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라’의 가출만으로 19세기 유럽 사회를 뒤흔들어 놓은지도 어언 120여 년. 그 동안 너무나 많은 연출가의 다양한 버전의 ‘노라’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더 이상 새롭고 혁신적인 해석이라는 게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미국의 저명한 연극상 오비(Obie)상의 심사평이 보여주듯이(“누가 이 작품이 리 브루어의 혁신적인 해석으로 인해 다시금 빛을 발할 수 있으리라고 짐작이나 했겠는가”) 리 브루어의 마법의 손에 의해 탄생한 <인형의 집>은 놀라운 상상력과 날카로운 풍자로 관객의 허를 찌른다.
■미국 현대연극에서 가장 혁신적인 연출가 리 브루어는 미국 연극계에서는 70년대 로버트 윌슨, 리처드 포먼과 함께 이미지 연극의 3대 연출가로 불리웠고, 이후 현재까지 미국 실험극의 지형도를 조형해 온 거장 연출가로서, 세계 연극계에서는 피터 브룩, 로버트 윌슨, 아리안느 므누슈킨 등과 함께 다문화적 요소들을 연극 속에 한데 융합하는 연극 스타일의 대표적인 연출가로 손꼽힌다. 그만큼 ‘리 브루어’는 연극계에서 크고 중요한 이름으로 여겨져 왔다. 올해 일흔 한 살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는 이 노 거장은 비범한 직관으로 ‘왜소증 남성들’과 이와는 대조적인 ‘키 큰 여성들’을 배치한 파격적 캐스팅이 단지 관객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하나의 트릭이 아니라, 성의 관습들에 대한 입센의 공격을 새롭게 상상해내고 혁신하기 위한 강력한 도구였음을 드러내며 ‘마법의 연출가’(뉴욕 타임즈), ‘아방가르드 연극의 전설적인 거장’(시카고 트리뷴)이라는 수식어를 다시금 증명해 보인다. ■거장이 선택한 19세기 고전 <인형의 집> <마부 마인의 인형의 집>은 2003년 뉴욕에서 초연된 이후, 노르웨이의 입센 페스티벌을 비롯하여 영국 에딘버러 페스티벌, 프랑스 파리 가을 페스티벌, 호주 브리즈번 페스티벌, 독일 슈트트가르트 국제연극제(Theater der welt), 싱가포르 페스티벌 등 전 세계에서 초청 받았으며 현재까지도 가장 활발한 투어를 하고 있는 리 브루어의 대표작이 되었다. 뉴욕 타임즈, 시카고 트리뷴(미국), 쥐트베스트 슈트트가르트(독일), 르 몽드(프랑스) 등의 유력지들은 일제히 “절대 놓쳐서는 안된다. 반드시 보아야 할 작품”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입센 원작의 <인형의 집>이라는 제목을 문자 그대로 무대 위에 펼쳐 놓은 세트 디자인과, ‘토어발트’를 비롯한 남성 배역에 130cm도 안 되는 키 작은 남성들을, ‘노라’를 비롯한 여성 배역에는 키 큰 여성들을 기용하여 남·여의 키 차이를 극대화한 파격적인 캐스팅은 커다란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단순한 파격이나 볼거리를 넘어 ‘이 시대에 반드시 보아야할 작품’으로 평가 받는 이유는, 모든 것이 여성에게 맞지 않고 억지스러운 ‘인형의 집’에 노라를 살게 함으로써 입센의 원작이 보여준 가부장적 제도들과 그 모순·취약성을 더없이 명확하게 상징화해냈기 때문이다. 세계를 놀라게 한 현대 연극계의 거장 리 브루어의 <마부 마인의 인형의 집>이 서울 역삼동에 위치한 LG아트센터에서 4월 3일~6일 공연을 가졌다. 이에 앞서 3월 31일 같은 장소에서 리 브루어의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리 브루어는 연극에 대한 열정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다. 입센의 원작은 보통 ‘중산층 가정의 비극’으로 불린다. 당신의 <인형의 집>을 한 문장으로 묘사한다면? “‘이 중산층 가정의 비극을 희극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것.’ 입센의 시대에는 완전한 희극아니면 완전한 비극만 있었지만, 요즘은 다르다. 이에 우리는 <인형의 집>에 풍자적인 시선을 더해 이를 비극적인 희극으로 만들었고, 정치적인 언급을 하기 위한 도구로 ‘브레이트의 소외효과’를 사용하기도 했다.” 많은 연출가들이 원작 <인형의 집>이 지닌 사회적 이슈를 부각시키고자 현재의 가정과 여성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당신의 <마부 마인의 인형의 집>은 19세기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며 현실적이기보다는 연극적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인형의 집>은 포스트 모던적인 작품이다. 이에 원작에 나오는 많은 요소들을 반어적인 관점에서 취하고 있다. 이 작품은 사회적인 이슈를 지니고 있지만, 나는 이를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19세기 연극적인 양식들을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연극성을 강조해서 반어적인 효과를 얻어내려고 했다. 더 나아가, 관객들에게 내 작품은 실제가 아니라 결혼생활을 극화한 것임을 주지시키고 등장인물 모두가 단지 정해진 역할을 연기하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했다.” 남성 등장인물에는 키가 매우 작은 남성 배우들을 기용해서 남녀의 키 차이를 극대화한 캐스팅이 기발하다. 이 콘셉트에 관해 설명해 달라. “이 아이디어를 브레히트로부터 얻었다. 브레히트가 1968년에 베를리너 앙상블에서 <코리올란>을 연출할 때, 귀족 영웅들을 군인들보다 키가 작은 사람들로 캐스팅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마치 만화 속 인물들처럼 보였다. 나는 이렇게 귀족계급을 풍자하려 한 브레히트의 아이디어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키 작은 남성 배우들을 기용하여 남녀의 키 차이를 극대화함으로써 가부장적 제도와 그 모순을 풍자하고자 했다.” 원작 대본을 거의 그대로 취했으면서도 부분적으로 다른 점이 눈에 띈다. 특히, 남성 배우들이 과장된 몸짓으로 독백을 하는 장면 등이 그렇다. 원작을 각색하면서 변형된 부분들은 어떤 것인가? “원작 대본을 90% 이상 그대로 사용했지만, 부분적으로 변형을 주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대화 장면들 중 일부를 독백 장면으로 바꾼 일이다. 나는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의 영화 <페르소나>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이 영화에서 한 사람이 말을 하고 한 사람은 듣는 장면이 있다. 이때 듣는 것이 말하는 일만큼이나 매우 중요하게 표현되고 있었다. 나는 내 작품에서 배우들이 관객을 마주하고 마치 대화하듯 직접 대사를 전달하는 모놀로그를 원했고, 이를 위해 몇몇 대화 장면들을 모놀로그로 변형시켰다.” 이 작품에는 다양한 공연 양식들이 혼합되어 있다. 이 혼합 양식에 대해 좀 더 설명해 달라. 모두 19세기의 공연 양식들을 선택해서 사용한 것인가? “19세기식 멜로드라마, 오페라, 인형극 등 다양한 양식을 끌어들인 가장 큰 이유는 이를 통해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 효과’를 끌어내기 위함이었다. 즉, 이 작품이 현실이 아니라 ‘결혼에 관한 연극’임을 주지시키고 연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에드워드 시대의 연출법, 고전 발레의 움직임, 현대의 리얼리즘 등도 익살스럽게 사용했다.” 마지막으로, 한국 방문 소감은 어떠한가? “한국 방문이 두 번째인데, 많이 기대되는 동시에 약간 두렵기도 하다. 한국 관객들이 포스트 모던적이고 반어적인 해석을 지닌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아직은 잘 모르기 때문이다. 2000년에 한국에 와서 한국 관객들을 만나보기는 했으나, 그때 소개한 작품 <하지 Haji>는 시적이고 추상적이긴 했지만 콘셉트적인 면에서 매우 명확했고 감정적으로도 익숙한 것이었다. 이에 <하지>와 다른 <인형의 집>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무척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