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동안 우리의 신발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명품디자인 개발에 평생을 바쳐온 분이 있어 장인(匠人)을 경시하는 우리 사회에 귀감이 되고 있다. 화제의 인물은 우리나라 신발명장 제1호인 김영만(75세)씨로 1956년 부산의 덕원고를 졸업하고 1957년 금강제화에 입사하면서 그의 신발에 대한 열정은 시작되었다. 다소 불편한 몸(곱추)을 가진 그는 당시에는 생소했던 신발분야에서 세계속의 최고 명품을 만든다는 야심찬 생각으로 제화회사에 입사하였는데 그의 열정을 높이산 회사 측에서 일본·이태리·미국·프랑스 등으로 연수를 보내며 선진 기술을 익히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태리의 기술은 세계 최고수준이라는 생각으로 연수 이외에 4년간 개인교습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당시 수작업에 의존했던 생산체제를 기계화 및 분업화로 전환시켰으며 기존의 봉합식 제법에서 접착제법을 도입하는 등 우리나라 신발제조 방법의 일대 개혁을 이루어 내기도 하였으며 무엇보다 신발의 크기를 나타내는 단위인 척환법을 외국 바이어들이 이해하지 못한 점에 착안해 미터법을 국내 최초로 적용하고 소비자 1천 명의 발을 일일이 계측하여 세분화시키기도 하였다. 젊었을 때는 대통령(박정희) 전용구두와 오토바이 기동경찰관의 전용부츠를 설계하였으며 “망지로 된 구두 갑피” 등 2건의 실용신안과 “요철 지지대”로 특허를 받았고 “건강을 위한 보행, 보행을 위한 구두” 등 4권의 저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또한 이란과 일본에서 슈 디자이너로 활약하였으며 기능인을 양성하는 K스튜디오를 설립해 국·내외 각종 기능경기대회에서 많은 메달리스트를 배출하기도 했다. 국내 제화산업을 이끄는 최고의 기능인으로 평가받아 지난 2004년 11월 대한민국 명장에 선정되기도 한 김영만 씨는 국·내외를 망라한 오랜 실무경력과 축적된 기술 및 기능적 측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우리나라 경제력에 비해 우리의 신발산업은 아직 세계 최고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자평한다. 김 씨는 “신발이 단순한 것 같지만 인체공학이 가미된 다른 어느 것보다 과학화가 필요하며 갈수록 편하고 기능적인 것은 물론이요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 하고 있다. “제2의 심장”이라는 발을 보호하기 위한 신발산업은 절대 사양산업이 아니라 디자인에 따라 180여 개의 부품이 필요한 정밀한 작품이란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외국 관광객들이 우리나라에서 쇼핑을 할 때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세계적인 명품이 전무한 것이 가장 안타깝고 후배들한테 미안하다고. 50년 외길인생의 신발명장인 그는 오는 10월에 외국인이 많이 찾는 인사동에 상설 전시장을 만들어 그의 작품을 선보일 계획으로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명품브랜드라는 자부심으로 작품명도 ‘명장(明匠)’이라고 지었다. 그는 앞으로 후학 양성을 위해 노력할 계획이며 고급 디자인을 만들어 수출하는데 남은 열정을 쏟을 생각이다. 한때 500곳 이상의 신발공장이 밀집해 있어 우리나라 신발의 메카로 불렸던 성동구 성수동이 얼마 전까지 값싼 중국산에 밀려 침체기를 겪다가 최근 새로운 유통경로와 질 좋은 수제화 시장을 개척하면서 다시 활기를 찾고 있어 지금은 100여 곳에 이르고 있다. 성수동 신발산업의 부흥을 꿈꾸는 김영만 명장은 현재 (주)금천코퍼레이션의 고문으로 있으면서 날마다 새로운 디자인 개발에 힘쓰고 있다. <강세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