐레이터와의 협력을 시작했고, 많은 대화 속 쉼이라는 주제가 나왔고, 이에 깊이 공감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를 공동 기획한 이리나 스타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기반의 큐레이터이자 아트어드바이저로 활동 중이다. 갤러리스트로 바쁜 삶을 이어온 그는 “미술계 또한 경쟁이 치열하다. 선구적인 시안이 필요해 늘 멈출 수 없고,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아왔다”며 “그렇게 40대에 이르자 이전엔 마음이 바빠 어려웠던 의식적 기획, 주제와 작가 선정 능력이 생겼다. 개인적 영감을 받고 줄 수 있는 프로젝트를 보는 시각도 생겼다. 그리고 이는 나 자신과 주위를 둘러보는 쉼의 시간에서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쉼의 미학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이 쉼의 이야기를 글로벌 작가 11인의 시선으로 풀어낸다. 이리나 스타크는 “참여 작가들은 오랜 시간 지켜봐온 작가들로 구성했다. 어떤 작가는 15년 넘게 봐왔다”며 “회화, 조각, 사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작가들이 사유의 시간을 통해 각자 구축한 세계관을 이번 전시에 모았다. 이를 통해 각 작가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작가 11인이 사색을 통해 구축한 세계관
지하 1층 전시장에선 엠 케트너, 아침 김조은, 빅토리아 기트만, 파트리시아 이글레시아스 페코, 세 오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이들의 작품에서는 ‘속도’에 관한 사색이 느껴진다.
캘리포니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엠 케트너는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걷는 것이 불편한 그녀의 발걸음은 세상의 속도보다 늦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기에 보다 주변 환경을 돌아보고 사색하는 시간도 됐다. 이번 전시에서는 목재 프레임, 세라믹 타일을 활용한 핸드레일 연작을 선보인다. 이 작품들은 사람들이 잡거나 손을 걸치는 계단의 손잡이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녀의 발걸음에 속도를 맞추는 시간도 가질 수 있다.
아침 김조은은 매일의 순간에 집중해 왔다. 특히 셀프케어, 식물 키우기 등 사소해 보이지만 삶을 아름답게 하는 작은 제스처는 그녀의 삶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이를 에세이처럼 풀어낸 그림을 이번 전시에 선보인다. 평화로운 그 순간들은 보는 이에게도 잠시 멈추는 시간을 마련한다.
빅토리아 기트만의 화면에선 오랜 인고의 시간이 느껴진다. 그녀가 그린 화면에서는 빈티지 모피, 지퍼, 장식품 등이 발견되는데 마치 사진을 찍은 듯 섬세하게 표현한 질감이 눈에 띈다. 이런 디테일을 통해 작가는 현대 회화의 추상과 재현, 사물성에 관한 담론까지 세계관을 확장한다. 파트리시아 이글레세아스 페코는 자연의 순환에 집중한다. 봄에 싹을 틔우고 여름에 왕성하게 성장해 가을과 겨울에 사라졌다가 이내 다시 봄을 맞는 그 순환의 시간에서 우리의 시간도 되돌아보게 한다.
세 오의 작업은 기다림의 시간으로부터 탄생된다. 전시장 한 가운데 도자의 정원을 펼쳐놓았다. 그는 “처음 ‘쉼’이라는 전시 주제를 듣고 공감했다. 점토를 건조하고 굽는 과정은 늘 기다림의 시간이자 소재와 대화하는 과정이다. 평생에 걸쳐 실천해온 삶의 방식과 전시 주제가 맞닿는 지점이 있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정원 또한 그렇다. 작가는 “정원을 가꾸기 위해서는 땅을 다지고, 씨앗을 심고, 이파리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들이 계속된다. 그 기다림의 시간은 지루하거나 결코 헛되지 않다”며 “도자의 정원을 통해 내 개인의 시간을 보여줌과 동시에 보는 이들 또한 잠시 멈추는 시간을 갖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를 위해 꽃이 피었다가 지는 모양을 한 ‘순환’ 테마의 트리오 작품도 내놓았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 시간은 작가에게 또 다른 탐색의 장도 됐다. 특히 스스로에 대해 돌아봤다고고 한다. 로스앤젤레스와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는 한국에서 입양돼 미국 디프 사우스에서 성장했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항상 자신의 정체성에 질문을 던져온 그는 한국적 재료에 관심을 갖고, 이를 작업에도 연결시켰다. 미국 점토에 한국 전통 유약을 입혀 도자를 구우며 경계를 구분 짓는 것이 아닌, 조화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작가는 “바깥에서 봤을 땐 하얀 도자의 안쪽을 들여다보면 청색 유약으로 색다른 측면을 발견한다. 이를 통해 보이지 않더라도 존재하는 내면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며 “이런 내면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밖으로 드러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나태함 아닌 성찰·돌봄의 시간
지하 1층 전시장이 한가로이 정원을 거니는 시간이었다면 이어지는 지하 2층 전시장은 고요함을 품은 놀이터를 방문한 듯하다. 이리나 스타크는 “전시 공간은 두 층으로 나눠져 있지만, 천장이 열려 있어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그래서 공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연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구심점에 있는 게 바심 마그디의 작품이다. ‘13 에센셜 룰스 포 언더스탠딩 더 월드(Essential Rules for Understanding the World)’는 작가가 과거 아랍 에미리트 비엔날레 의뢰로 제작했던 영상 작품으로, 현재 뉴욕 현대미술관(MoNA)에서도 소장하고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국내 관객에게 처음 소개된다. 영상 속 내레이터는 “삶은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뒤엉킨 복잡한 그물망”이라며 ‘사람이나 개를 믿지 말라’, ‘논리를 사용하지 말라’, ‘죽음에 대해 생각하라’ 등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규칙들을 소개한다. 특히 해당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마치 이번 전시 전체를 아우르는 배경 음악으로서의 기능도 한다.
이어서 상상력의 시간을 부여하는 히만 청, 레이 클라인, 픽시 랴오, 조니 네그론의 화면을 만날 수 있다. 히만 청은 ‘중간 회화’를 보여준다. 이는 그가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 자연스럽게 그려내는 작업 과정 자체를 화면에 담은 것이다. 중간 회화를 통해 히만 청은 잠시 멈춤의 시간을 가지고, 이는 또 다시 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공간의 또 다른 한켠엔 레이 클라인의 작품이 설치됐다. 그의 화면 속엔 크리스탈, 샹들리에 등 오브제가 등장하며 형이상학적 분위기를 내뿜는다. 일상적인 오브제와 낯선 맥락을 결합하고, 이를 통해 형성되는 긴장감을 통해 상상의 여지를 드러낸다.
도쿄를 기반으로 활동해온 픽시 랴오의 사진에 담긴 정적인 순간은 관계의 밀도를 드러낸다. 파트너이자 협업자인 모로와 함께한 20년의 시간을 기록한 이미지들은 과장된 서사가 아닌, 함께한 시간과 관계의 깊이를 통해 편안한 정서를 전달한다.
조니 네그론의 화면에선 석양을 배경으로 시간이 멈춘 듯한 인물과 사물이 등장해 눈길을 끈다. 화면 속 인물의 머리 그리고 심장과 가까운 위치에 자리한 공간엔 각각 다른 화면이 자리한다. 즉 이성과 감정 각각이 지닌 사유가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며, 관객에게도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네빈 마무드는 고정관념을 뒤흔드는 작업을 보여준다. 대리석, 유리, 로프, 스테일리스 스틸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해 그네 형태의 조형물을 만들었다. 이는 어린 시절 장난을 치며 놀았던 놀이터의 추억을 떠오르게도 하지만, 또 다른 시각에서 보면 관능적인 형태의 조각이 성적 해석으로도 전복될 수 있는 모순도 지녔다. 이처럼 한 가지로 고정되지 않은 서사를 통해 사유의 시간을 지니도록 이끈다.
파운드리 서울 측은 “이번 전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無爲)’를 단순한 휴식이 아닌, 스스로의 내면을 되찾는 적극적인 과정으로 바라보다. 속도를 늦추는 것은 하나의 의도적인 행동이자,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성찰과 돌봄의 시간이기 때문”이라며 “이번 전시가 서두르지 않고 작품을 응시하며 감각을 새롭게 사유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전시는 파운드리 서울에서 5월 9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