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집(후일 베트남 부분만 따로 떼어 장편으로 개작된 ‘랍스터를 먹는 시간’과 제목이 같다)에는 네 개의 중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베트남과 한국인의 문제를 다룬 ‘존재의 형식’과 ‘랍스터를 먹는 시간’, 전교조 출신 복직교사의 이야기를 그린 ‘겨우살이’, 현대중공업노조의 위기를 그린 ‘겨울 미포만’ 등이다. 이 소설들의 내용을 일일이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고, 내가 문학작품을 평가하는 눈이 있는 것도 아닌 까닭에, 몇 가지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단상들이나 말하련다. 대부분 독자로서의 불평들로 가득 차 있지만, 이 소설집에 대한 내 생각이 불평인 것만은 아니다. (이러니 항상 ‘투덜이 스머프’라는 소리를 듣는다) 읽어 보아야 할 많은 이유들이 여전히 이 소설집 안에 있다. 그러나 역시, 의문스러운 부분들도 존재한다. ■베트남, 누구의 문제인가? < /b> 방현석은 ‘글’이라는 것을 잘 쓴다. 특히 표현법적인 측면에서는 등단 초기의 작품들보다 더 잘 쓴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설의 구성에서도 좀 더 재미있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박완서 선생의 평처럼 ‘용의주도’하고 ‘빛나는 시도’이기도 하다. (물론 모두 성공적이라고 할 수는 없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의 직전에 나왔던 <하노이에 별이 뜨다>는 영 재미가 없었다. (2/3쯤 읽다가 책장에 그냥 꼽아두었다. 정말 정신없이 읽은 황석영의 소설 ‘무기의 그늘’과는 사뭇 달랐다. ‘황구라’의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 만일까?) 그리고 이 소설집에서 베트남을 다룬 두 편의 소설을 읽으면서는 나는 까닭모를 불편함에 시달렸다. 왜 그랬을까? 나는 방현석이 누구보다 먼저 ‘베트남’에 관심을 가지고 선험적으로 ‘역사적 부채감’을 우리에게 이야기할 뿐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해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어떤 사회-역사적 모순의 단계에 있는지, 그것에 얼마나 맹목이었는지도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런데 왜일까? 나는 그 불편한 감정의 이유를 이 책의 끝에, 방현석이 남긴 후기에서 알 수 있었다. 방현석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은 처음부터 베트남이 아니고 여기, ‘지금의 우리’였다.” 그랬기 때문이다. 방현석에게 베트남은 남한을 다시 비춰주는 반사경이다. 베트남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이지만, 그것은 결코 베트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곳 우리가 날마다 밥을 먹고 똥을 누며 살아가는 반도 남쪽의 이야기이다. 내가 불편했던 것은, ‘베트남’은 우리가 견디어 내기에는 아직 그 기억이 너무나 강렬하고, 또 아프기 때문이다. 그 전쟁의 기억들을 ‘우리식으로’ 다시 생각해보거나, 혹은 우리의 문제를 생각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적 도구’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는 아직 그 사건의 시간들이 너무도 가까이 있고 (당장 내 아버지조차 베트남전 참전군인이다), 전쟁이라는 것이 늘 그랬지만 이 전쟁은 ‘특별하게’ 끔찍하고, ‘따이한’의 전쟁범죄 행위가 너무 잔혹하며, 그러나 동시에 베트남 인민들(쿠리)의 투쟁은 너무나 아름다운 ‘숭고함’을 지니기 때문이다. 방현석의 시도가, 단지 그것들을 소개하고 남한의 반성을 촉구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베트남에 더 깊이 다가가기 위해서 필요한, 다양한 길 중에 하나라는 점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베트남의 무게는, 한국인 등장인물들이 가지는 무게와 비교할 수 없을 만치 무겁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집은 방현석이 알고 싶었던 ‘우리’와는 달리 다른 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지고 있다. 작가가 애쓰는 것과 반대방향으로 계속 기울어지기 때문에 불편하다. ■‘후일담 소설’의 가능성 혹은 한계 < /b> 박완서는 이 책에 대한 추천사에서 잘 쓴 ‘후일담 소설’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존재의 형식’이 후일담의 범주에 속할 수 있을 것이고 ‘겨우살이’도 어쩌면 그렇게 분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글을 읽고 나서는 ‘잘 쓴 후일담’이란 존재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존재의 형식’에서 방현석은, 이미 운동의 과거와는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속물’ 친구를 주인공과 화해시킨다. 몇몇 갈등도 있고 뜨악한 행동도 좀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래도 가슴에 무언가 품고는 있더라, 이런 식이다. ■하지만 그래서? < /b> 운동을 청산한 이들을 이런 식으로 복권시켜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먹고 사는 데 바빠서 뭔가 실천하지는 못해도 가슴 속에 진심은 있다는 걸, 대신 보여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기껏해야 아직도 ‘개혁세력’입네 하며 신자유주의자로 전향한 386들을 변호하는 데 그칠 것이다. 선거 때만 되면 옛정을 상기시키며 다가오는 그들을 변호해보았자, 개혁을 위장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뒷통수를 칠 뿐이다. 베트남 민족해방전사들의 투쟁이 결국, 그런 386들을 옹호하기 위한 후일담의 소재가 되었다는 데 더 불편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지금 행동은 이래도 우리도 진심은 있어’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편입해가는 베트남 공산당과, 신자유주의의 수혜자인 남한의 금융엘리트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을 테니, 적절한 구성인지도 모르겠지만. ■ 그리고 ‘여성’은 어디에? < /b> 방현석의 소설들에는 일관된 공통점이 있다. 여성이 부재하거나 혹은 부차적이거나 혹은 부정적인 존재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존재의 형식’에서 남성 주인공과 영화 시나리오 번역작업을 함께 하고 있는 ‘희은’은 철없는 천방지축 아가씨일 뿐이다. ‘랍스터를 먹는 시간’에 남성 주인공의 베트남인 애인인 ‘리엔’은 베트남 남성(그녀의 외삼촌)이 한국인(남성 주인공)을 용서하는 매개(그 의사를 전달하는 상징물)일 뿐이다. (게다가 제3세계를 여성으로 상징화하는 방식이란!) ‘겨우살이’에서는 남성 주인공의 누나들은 그에게 희생적인 여성이고, 불경하게도 누나에게 사고를 친 여성운전자는 사과도 없고 뻔뻔한 ‘싸가지 없는 년’이다. 싸가지 없는 뚱뚱한 학부모들(남성 주인공을 학교에서 몰아내거나, 돈 많다고 유세하는 그런 아줌마들 말이다)도 등장한다. 여성혐오 수준이다. ‘겨울 미포만’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여성인 남성 주인공의 부인은 남편의 고민을 받아주지 못하는 속 좁은 여자다. 처음부터 끝까지 중요한 일은 남성 주인공과 다른 남성 등장인물 사이에 벌어진다. 이에 비해서 여성이 중요하게 등장하는 경우는 ‘겨우살이’에서 부정적인 역할을 맡을 때 뿐이다. 남성 작가에게 여성 인물을 형상화하는 상상력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 우리시대의 소설이 말할 수 있는 어떤 것 < /b> 나는 과연 지금의 한국 소설이 어떤 방식으로 말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 나왔던 많은 노동소설들은 장황한 문건을 삽입하지 않아도 할 말을 모두 했다. 노동자 대중이 투쟁에 나서는 과정, 투쟁 속에서 그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예술적 형상화를 해냄은 물론 노동자들이 어떻게 투쟁해야 하는지도 보여주었다. 등장인물들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실천 속에서 무언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그 때와 꼭 같지는 않다. 노동자 운동이 ‘열심히 조직적으로’ 한다고 해서 다시 부활할 수 있는 조건도 아니며, 근본적인 혁신을 고민해야하는 시점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속에서 남한이라는 반(半)주변 사회의 노동자 운동이 처한 조건에 대한 인식과 이에 기반한 과학적 대안을 낼 수 없다면 문건을 서술하지는 않는 것이 좋다.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위기 속에서 형상화할 수 있는 인물상들은 있다. 그것을 통해서, 여전히 우리가 지켜야할 과거의 가치이든, 이제 우리가 새롭게 부여잡아야할 새로운 가치이든 그려낼 수 있다. 우리가 소설을 보는 것은 문건을 읽기 위해서는 아니다. 특히 그 문건이 ‘부재하거나’ 부족한 것일 때는 더 그렇다. “마음의 파산을 막는 유일한 길, 그 길의 이름은 독서이다” - 부도 야마하루 <유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