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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이건희 야망 자동차 재시동中

이건희 회장 꿈 재실현 위해 르노삼성 되찾기 나설듯
르노삼성인수는 곧 현대차그룹 위기…자동차그룹 권좌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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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9호 ⁄ 2007.07.03 11:45:27

■ “내 생애 마지막 소원은 자동차산업을 소유하는 것” 지난 90년초 전자산업분야를 평정한 이건희 삼성그룹회장은 자동차산업진출을 소망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삼성그룹은 자동차 산업의 진출을 그룹 전체가 나서 홍보 및 로비를 벌여 국민 여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부산에 공장을 짓는 조건으로 95년 김영삼정권때 자동차산업에 진출했다. 이건희 회장은 세계 최고의 자동차회사로 키우기 위해 김영삼정권과 밀거래를 통해 기아차 인수에 나섰으나 여의치 않자 자금을 회수하는 수법으로 기아차를 부도위기로 몰았다. 기아자동차가 몰락하면서 IMF를 몰고 와 이것이 삼성차의 종말을 고하는 길로 접어들었으며 삼성그룹도 한때 휘청거렸다. 이에 따라 이건희 회장은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프랑스의 르노에게 헐값으로 매각하는 운명의 길을 걸었다. 이 회장은 매각 전까지도 삼성차를 살려볼려고 했으나 김대중정권의 매각강요를 뿌리칠 수밖에 없었다. 르노삼성,‘중국진출위해 한국 포기할듯’ 그러면 이건희 회장의 자동차 꿈은 재현될수 없을까? 이에 대해 재계에서는 충분히 이건희의 꿈이 재현될수 있다고 보고 있다. 반도체시장에서 벌어들인 자금이 풍부하기 때문. 그러나 르노삼성이 국내 차시장을 포기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에 대해 르노삼성은 중국 자동차시장의 교두보만 확보할 수 있다면 르노삼성에서 철수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는 현재 르노삼성에서 생산되는 자동차는 해외에는 팔수 없고 국내용으로만 판매되고 있는 실정이어서 거대 중국시장의 진출을 위해서는 르노는 포기의 길도 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르노가 르노삼성을 국내시장에서 철수하면 국내외 자금이 르노삼성차를 인수해야 한다. 현대자동차그룹이 인수의 파트너로 떠오르지만 현 경제상황을 고려할 때 인수의 여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독 인수의 여력은 삼성그룹. 특히 삼성그룹은 아직도 르노삼성의 지분 17%정도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삼성그룹은 얼마 안되는 자금으로 삼성차를 되찾아 올수 있다. 특히 삼성그룹은 삼성차 채권단과의 관계 정리를 위해서라도 르노삼성차를 인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삼성차 채권단은 삼성생명 지분 17%를 소유하고 있는데 삼성그룹은 이문제 해결을 위해 이 주식을 인수할 의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채권단의 채무를 인수할 경우 삼성그룹은 르노삼성차의 지분 30%를 소유하게 돼 르노에 이어 2대주주로 급부상하게 된다. 이에따라 삼성그룹은 르노와의 합의를 통해 장기간에 걸쳐 인수대금을 갚아나가는 방향으로 인수를 추진할 수 있다. 삼성그룹이 이건희 회장의 소원인 자동차산업에 재진출할 경우 삼성전자에서 벌어들인 자금력과 삼성 금융그룹의 자본력을 바탕으로 현대자동차그룹에 도전장을 던지게 된다. 이에 따라 현대자동차그룹은 삼성그룹의 차진출에 어떠한 충격을 받을 것인가에 관심이 집중될 수 밖에 없다. 해마다 반복되는 노사분규에다 총수의 법적 구속력 등으로 위기를 맞고 있는 현대자동차그룹은 한때 주거래은행으로부터 지급보증을 해 주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부도설까지 나돌기도 했다. ■ ‘삼성진출 타격은 현대로 튄다’ 현대자동차그룹은 또 삼성그룹과는 달리 그룹을 받쳐줄 전방후효과 산업배치가 없어 자동차산업의 위기가 올 경우 흔들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한미FTA협상이 타결될 경우 국내 자동차시장의 개방파고는 커질 수 밖에 없다. 이보다 더 큰 타격은 지구온난화로 인해 유로연합에서 배출량 규제를 강화할 계획이어서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지 못하면 자동차산업은 사양길로 접어들 수 밖에 없다. 특히 현대자동차는 분담금을 소비자에게 전가하지 않고 모두 현대자동차가 떠안을 경우 약 4억6천만유로(5,579억원)를 부담해야 한다. 지난 2005년 나라 안팎을 떠들석하게 했던 ‘안기부 X-파일’에서는 삼성의 자동차 진출에 집요함을 보여주고 있다. “기아車부도는 YS정권과 삼성그룹이 긴밀하게 합작으로 만든 작품이다. 이것이 곧 IMF를 몰고 왔다” “모든 안기부 기밀 도청은 청와대보다 황태자에게 직보된다”. 이는 지난97년 시중에서 떠도는 풍문이다. 이 풍문이 진실로 다가 왔다. ‘2005년 안기부 삼성 X-파일’에서 드러났다. YS정권은 미국을 비롯해 국내에서도 과잉산업이라고 할 수 있는 자동차산업을 삼성그룹에 덜컥 내줬다. 이것이 IMF의 계기가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와 관련, YS정권때 경제브레인의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안기부X-파일 속에 ‘삼성, 기아차부도 유도’ “당시 상황에서 보면 삼성자동차 신설은 정부로서는 허가해줄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곧 경제적인 힘의 논리보다 정치적인 힘의 논리가 우세했다는 증거다. 자동차 진출에 성공한 삼성그룹은 자금난에 허덕이는 기아車를 인수하기 위해 삼성생명 등 금융계열사를 총동원해 자금압박을 가했으며 결국 기아車는 부도났다. 삼성그룹은 기아車가 부도나자 마자 녹취록에서도 공개된 것처럼 그 당시 대선후보를 전격적으로 지원하는 등 전방위 로비전을 폈다. 그러나 기아車 인수의 행운은 삼성그룹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기아車와 관련, 옛 기아車의 재무담당임원은 삼성그룹이 금융계열사의 어음을 돌리지 않았다면 기아車가 그렇게 하루아침에 쓰러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94년 12월 7일 상공자원부로부터 기술도입신고서가 수리됨으로써 삼성자동차의 공식출범을 위한 준비작업을 착실히 추진하였으며, 95년 3월 28일 부산지방법원에 삼성자동차주식회사(英文名 SAMSUNG MOTORS INC)라는 상호로 본사를 부산에 둔, 법인설립 등기를 완료하였고, 동년 3월 29일에는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임직원 1,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회사창립기념식을 가졌다. 이어 삼성자동차(주)는 95년 4월 26일 부산시 강서구 신호지방산업단지내 55만평 부지에 98년 25만대, 2000년 50만대의 생산능력을 갖는 승용차 공장 착공에 들어가 96년 11월 공장건립을 완공함으로써 삼성자동차의 국내 자동차시장 진출준비는 모두 완료되었다.

삼성자동차의 부산유치 활동은 93년 삼성그룹이 자동차사업을 2000년대 주력사업으로 검토하겠다는 발표를 하면서 시작되었으며 94년 4월 13일 부산상공회의소 제15대 의원부(회장, 강병중)가 출범하면서 본격적인 추진이 이루어졌다. 부산상공회의소 신임회장단은 94년 5월 3일 청와대를 방문하여 삼성승용차 부산유치 건의문을 전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3일후 삼성승용차 설립불가 방침이 발표될 것이라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이에 부산상공회의소는 대통령에게 탄원서, 상공부장관에게 건의서를 보내면서 삼성승용차 설립허가를 요구하였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삼성승용차 부산유치는 시민운동으로 본격화되었다. ■ 삼성자동차 빅딜과 부산상공회의소 역할 이후 5월 14일 정재석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부산지역상공인간담회 개최, 5월 23일 삼성승용차공장 부산유치 의견조사를 실시, 5월 25일 경제기획원·상공자원부·민자당 등에 삼성승용차공장 부산유치 재건의, 7월 21일 부산발전전략 세미나를 개최하면서 삼성승용차 유치를 위한 여론조성에 힘을 쏟았다. 8월 17일, 10월 12일 두 차례에 걸쳐 부산상공회의소 의원총회를 개최하면서 삼성자동차 부산유치에 대한 결의를 새로이 다짐과 아울러 강력한 대정부 건의를 펴기로 하였으며 8월 22일 지상좌담회 개최, 8월 24일 부산상공회의소 회장단의 청와대 방문 등을 통해 부산지역은 물론 정부 관계당국에도 삼성자동차의 부산유치를 위한 여론조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 결과 94년 12월 7일 마침내 삼성승용차 기술도입신고서가 정부로부터 수리되었고 95년 3월에는 삼성자동차(주)가 공식 출범하게 됨으로써 삼성그룹의 승용차 시장진출은 본격화되기에 이르렀으며 그 동안 부산상공회의소를 중심으로 한 부산지역 경제계의 노력이 훌륭히 결실을 맺게 되었다.

삼성자동차가 부산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함에도 불구하고, 첫차를 생산한지 채 1년도 안된 98년 12월 7일 삼성자동차 빅딜추진이 공식화되면서 자동차 생산라인이 전면 중단되자 부산지역 경제계는 물론 시민들은 삼성자동차의 회생을 위한 다각적인 대책마련에 착수함은 물론 삼성자동차의 빅딜 거부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삼성자동차를 유치하였던 부산상공회의소는 빅딜이 공식발표 되기에 앞서 98년 10월 29일 대통령비서실장·산업자원부장관·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 등에 삼성자동차 존속지원을 건의한 바 있었다. 그리고 빅딜이 발표된 이후에는 12월 9일, 12일, 21일 등 수차에 걸쳐 대통령·산업자원부장관·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기업구조조정위원회 위원장 등에 빅딜관련 호소문, 삼성차 계속가동 건의문 등을 잇달아 제출하면서 삼성자동차의 존속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한편 동 빅딜 거부운동에는 부산지역 시민단체들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러나 삼성자동차의 빅딜은 예정대로 추진되면서 3월 22일 삼성·대우 그룹간의 삼성차 잠정인수 합의가 이루어졌고, 6월 30일에는 삼성에서 법정관리를 신청하는 동시에 삼성자동차의 원활한 인수를 위해 이건희 삼성그룹회장의 사재출연(2조8천억원 상당 삼성생명 주식) 약속이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부산지역의 빅딜거부운동은 더욱 강력히 추진되었다. 부산상공회의소는 삼성자동차의 법정관리 신청으로 향후 삼성자동차의 진로가 불투명해지자 99년 7월 2일 긴급 의원간담회를 개최하고 결의된 사항을 관계부처에 건의키로 하였고 7월 12일에는 대통령 경제수석과 정무수석 등을 초청, ‘부산자동차산업 및 지역경제 활성화 대책 간담회’를 가지면서 삼성자동차 문제의 해결을 직접 촉구하였으며, 7월 16일 삼성자동차 재가동에 대한 건의, 7월 23일 삼성자동차공장 조기 정상가동 협조 건의, 7월 28일 삼성자동차 협력업체 당면 애로해소 건의, 8월 11일 삼성자동차 조기 재가동 지원 건의 등을 통하여 청와대 및 정부당국에 삼성자동차의 조기 정상화를 지속적으로 촉구하였다. ■ 삼성차 진출실패는 곧 국민혈세로 이와 더불어 부산시와 시민단체들은 별도의 빅딜 거부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부산광역시는 99년 7월 1일 삼성차살리기 긴급 대책회의를 개최하였고 7월 6일에는 삼성자동차살리기범시민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 실무회의를 거쳐 7월 20일 삼성차 채권기관과 관계부처를 방문하여 신속한 해결방안을 요청하였다. 이 결과 삼성자동차는 99년 10월 3개월 시한부로 공장 재가동을 시작하였고 이 시점을 전후하여 삼성자동차는 빅딜이 아닌 제3자 인수방향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1년 1월에는 다시 3개월간 연장 가동에 들어가면서 삼성자동차는 사실상 잠정적으로 계속 가동하게 되었다. 2000년 1월 4일 프랑스 르노자동차가 삼성자동차 인수를 공식제의하고 3월 6일에는 르노사 인수제안서를 정식 제출함으로써 삼성자동차 매각은 급류를 타게 되었다. 그러나 매각협상 과정에서 채권단과의 이견으로 다시 삼성자동차의 공장가동이 중단될 위기에 빠지게 되자 부산상공회의소는 2000년 3월 20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주요 경제장관 초청 부산경제현안간담회를 가지면서 삼성자동차 인수협상이 조기에 타결될 수 있도록 강력히 건의하였다. 그리고 4월 들어서는 삼성자동차의 공익채권 문제가 매각협상의 마지막 걸림돌로 등장하게 되자 부산지방법원이 직접 중재에 나서 채권단과 삼성물산(주)에 대해 법원의 중재안을 제시하게 되었다. 이에 부산상공회의소는 4월 12일 채권단과 삼성물산(주)에 대해 법원의 중재안을 수용해 줄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삼성채권단이 이를 거부하면서 매각협상이 위기에 처하게 되자 부산상공회의소는 4월 17일 부산지방법원에 대해 삼성물산(주)가 수용할 수 있도록 최종 결정을 미루어 줄 것을 건의하였다. 이 결과 동 공익채권 문제는 원만히 해결되었고 4월 20일에는 마침내 삼성자동차 인수협상이 최종 타결되면서 삼성자동차는 4월 27일 르노삼성자동차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다. 삼성자동차의 빅딜 추진으로 인해 자칫 사라질 운명에 처했던 부산자동차산업은 르노삼성자동차의 등장에 따라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르노삼성자동차의 출범은 삼성자동차가 위기에 봉착하면서 노심초사하던 부산지역에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주면서 낙후된 지역경제를 회생시킬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는데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2000년 4월 27일 사실상 출범한 르노삼성자동차는 르노와 닛산의 기술지원하에 부품협력업체들의 발전방안을 모색하면서 삼성브랜드로 10∼15%의 국내시장 점유율을 확보한다는 계획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부산공장의 연간 5만대 생산능력을 2005년에는 40만대의 생산체제를 구축하여 소형차·중형차·RV(레저용차)·대형차 등 기본 생산체제를 완비하겠다는 목표를 설정하였다. 이에 따라 2001년 SM5 부분변경 모델을 출시하고 2002년 6월 소형차 SM3(1,500∼1,800cc)를 출시해 국내시장의 10%를 점유하고, 2003년에는 레저용차(RV) SM6를 출시할 계획이며 2005년 이전에 대형차를 선보여 국내 시장에서 본격적 라인업을 구축할 계획으로 있다.

2001년 5월 현재 르노삼성자동차는 자본금 8,054억원을 갖추고 있으며 종업원수는 2000년 9월 르노삼성자동차의 법인출범 당시 1,960명에서 3,067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그리고 생산능력은 월 5천대, 연간 6만대의 생산규모를 유지하면서 98년 2월 삼성자동차가 첫차를 생산한 이래 SM5 10만대 생산을 돌파하였으며, 2001년 6월에는 월 7천대의 판매실적을 기록하면서 국내 중형승용차 판매부문에서 소나타에 이어 2위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삼성자동차 관련 일지 · 93년 6월 삼성그룹 상용차사업 진출 공식 발표 · 94년 12월 7일 정부, 삼성자동차 진출 허용 (기술도입신고서 수리) · 95년 3월 28일 삼성자동차(주) 설립 · 4월 28일 삼성자동차 부산공장 착공 · 96년 11월 부산공장 완공 및 설비 시운전 · 98년 2월 SM시리즈 신차발표 · 12월 2일 청와대 경제수석 삼성자동차-대우전자 빅딜 전격발표 · 12월 7일 김대중 대통령과 삼성.대우그룹 총수 빅딜 확인, 삼성차 가동중단 · 12월 9일 시민단체 빅딜거부 삭발투쟁 시작 · 12월 10일 시민단체 국민회의 부산시지부 방문, 삼성차 빅딜 항의 단식농성 돌입 · 12월 13일 부산역에서 삼성차 빅딜저지 부산시민 궐기대회 · 99년 1월 21일 삼성.대우 그룹회장 조속한 빅딜처리 합의 · 3월 22일 삼성.대우 그룹회장 삼성차 잠정인수 합의 · 4월 23일 김대중 대통령 부산선물거래소 개소식에서 "부산을 세계적인 자동차 메카로 만들겠다"는 약속 천명 · 6월 30일 삼성그룹 삼성차 법정관리 신청, 이건희 삼성회장 사재출연 발표 · 7월 3일 김대중 대통령 삼성차 정상화 방침 표명 · 7월 6일 부산자동차산업살리기 범시민비상대책위원회 발족 · 8월 14일 시민연대 삼성차 SM5판매 시민봉사단 발대식, 판촉대회 · 10월 25일 삼성차 부산공장 재가동 · 12월 30일 삼성차 법정관리 개시 ·2000년 1월 4일 프랑스 르노사 삼성차 인수협상 공식 확인 · 1월 18일 르노사 삼성차와 부품협력업체 실사 착수 · 1월 19일 르노사 이사회에서 삼성차 인수안 통과 · 3월 6일 르노사 삼성차 인수제안서 제출 · 3월 13일 삼성차-르노사 인수협상 본격화 · 3월 19일 삼성물산 삼성차가 지급하지 않은 공익채권 지급요구 · 3월 29일 삼성차 채권단-르노사 2차 협상 결렬 · 4월 6일 삼성차채권단-삼성물산 공익채권 채무조정 협상결렬 · 4월 11일 부산지방법원 삼성차 공익채권 처리 최종조정안 제시 · 4월 18일 삼성물산 부산지법 조정안 수용결정 · 4월 20일 삼성차 채권단-르노사 4차 협상서 최종타결 · 4월 27일 르노사, 삼성자동차 인수합의서 서명 · 6월 30일 삼성자동차 회사정리계획 인가신청 · 9월 1일 르노삼성자동차 법인 출범 -김원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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