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대 총리 중, 그 누구보다도 ‘포퓰리즘적’이고 엽기 발랄한 정치행보를 보이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의 뒤를 이은 아베 신조 총리가 최근 사임했다. 그가 왜 사임했을까. 또 일본의 집권 자민당은 어째서 야당인 민주당(사실상 자민당과 동일한 정당인)에게 참패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어설픈 전임자 흉내내기’가 그 답이 되겠다. 우리 옛 문헌에 보면 일본인들의 조상을 가리키는 훌륭한 낱말이 하나 나온다. 그 당시 우리민족에게 문자가 없었던 관계로, 옆 동네 중국의 글자를 하나 빌어다가 표현을 했다. ‘왜(倭)’라고. 사실 말이야 바른말이지, 그들을 지칭할 때는 ‘일본인’보다는 ‘쪽발이’ 혹은 ‘왜놈’이라는 말이 우리 혀에 착착 감긴다. 지금도 일제시대를 기억하는 어르신들은 웬만하면 ‘일제시대’라는 공용화된 명칭 대신, ‘왜정시대’라 한다. 이유는 무엇일까. 열등한 민족에게 지배를 받았던 그 시절은 그분들에게 ‘안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 영웅 만들기의 오류< /b> 흔히 TV나 영화제작자들은 흘러간 역사를 드라마나 필름의 형식으로 재구성하거나 인용한다. 요 몇 년 동안 한국의 대하드라마들이 ‘불멸의 이순신’이나 ‘태왕사신기’ 등의 우리민족의 영웅들의 일대기를 그려내고 있는 현실이고 보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나오는 일본의 ‘과거사 망언 시리즈’와 중국의 ‘한국 고대사 편입 작업’은 제작자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고마운 일일지도 모른다. 때때로 그러한 드라마나 영화가 빠지기 쉬운 유혹은 ‘대체역사’ 혹은 ‘국수주의 사관’이다. 실제로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는 곧잘 네티즌들의 질타를 받았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역사적 사실과 희망사항을 혼돈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를 지배해왔던 ‘영웅주의’는 흔히 ‘한 사람의 영웅을 만들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역적으로 만드는’ 오류에 빠지곤 했다. 예를 들어, 이순신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원균을 대역무도한 인간으로 묘사하는 것이 그것이다. 일본정치인들의 잇따른 망언의 행진이나 독도영유권 주장 등은, 분명 역사적으로 보나 사실관계로 보나 ‘헛소리’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헛소리를 증명하기 위해 다른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이유는 없다. 마찬가지로 ‘대체역사’ 역시 하나의 ‘즐거운 상상’을 위한 것이어야 하지, 마치 그것이 진실인 양 주장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드라마는 그냥 드라마일 뿐이다. ■ 굽이치는 물목< /b> 지칠 줄 모르는 일본의 망발버라이어티쇼를 보며 묵은 책 하나를 연다. <남해>. 흔히들 ‘전쟁소설’이라고 부르는 책이다. 저자는 <동해>, <데프콘> 등으로 밀리터리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줬던 진병관·김경진. 공동집필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이 책은 진병관이 아이디어를 내고 전투 상황을 구성하면 김경진이 스토리를 첨가하고 상황을 매끄럽게 연결해 소설로 만들었다고 한다. 소설의 줄거리는 언뜻 보면 간단하다. 배타적 경제수역 문제로 인해 불거진 한일 간의 갈등이 일본 측의 무력도발로 인해, 전면전에 가까운 제한전으로 발전한다는 내용이다. 처음 이 책을 읽었던 4년 전에는 ‘그냥 재미있는 소설’로 남았었다. 물론 그 당시에도 일본의 지속적인 망언이 존재했고, 주기적으로 나를 화나게 했지만, 작년의 북핵사태 당시처럼 근본적으로 그들에게 회의를 품은 적은 없었다. 그것은 센카쿠열도와 북방 4개 도서 등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전방위적인 영토 분쟁의 불길이 우리의 독도와 이어도까지 번져왔기 때문이다. 그 어떤 ‘정상적인 나라’치고 자국의 영토에 ‘침을 바르는’ 놈들에게 화해와 상생의 손을 내밀겠는가 말이다. 이럴 때 마다 생각나는 법전이 있다. 함무라비 법전. 일본의 헛소리에는 몽둥이가 약이다. 이것은 누구나 아는 진리이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그들의 주둥이에 몽둥이를 내리칠 수 있는가. 이것은 우리들의 분노와는 또 다르게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다.
<남해>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나의 시선은 ‘영해가 영토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국민들은 독도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일장기를 태우고, 일본상품을 불매하고, 저마다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정작 대한민국의 생명줄이라 부를 수 있는 남해의 상황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다. ‘한일 대륙붕 공동 개발구역’이라는 말을 들어본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거의 모르고 있다. 지난 2005년에 발해만에 석유매장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발해만의 그 지역은 분명히 북한의 관할구역이다. 만약 북한이 남한의 자본 등과 결합하여 석유를 채굴하려 한다면 분명 중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주도 인근의 한일 대륙붕 공동 개발구역 역시 천연가스나 석유 등의 매장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다. 일본이 두 번에 걸친 어업협정에서 이 지역에 비정상적인(?)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안 봐도 비디오란 뜻이 된다. ■ 바다의 진혼곡< /b> 소설은 한국과 일본이 진행하던 배타적 경제수역의 경계 설정을 위한 협상이 난관에 부딪히고, 제주도 남동쪽에서 한국해군 광개토전대와 일본 해상자위대 제 2호위대군이 격돌하면서 시작된다. 이 전투에서 한국해군은 5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일본은 적극적인 해상봉쇄에 나선다. 일본의 압도적인 해군력에 계속 밀리면서 민간 선박이 나포되고 침몰되는 최악의 상황까지 벌어지자 한국해군은 최후의 수단으로 잠수함 세척을 도쿄만으로 잠입시키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후의 줄거리는 말하지 않는다. 궁금하시면 직접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남해>는 단순히 밀리터리 매니아층만을 대상으로 하는 소설이 아니다. 이 책에는 우리 모두가 천천히 음미해야 할 말들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 대개의 경우, 밀리터리 소설은 국수주의적이거나 지나치게 흥미 위주거나 심지어 허무맹랑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작품, <남해>에는 ‘건강한 민족주의(국수주의가 아닌!)’와 우리 정치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이 들어 있다. 국민들의 들불 같은 민족애를 한 순간의 정치적 도구로 이용해온 자들에 대한 낮지만 확실한 경고 역시 들어 있다. ‘레퀴엠(Requiem).’ 이 소설의 한 단락의 이름이다.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이라는 의미의 이 말은 현재 대한민국 해군 더 나아가서는 우리 전체의 현실적 상황을 대비시키는 말이다. 우리 모두가 화살이 되어 가지 않는 한, 일본의 침략근성이라는 거대한 악을 저지할 수 없는 지금의 대한민국.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류의 생각만을 가지고 이 책을 읽는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소설 속에서 우리는 완전히 승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이 책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점점 마음의 한 구석이 무거워지는 것은, 현재의 우리가 아직도 좁디좁은 반도 안에 갇혀 스스로의 심장에 비수를 겨누고 있는 까닭이다. 일본의 망발이 있고서야 우리는 비로소 ‘왼쪽’과 ‘오른쪽’, ‘보수’와 ‘진보’라는 틀을 벗는다. 더불어 ‘남’과 ‘북’이라는 철조망도. 소설 <남해>를 지배하고 있는 시각은 앞에서 말한 각종 틀을 모두 거부한다. ‘민족’이라는 용광로 안에서는 그 모든 것이 용해되기 때문이다. 민족의 ‘자존(自尊)’은 우리 스스로가 우리를 미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를 바로 밝히고,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에 걸맞는 힘을 보유하는 데서 비롯된다. 우리 안의 ‘자학사관’이 불러온 “조선놈이 다 그렇지” 따위의 헛소리는 그냥 일본에게 돌려주면 된다. “일본놈들이 다 그렇지, 뭐.” <유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