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초반인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가까운 대학 도서관에서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예전 같으면 평범하다고만 생각했을 여대생들을 자주 보면서 ‘예뻐 보인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돌 맞을 각오하고 이야기해본다. 학교에서 자주 마주치는 남자가 여러분에게 말을 건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30대 초반이지만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동안의 소유자이며, 스타일도 20대 후반 정도로 느껴진다. 여러분들의 반응은 어떨 것인가? ‘돌’ 던져도 좋으니 솔직하게 얘기해주셨으면 좋겠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글을 쓴 ‘30대 남’은 채석장에서까지 공수해온 다량의 돌을 맞게 됩니다. 반응은 비교적 동일했습니다. “캠퍼스에 멋진 남자들이 얼마나 많으며, 여대생은 한창 눈이 높을 나이인데 ‘아저씨’에게 눈이 가겠느냐”는 반응, “학교 내 예비역 복학생도 느끼해서 거부감이 느껴지는 판에 웬 아저씨겠느냐”는 반응, “돈이 많아 물량 공세를 퍼붓고, 안정적인 직업을 가졌어도 나이 많은 것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반응 등입니다. 얼굴이 안보여서 그랬는지, 그들의 반응에는 따가운 가시가 붙어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신의 그런 행동은 대자보감”이라든가, “한 여대생에게 트라우마가 될 것”, “정신 차리고 취직이나 하라”는 반응 등, 명백한 인신공격의 소지가 있는 반응도 있었거든요. 글을 쓴 ‘30대 남’은 나름대로 정중한 예의를 갖추고 조심스레 글을 썼던 뉘앙스였기 때문에, 그 ‘가시 돋친 반응’이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거기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 ‘상품가치’ 없는 자, 당신의 주제를 알라? 한 가지 전제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속물’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속물’의 사전적인 의미는 “교양이 없거나 식견이 좁고 세속적인 일에만 신경을 쓰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 사전적인 의미가 100% 맞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현실을 살고 있기 때문에, ‘세속적인 일’에 신경 쓰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속물’이라는 단어가 성립되기까지는 ‘교양이 없거나 식견이 좁고’라는 수식어와, ‘세속적인 일에만’이라는 단서가 붙습니다. 잘 생기고 키 큰 남자 싫어하는 여성은 많지 않습니다. 남성도 마찬가지죠. 못 생기고 뚱뚱한 여성을 선호하는 남성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왜? 우리 모두에게는 ‘눈’이 있고, 그 ‘눈’은 보기 좋은 것을 요구합니다. 자주 다니면서 데이트까지 하는 대상인 ‘사귀는 사이’에게서 시각적인 효과를 배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건 옳고 그름의 잣대로만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본능의 문제니까요. ‘30대 남’에게 돌을 던진 여성들은, ‘여대생’이라는 신분이 갖는 ‘상품가치’를 거칠게 앞세우고 있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이겁니다. “당신 같은 노땅 백수가 어딜 감히 여대생을 넘보느냐”는 겁니다. 저도 ‘30대 남’이 글을 쓴 진짜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 정중하고도 조심스러운 말투대로라면 정말 ‘여대생’들이 사랑스러워 보여서 말이라도 걸고 싶은 ‘순수한 감정’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인간의 흔한 ‘속물근성’대로 그저 ‘헌팅’, 시쳇말로 ‘껄떡질’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여성들의 거친 반응에서 ‘위험’을 느꼈을 때는, “‘30대 남’이 글을 쓴 이유가 전자일 경우였다면”이라는 생각을 했을 때였습니다. 그렇다면, 저 여성들의 반응은 글자 그대로 ‘폭력’입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호감을 갖는 것 자체는 누구도 뭐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가정한다면, ‘트라우마’나 ‘대자보’, ‘백수’ 등의 험한 반응을 직접 목격한 ‘30대 남’의 심정은 제 입으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추측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라면, 저 여성들 내면의 ‘속물근성’이 폭력적으로 활용된 사례로 봐도 무방합니다. ■ 시오노 나나미는 몰랐던 가치, ‘상품 가치’ “여자들은 정말로 사랑받고 있다면 자신도 진정한 사랑으로 갚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정말 사랑이란 얼마나 드물게 생기는 행운인지도 알고 있다. 그러니 서로가 신경전을 벌이지 말고 계산 없이 진정한 사랑에 전념하는 편이 사랑의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조건 항복이 오히려 승리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남자들에게>라는 책을 통해 ‘유쾌한 남자품평회’를 열어젖힙니다. 특유의 글 솜씨와 인간(특히 남성)에 대한 깊은 성찰이 맞닿은 양질의 책입니다.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가 결정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상품가치’라는 것입니다. 쉽게 예를 들어, <미녀와 야수>를 생각해봅시다. 미녀가 야수를 향해 진정어린 눈물을 흘림으로써, 야수는 잘 생긴 왕자님으로 돌아가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여기서 결말을 뒤틀어보겠습니다. 야수가 인간으로 돌아가서도 ‘야수’였다면, 미녀 내면의 ‘속물근성’이 작용하지 않았을지 장담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 대해 ‘속물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왕자답게 돈이 많다는 경우를 예측해볼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선악, 그리고 ‘속물근성’이 공존하면서 치열하게 부딪친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대로 추측해본다면, 미녀는 끝없는 인내의 대가로 ‘잘 생긴 왕자님’이라는 대가를 얻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야수’는 여기서부터 ‘잘 생긴 왕자님’이라는 ‘상품가치’로 미녀에게 어필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극단적인 ‘속물근성’대로라면, 미녀는 ‘왕자’라는 신분에 메리트를 느끼고 ‘마법’마저 속일 수 있을 정도의 빼어난 연기력으로 눈물을 흘렸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그럴 수 있는 동물입니다. 인간의 세속적인 꿈과 야망이란 ‘자신의 궁극적인 상품가치를 끌어올리기’로 볼 수도 있으며, 그 방법 중 하나는 ‘자신보다 더 나은 상품가치를 가진 사람’을 만나 자신의 위치도 끌어올리는 법‘입니다. 연속극에 자주 나오는 이야기죠. 그렇기 때문에, “여자들은 정말로 사랑받고 있다면 자신도 진정한 사랑으로 갚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정말 사랑이란 얼마나 드물게 생기는 행운인지도 알고 있다”는 말에는, “서로의 ‘세속적인 가치’를 밀접하게 느끼고 있느냐”는 의문도 추가돼야 합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속물근성’에 따른 현실입니다. 연애란, 물론 처음에야 안그런 척 숨기겠지만, 결국에는 어쩔 수 없는 남성의 ‘껄떡질’과 여성의 ‘상품가치’가 충돌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과연 ‘껄떡질’과 ‘상품가치 대가’를 용납할 수 있는 능력과 외모의 소유자인지, 그것도 파악해야 하는 일입니다. 동화가 그리는 세상이 만들어질 확률은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속물근성’의 위력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제 개인적으로 최고로 우대하는 인간의 가치는 ‘인내’입니다. 꿈틀거리는 ‘속물근성’을 참아내는 자, 남녀를 떠나 그야말로 위대한 성인(聖人)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우리 모두가 ‘성인군자’가 된다는 것은 확률적으로 희박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조건’과 ‘나의 상품가치와 합당하거나 그보다 더 높은 상품가치’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30대 남’은 그래서 돌을 맞은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미, 순수한 감정만으로는 사랑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예, 안타깝게도 그렇게 됐습니다. 왜? 살기 힘든 세상이기 때문이고, 자본주의 사회인만큼 높은 상품가치의 맛을 오랫동안 알면서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원래부터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연애는 또 하나의 밀림입니다. 약육강식의 원리가 엄연히 살아있는 처절한 현장입니다. 서글프지만 그렇게 된지 오래입니다. 상품가치가 없으면 물러날 수밖에 없는 냉정한 현장입니다. ‘30대 남’은 결국 맞았던 ‘돌’을 통해 그 냉엄한 약육강식의 원리를 확인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의 조심스러운 글이 풋풋한 진심이었다면, 무심코 던진 ‘돌’로 인한 상처를 누가 어루만질 수 있느냐는 겁니다. 예, 쉽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쓰디쓴 돌 맞은 상처를 묻고 다시 공부에 매진할 것이구요. 진심을 말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상품가치’를 만들기 위해 그는 다시 공부할 것입니다. 쓰디쓴 가슴을 안고. 서글픈 현실 속에서 이뤄지는 연애의 법칙은, 진심을 말하는 것조차도 ‘자격’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외면할 수만은 없는, 당면한 바로 그 현실요. 추신 : 사이트 이름을 공개하지 않은 이유는, 어쨌든 그 사이트가 ‘여성의 공간’임을 존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분 나쁜 얘기가 오간다 할지라도, 어쨌든 그들의 사이트입니다. 이 글은, ‘사건’에 대한 제 개인의 생각과 입장일 뿐, ‘사이트’에 피해가 갈 일을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니셜 처리만 하고 사이트 이름은 공개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눈치 채신 분, 이미 알고 계신 분이 있다면 할 수 없지만요. <박형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