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보릿고개를 넘기고 70년대에서 80년대 초반 한강의 기적을 만든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한 가지 불문율이 있다면 “빚 무서운 줄 알라”는 것이었다. 끼니를 거르며 쪼들리더라도 빚은 어떻게든 안 쓰고 버텼고, 있는 빚도 빨리 갚지 않으면 잠이 안 오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빚을 안 쓰면 팔불출인 시대가 됐다. 몇 년 전 신용 카드 대란 때 온 국민이 카드 대출을 받아 마치 주머닛돈 쓰듯 쓰더니, 얼마 전부터는 은행 대출 받아 집을 사는 게 상식이 됐다. 내로라하는 재테크 전문가들은 “‘빚 내서 집 사면 위험하니 돈을 모아 사야지’ 하고 미루다 보면 집값이 너무 올라 못 산다. 적정한 범위 내에선 빚을 내서 집을 사라”고 권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는 쪽은 대출 관련 업체들이다. 제도권인 시중은행은 말할 것도 없고, 카드·저축은행·캐피털 등 제2금융권 그리고 대부업체와 불법 사채업자까지 다양한 마케팅으로 고객을 현혹하고 있다. TV에서는 대출을 ‘강요’하는 CF가 연일 방영되고, 신문·인터넷·모바일·잡지·정보지·전단지 등에도 대출광고가 쏟아지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대출안내’ 전화 직장인 손민호(남·30) 씨는 최근 짜증스러운 일을 겪었다. 급하게 서류를 작성해야 하는데 대출 받으라는 전화 벨이 쉴새 없이 울렸기 때문이다. 바쁜 업무 와중에 전화를 받으면 바로 끊기거나 직장인 대출을 받으라는 안내 음성이 나온다. 손 씨는 “서류작성 시간도 촉박한데 대출 받으라는 전화를 받을 때는 스트레스가 세 배는 증가하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대학생 박노수(남·23) 씨는 가급적이면 케이블 TV는 보지 않는다. 대출 광고 때문이다. 박 씨는 “간혹 케이블에서 재미있는 방송을 보고 있으면 한 프로그램마다 3~4번의 대출 광고를 봐야 한다”며 “처음에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반복되는 광고를 볼 때마다 짜증이 난다”고 하소연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신문이나 잡지 등에도 대출광고가 나오는 일은 이제 자연스러운 현상이 됐으며, 심지어 하숙방을 찾기 위해 게시판, 전봇대를 보면 하숙방 구인보다는 대출을 받으라는 문구를 더 많이 보게 된다”고 박 씨는 머리를 흔들었다. 박 씨는 “대학교 등록금으로 받은 학자금 대출이 지금도 밀려 있는데 길거리 대출광고를 보면 왠지 화가 난다”며 “어느 기관에서 담당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더 이상 이런 것 좀 안 볼 수 있게 대책을 세웠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한국은행이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총 대출금 잔액은 1058조 8727억 원으로 한 해 동안 142조 1601억 원(증가율 15.5%)이 증가했다. 이는 전년 증가액 112조2099억 원(13.9%)보다 30조 원이나 늘어난 금액이다. 그러나 불법 사채와 대부업체의 몫까지 더하면 증가율은 더 올라갈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은 ‘빚 권하는 사회’인가 이를 입증하듯 이제는 집을 구하기 위해 수억 원의 대출을 받는 일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됐으며, 신혼부부일 경우 전세·월세 보증금마저 빚으로 충당하는 일도 허다하다. 다만, 연 6~9% 가까운 이자 때문에 매달 월급에서 70~90만 원 가까운 돈이 꼬박꼬박 은행으로 지출되고 있어 일반 직장인들의 한숨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하지만 제1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은 직장인들은 차라리 나은 실정이다. 박노수 씨처럼 수입이 없는 대학생들의 경우, 등록금 학자금 대출이 수천여만 원에 이른다. 여기에다 신용 카드를 사용하면 무분별한 할부·현금 서비스 등으로 자칫 사회에 나오기도 전에 신용불량으로 전락할 수 있는 사례도 부지기수다. 신용 카드를 사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높은 학자금 대출이자 때문에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사회에 나올 때부터 이미 수천여만 원의 빚을 짊어진 셈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에 대출의 유혹과 덫이 널려 있다는 점이다. 관련 업체들은 선이자를 주거나 불법적인 영업으로 돈을 받으면 그만이기 때문에 일단 빌려주고 본다는 심리가 강하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말이다. 하지만 이를 관리·감독하는 기관은 일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손을 놓고 있다. 결국, 외환위기 11년 만에 또 다시 빚 권하는 사회가 초래된 셈이다. 다만, 외환위기와 다른 점은 외환위기 이전의 빚이 기업투자와 관련된 대출을 위주로 했다면, 다시 등장한 빚은 가계신용대출이라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여러 가지 우려가 제기되지만, 무엇보다도 이 ‘빚의 권유’가 광풍에 빗댈 정도의 재테크 유행을 배경으로 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국민들 주택구입 때 80%가 대출 의존 빚 광풍에 가장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곳은 시중은행들이다. 시중은행들은 펀드, CMA 등에 빼앗긴 수신 자금난을 극복하기 위해 주택담보대출과 기업·신용대출 등을 매년 강화하고 있다. 그나마 저축은행과 대부업체 등에 비하면 이자율이 낮긴 하지만, 여전히 빚에 허덕이는 국민들은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은행 전문가에 의하면, “우리나라 국민들이 집을 사거나 전세를 얻을 때 전체의 80% 가까이가 대출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제도권인 저축은행 역시 연 20~40% 가까운 고금리로 소비자들을 현혹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케이블 방송·인터넷·정보지 등을 통해 무분별한 마케팅을 강화하고 있는 대부업체와 불법 사채업자들이다. 대부업체의 경우, 러시앤캐시는 신입사원이 대부업체에 입사해 사회생활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에서 고객과의 만남과 회사소개에 이르기까지 총 5편을 시리즈로 방영한다. 또 리드코프, 원더풀, 산와머니 등은 소비자들에게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가기 위해 톱스타를 기용하거나 귀여운 캐릭터를 자체 제작해 쉴새 없이 방영하고 있다. 특히 심각한 것은 광고 내용의 상당수가 사실과 다르게 표현하거나 일부는 아예 허위 광고를 하는 경우다. 신문이나 정보지도 마찬가지다. 특히 무료로 주는 무가지 신문의 경우 대부업체 광고를 전면광고로 내세우고 있고, 생활 정보지의 30~40 % 이상은 대부분 불법사채 광고다. 하지만, 이는 인터넷이나 모바일 등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국내 포털업체를 검색할 경우 20~30여 개의 대부업체와 사채 관련업체 홈페이지가 등록되어 있고, 대부업체를 치면 고금리의 사채 홈페이지로 바로 연결되기도 한다. 또 하루가 멀다하고 대출을 소개하는 이메일이 가득 채워진다. 그렇다면 정말 빚을 갚는 일이 쉬워진 것일까? 정답은 ‘노’다. 서민들은 빚을 줄이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그만큼 씀씀이가 커졌기 때문이다. 개인소득에서 이자, 저축, 세금을 빼고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개인 가처분소득의 증가율은 외환위기 이후 9년 간 연평균 4.7%였다. 이전 9년 간의 평균치가 14.7%인 것을 감안하면 소득 증가세가 3분의 1로 둔화된 셈이다. 가처분소득 증가세는 꺾였지만, 가계부채 증가율은 외환위기 직전 9년간 평균 16.1%, 외환위기 이후 9년간 14.6%로 비슷했다. 한국금융연구원 관계자는 “소득 증가가 구조적으로 부진해지면서 지출을 조금만 늘려도 부채가 늘어나게 됐다”며 “외환위기 이후 빚의 악순환 고리가 구조적으로 정착됐다”고 진단했다. 또 다른 관계자 역시 “그런데도 빚을 ‘만만하게’ 여기는 인식이 확산되는 것은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빚, 또 다른 재테크? 지난달 여론조사기관인 메트릭스가 20~50대 성인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1%가 “수익이 예상된다면 빚을 내서라도 투자할 생각”이라고 대답했다. 회사인 안영남(35) 씨는 2003년 1월 은행에서 3억 원을 대출 받아 서울 강남지역에 4억8000만 원을 주고 산 43평형 아파트 값이 지난해 말에는 10억 원 가까이로 뛰었다. 과감하게 빚을 내서 ‘베팅’을 해 4년 만에 2배 가까운 수익을 올린 셈이다. 주택담보 대출을 받을 때 5%대였던 금리가 6%를 넘어서면서 매달 갚아야 할 원리금이 240만 원 정도로 월수입의 절반을 넘고, 올해부터는 종합부동산세까지 내야 한다. 지금이라도 아파트를 팔면 빚을 갚을 수 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 메트릭스의 조사 결과에서도 “부채를 갚을 능력이 있어도 굳이 부채를 바로 갚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32.6%나 됐다. 김 씨는 “다시 빚을 내서 세금을 내는 한이 있더라도 이 아파트가 재건축 대상이 돼 또 한 번 대박을 터뜨릴 때까진 버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부동산 가격 정체가 장기화되면 이번에는 대출을 받아 최근 활황인 주식시장에 뛰어들까 생각하고 있다. 주부 유모(59) 씨는 작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중소기업에 취직한 딸(25)만 보면 답답하다.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해외유학을 다녀온 것도 아닌 딸이 그 어려운 취업난을 뚫고 직장을 잡은 것이 기특하긴 하지만 요즘 부쩍 씀씀이가 커졌기 때문이다. 취직 후 생전 처음 만든 신용 카드를 조심조심 쓰던 것은 처음 몇 달. 점점 고급 핸드백이나 구두 같은 ‘명품’을 아무렇지 않게 할부로 사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돈이 모자라면 현금 서비스까지 받는 눈치다. 우연히 딸의 카드 대금 결제가 몇 번 연체되기도 하고 카드가 몇 개인지도 모를 정도로 많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최 씨의 걱정에도 정작 본인은 미동조차 없다. 메트릭스의 조사에서 연령대별 응답 실태를 비교해 보면, 50대는 빚에 대해 여전히 ‘보수적인’ 인식을 갖고 있지만 20, 30대에선 빚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인식이 더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감당하기 어려운 빚의 무게’는 저소득층에게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소득 수준에 따라 5개 계층을 나눌 때 최하위 계층(전체 가계의 20%)은 외환위기 이후 매년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올해 1분기(1∼3월) 가계수지 동향에서도 최저 소득계층의 적자율은 56.5%. 가처분소득의 56.5%만큼 돈을 더 써 고스란히 빚으로 떠안은 셈이다. 그러면서도 소비성향은 중산층을 따라간다. 서울대 이소정 박사(사회복지학)는 학위논문에서 저소득층의 소비성향(소비지출÷가처분소득)이 다른 계층을 닮아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박사가 저소득층 주부 12명을 심층 면담한 결과 “직장에서 정장을 입는 날에 나만 못 입으면 난처하다”며 옷을 사는 ‘사회적 관계 지출’이나 “밥만 먹고 일만 하고 살면 그게 사는 건가”라고 생각하는 ‘여가지출’, “힘든 건 마찬가진데 즐기고 외식도 하고 보자”는 지출이 눈에 띄었다. 저소득층의 지출에는 개인 교통요금(승용차 구입 및 유지비)과 통신비(휴대전화 구입과 통화요금)의 비중이 컸다. 빚을 내서라도 차와 휴대전화는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보편화됐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