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한계령을 올라가거나 내려가다 보면 늘상 마주치는 것이 바로 안개다. 그 안개를 헤치고 가노라면, 우리는 산이 주는 무한한 변화와 만난다. 그리고 그 산 아래에는 시인이 한 명 살아가고 있다. 일명 ‘한계령 시인’ 정덕수. 그는 가수 양희은의 노래로 널리 알려진 ‘한계령’의 가사를 쓴 장본인이다. 한 동안 하덕규 씨가 이 노래의 원작자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던 ‘한계령’은 지난 시기 우리 사회를 둘러싸고 있던 ‘알 수 없는 안개와도 같은 그 무엇’의 깊은 성감대와 감성을 공유하고 있다. “노래를 먼저 들었는데 가사를 따라 부르다 보니까 가사가 귀에 많이 익더라구요. 그 노래 자체가 ‘태연하게 가슴에 와닿는다’ 이런 느낌이었어요. 이게 뭐지, 뭐지 하며 제 원고를 다시 뒤져 봤어요. 하덕규 씨가 그 노래를 가져다가 노래를 만들 때 쯤엔 한계령이 아니라 오색령입니다. 저도 오색령으로 썼다가 한계령으로 바꿨죠. 들어보면 노래는 처연함은 잘 살렸는데, 그 전체는 그게 부족해요. 제 시는 어떤 희망이 있는데 노래에는 그런 게 없어요.” 저 산은, 추억이 아파 우는 내게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하고 발아래 상처 아린 옛 이야기로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구름인 양 떠도는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홀로 늙으신 아버지 지친 한숨 빗물 되어 빈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정덕수, ‘한계령에서 1’ 부분. 서울 마포의 어느 술집에서 만난 시인은 자신의 시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과정을 담담한 어조로 풀어나갔다. ‘표절’은 세상 어느 작가도 부정하고 싶어 하는 부분이다. 시인의 시를 발췌한 하덕규 씨는 처음에는 그 사실을 부정했다고 한다. “지금부터 5년 전이죠. 처음에는 그 사람이 표절 자체를 부정했는데, 제가 KBS의 한 프로그램에 나온 것을 보고 하덕규 씨가 담당 PD에게 전화해서 항의했어요. 담당PD의 연결로 하덕규 씨가 먼저 전화해서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속에 있는 얘기를 다 했어요. 제가 돈을 바라는 게 아니라, 적절한 시기에 발췌 했다는 사실을 밝혀 달라고 했죠. 어떤 라디오 프로에서 해명을 했다고 들었습니다만…….” 당시 시인은 마음고생이 자심했다고 한다. 자신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인용을 밝히지 않은 것에 대한 씁쓸함, 이 두 가지가 시인을 아프게 했다. ■“시나 시인이 사라진 게 아니라 책이 사라진 시대” 흔히들 요즘을 일러 ‘문학이 실종된 시기’라고 한다. 또 ‘인문학의 위기’라고도 한다. 사실일까. 불행히도 이 명제는 사실로 판명돼가고 있다. 눈에 띄는 문학작품이 없다고도 한다. 문제는 무엇일까. 대형작가의 부재가 원인일까, 아니면 출세지향주의적으로 변해가는 세태가 문제일까. “시나 시인이 사라진 게 아닙니다. 시를 쓰는 분들은 시를 계속 쓰고 있잖아요. 어떤 시인의 시가 검색만 하면 다 떠요. 그런데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전의 시들은 다 사라졌어요. 아이들이 보는 책조차도 경제논리 책입니다. 돈·경제·처세·부동산에 관한 이런 책들이 많이 나가요. 서정이나 문학성을 담고 있는 책은 아예 없어요. 예전에는 연애를 할 때에도 시 몇 편, 클래식(음악), 그림 등 문화 예술에 관한 얘기를 많이 했지만 요즘엔 데이트 할 때 그런 얘기를 안해요. 그냥 ‘너 나 마음에 드냐?’는 단도직입적 대화를 하다 보니 어떤 문학성이나 문화적인 것에는 감동을 안하죠. 지금 이 시점에서 글을 쓰겠다는 분들은 40대 중반이나 50대와 60대분들이 많은 이유와도 연결이 되지요. 그 분들이 살던 그 때는 그렇게 살았잖아요.” ■“시집마저 ‘제목 장사’를 하는 시대” 지난 1992년 세간에 ‘최영미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며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 최영미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이후 출판사들은 그간 언론매체의 전유물로만 여겨지던 이른바 ‘제목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책의 내용과는 별반 관계가 없거나 선정적인 표현만을 끄집어내 이를 확대하는 것을 언론에서는 ‘제목 장사’라는 자조적인 용어로 말한다. 이에 대한 시인의 우려는 컸다. “깊이에 대한 성찰이라든가 진지한 사람이라든가 하는 시의 ‘정통성’은 시에서 멀어지고 제목이 눈에 잘 들어오고 쉽게 읽히는 책을 고르게 되는 거죠. 각 매체에서 제목 장사들을 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어요. 인터넷에 글을 올릴 때 제목을 어떻게 뽑느냐에 따라 클릭 수가 달라지는데, 정말 읽은 건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용을 평하는 것보다 제목이 주는 선정성에 진정한 작품이 밀립니다. 저는 책을 제목만 보고 산 적은 없습니다. 처음 책을 뽑았을 때 디자인과 머리말을 보고 본문을 몇 구절 봤을 때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이 있다 싶으면 그 책을 선택해요.” 시인은 공식 등단을 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인 등단의 방법으로는 ‘신춘문예를 통한 등단’과 ‘문예지의 신인상 혹은 문학상을 통한 등단’, 그리고 ‘추천을 통한 등단’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은 그 중 어느 방식으로도 문단에 나오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시를 쓰는 것이 좋아서’ 시를 쓴다고 했다. 시인은 전업작가도 아니다. 그가 생계를 위해 선택한 것은 ‘의류 디자인’이다. 그렇다고 ‘앙드레 김’처럼 잘나가는 디자이너는 아니고, 그저 ‘먹고 살만큼 버는’ 수준이라고 했다. ■“문학이라는 것은 고통에서 해방시켜주는 것” 인터뷰 내내 기자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생각이 하나 있었다. 왜 그는 하필 한계령에 거처를 두고 있는 것일까.
“살아오다 보면 벽에 부딪치잖아요. 남들처럼 사기꾼이나 양아치, 건달이 안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문학이 아닌가 해요. 문학이라는 것이 있어서 시장통을 하염없이 걷다보면 고통에서 다시 원상태가 되게 해주는 것이 있더라구요. 봄·가을에 글이 나오게 되는 것도 설악산 자체가 봄·가을이 좋아요. 몇몇 사람들이 얘기하길 어떻게 같은 것을 놓고 보고 써도 저렇게 바뀔까 하더라구요. 일 년에 시를 30편에서 40편은 씁니다. 여름에는 거의 못써요. 저는 봄·가을에 많이 써요. 작가들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요.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혼자 있을 때, 물안개가 오를 때쯤 주로 썼어요. 그렇다고 제게 문학이 취미는 아닙니다. 제가 하는 일은 내 가족에 대한 밥을 벌기 위한 움직임입니다. 그렇다고 글쓰기로 밥을 벌어 본 적은 없습니다. 봉투 몇 번을 받아보니, 거기에만 맞춰서 글을 쓰게 되니까 제가 망가지겠더라구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달라지는 관점을 표현하는 방식을 알았을 때 글로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작가인데, 어떤 상황에 편승하다 보면 그 기백이 사라지잖아요. 글을 쓰다가 글이 안써지면 안쓰면 되요. 절필이다 뭐다 하지 말고 또 쓰고 싶을 때가 있으면 쓰면 되고요. 맘먹고 쓰면 하루에 단편 소설도 쓰겠더라구요. 그런데 직업의식을 가지고 쓰다 보면 흐트러져요.” ■“어머니라는 이름은 수치심일 수도 있지만 희망의 다른 이름” 그의 시편들을 지배하고 있는 이미지는 바로 ‘어머니’다. 일찍이 시인 임동확이 자신의 시에서 “어머니는 둥글다/어머니를 자를 수 없다”고 진술했듯이, 정덕수 시인 역시 유년시절의 어머니를 가슴에 화인처럼 품고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엄마 없는 하늘 아래’란 영화를 보았어요. 저희 어머니가 가출을 해서 재혼을 하지도 못하고 자식을 낳고 사는 집에 가서 어머니를 만나고 나와서 본 영화인데, 조조할인부터 영화가 끝났을 때까지 봤어요. 하염없이 눈물이 나더라구요. 어머니라는 이름은 아름답다기보다 ‘한’이고 ‘수치심’일 수도 있고 그러면서도 한없이 자애롭고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는 ‘희망’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제 나이 22살에 저희에게 와서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실 무렵 거기서 책임을 못지니까 우리한테 연락이 와서 모시고 왔죠. 그래서 작년에 아버지 돌아가시고 화장해서 같은 곳에 뿌려드렸습니다. 이제 두 분이 한 곳에 계시겠지요. 어머니 때문에 죽으려고도 했고 생을 다 포기하려고도 했고 배도 많이 고파 봤고, 어찌하다가 17살에 봉제공장 사장이 되었어요. 어린 나이에 사장이 된 이유는 새벽에 남들 잘 때 안자고 공부한 것 밖에 없어요. 언젠가 10월 연휴라는 것이 있었을 때 단풍놀이를 가는 시기였는데, 사람이 미어터지는 버스 타고 고향에 갔어요. 집에 혼자 계신, 정이 없는 아버지하고 사이가 안좋았어요. 다시 신정 때 고향에 내려가서 아버지를 보고 느꼈던 그때의 감정이 ‘한계령’에 그대로 담겨 있어요. 시어는 오히려 요즘에 더 편하게 씁니다.” ■“생활이 아니라 삶이 절박해야 시는 나오는 법” 문학이라는 것이 ‘밥이 되지 못하는’ 시대. 이런 세월을 견디며 살아가는 시인들은 자신을 둘러싼 시간대를 어떻게 바라볼까. 그리고 또 어떤 눈물겨움과 따뜻한 슬픔으로 견딜까. “저도 과연 시란 무엇인가라는 숙제를 가지고 있었어요. 가끔씩 시가 부질없다는 생각을 해요. 시를 누구든지 쓸 수 있는 것도 같고요. 시는 누군가의 삶이에요. 그런데 요즘엔 그렇게 받아들여 주냐 그렇지도 않아요. ‘야, 이것 뭔 맛이야 먹어’라고 지정해 줘야 한단 말이죠. 시가 이렇게 안 읽히는 것은 시장으로 따지자면 마케팅의 부재라고도 할 수 있어요. 총체적으로 시인들도 그렇고 문학인들도 그렇고 문학을 가지고 제대로 마케팅을 못해요. 90년대에는 한 회사를 세 번 관두고 네 번 입사를 했어요. 월급은 다 털어서 6개월 정도 받아봤나, 부도가 나면 입사했으니까요. 2000년대 초반에는 한계령 산장 하다가 작년에 차비만 가지고 서울에 와서 지금은 사업하고 있어요. 그런 와중에 글 쓴 게 딱 네 편밖에 없어요. 글이란 게 한없이 그리워야 하고 한없이 절박해야 해요. 절박한 것도 생활이 절박한 게 아니라 삶이 절박해야 해요. 곤궁한 어떤 절박한 시기를 넘기면 시가 나오더라구요. 저는 그리워야 시를 썼습니다. 한계령에 관한 시를 쓸 때 한계령을 그리워해야 쓸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그리워야 어머니를 쓰고 연인이 그리워야 연인을 쓰고요. 한계령에 들어가 있을 때에는 시를 못썼어요. 그냥 내 옆에 있을 때에는 내가 맘만 먹으면 가니까 그립고 절박한 게 없더라구요. 외지로 떠나 있으니까 쓸 준비가 되더라구요. 시란 게 배부르면 안나와요.” 정덕수라는 이름을 문학 속에 새겨 넣은 시, ‘한계령.’ 그는 그 시를 어떻게 쓰게 됐을까. “처음 집을 나올 당시 제가 좀 조숙해 보여서 어른들이 가는 음악다방이나 일반다방도 드나들게 되었어요. 그곳에 가끔 가다 보니 여직원과도 친하게 되었는데, 그 여직원이 보던 책이 <한국의 명시>라는 전집 시집이었어요. 그 분이 거기에 체크를 해놓고 자기식의 표현도 해놨더라구요. 며칠 후에 카운터에 낙서를 해놓은 것을 봤는데, 그것이 내 생각하고 차이가 많이 났고 충격이었지요. 내가 당시에 쓰던 글은 글 쓰는 게 아니다 생각이 들어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예를 들어 김소월의 ‘진달래 꽃’이라는 시를 놓고 보자면 그냥 편안하게 보이던 것도 왜 이렇게 보이는가 하는 것이죠.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라는 부분에서 ‘눈물 아니’가 아닌 ‘아니 눈물’이라는 부분에 충격을 받았어요. 그리고 ‘왜 이렇게 뒤집어 보여줬는가’하고 고민이 되더라구요. 시인은 이제 그만 한계령의 굴레를 벗고 싶다고 했다. 너무 유명한 이름은 짐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시를 나타내는 말 중 이런 게 있다. ‘시를 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시처럼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시처럼 살아가는 시인’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진정한 시인의 반열에 들 수 있을 것이다. 정덕수 시인은 시쳇말로 ‘삼천리 강산이 다 아는’ 시인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그는 시를 업으로 삼고 있고, 그 시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그는 어쩌면 이 시대와 불화하고 있는 마지막 시인일지도 모른다. “시 자체는 적당하게 떠나보낼 수 있을 때 다시 올 수 있는 거예요. 떠나보내면 그리워해요. 사랑이 그렇듯이 떨어져야 그리워합니다. 앞으로 쓰여지는 게 더 중요하죠. 한계령 같은 것, 제 모습이 그것만 쫓아다녀요. 옛날 군사 독재 시절에 고문 받던 사람이 나 고문 받았으니까 보상해 달라고 하는 것과 똑 같습니다. 저한테는 그곳은 제 고향이고 한이 맺혀 있는 곳이에요. 이제는 그것을 가져다가 과거의 일을 다 끄집어 내놓고 나 이래요하고 싶지 않아요. 굴레죠. 제가 어려서 어머니 찾아 집을 나왔어요. 세상에 그것보다 더 흉악한 얘기가 또 나와야 합니까? 한계령이 왜 내속에 들어왔는지, 이젠 아예 접어둬도 괜찮아요. 출판사에서 책 내주면 내야죠. 이제는 내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야지 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사는 게 다 똑같지 않습니까? 저는 어머니 때문인지 편안한 것이 가장 최고 같아요.” -유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