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와 국민 사이에 놓인 벽을 허물어 법이 일상에 스며들 수 있도록 하고 싶다.” 두꺼운 법학서적을 펼쳐보는 법학도나, 공판중심주의와 배심재판 등 언론에 등장하는 법률 용어가 궁금해 인터넷을 뒤지는 직장인에게나 법은 어렵고 무미건조하기만 하다. 국내에서 법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 만날 수 있는 책은 두꺼운 법학 교과서나 혼자서도 소송을 할 수 있게 해준다는 실용서들이 대부분이다. 저자 금태섭 변호사(40)는 법을 잘 모르고 법은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일반 독자들과 법을 가까이 묶기 위해, 검사 시절인 2006년 모 일간지에 <수사 제대로 받는 법>이라는 연재 칼럼을 기고하여 열렬한 호응을 받았으나, 안타깝게도 중도에 그만두고 말았다. 또한,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로 재직하면서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주최 배심재판에 검사로 참여하는 등 형사사법 개혁 작업에 관여한 바 있다. 2007년에 변호사로 변신한 저자는 EBS 시사 프로그램 <세상에 말 걸다>의 진행자로 활동하였으며, 현재 CBS 라디오 <뉴스레이다 스페셜-책과 문화>의 진행자로도 활약 중이다. 이번에 나온 <디케의 눈>은 법을 다루는 절차와 과정이 대중에게 가깝게 다가가야 한다는 저자의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책이다. 이 책의 이야기 18편에서는 일반 국민들을 비롯, 약자와 소수를 위한 법체계가 진정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디케의 눈’을 제목으로 한 이유가 궁금했다. 법의 여신 디케는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손에는 칼을 들었으며, 두 눈은 두건으로 가리고 있다. 저울과 칼은 오랫동안 법의 상징이 되어 왔지만, 두건으로 가린 눈은 주목받지 못했다. 그저 “공정하게 법을 집행한다”는 의미라고 전해졌을 뿐이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디케가 눈을 가린 이유에 대해 “법이 실제로 적용되는 현장에서는 오히려 법을 통해 진실을 찾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 혹은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제3자들은 각자 나름대로 진실을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실을 찾는 일은 맨손으로 물을 움켜쥐려는 것처럼 어렵고 때로는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디케가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은 진실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해도 틀릴 수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법은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위험하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4월 29일 오전,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저자 금태섭 씨의 일터인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 책과 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책 속에 나오는 ‘민철이 사건’을 담당하신 지 10년이 지났군요. 이런 미해결 사건은 법조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궁금합니다. 다음에 좀 더 잘 해야겠단 생각을 합니다. 풀지 못한 문제이기 때문에 미련이 남죠. 누구나 그럴 겁니다. 책에 쓴 내용 말고도 미해결 사건이 많은데…99년도에 있던 일이에요. 제 사건이 아니고, 후배가 초임이라 도와 줬죠. 한 아버지가 추운 겨울에 아들 둘을 데리고 낚시를 갔어요. 한 번도 낚시를 하러 간 적이 없는 사람인데 말이죠. 게다가 보통은 아무도 안 가는 장소에 자리를 잡고 두 아들에게 자리를 지키게 한 뒤 구멍가게에 갔어요. 형제 중 동생이 마침 개울을 보겠다고 내려갔고 한 아이는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차가 한 대 들이닥쳐 앉아 있는 아이를 뭉개 버렸죠. 동생도 함께 있었으면 같이 죽을 뻔 했어요. 근데 나중에 알아보니, 아이 아버지가 아이들을 낚시터로 데려가기 전에 아이들 사망보험을 들어놨더군요. 부모가 보통은 아이들 교육보험에 가입은 해도 사망보험 가입은 하지 않죠. 이야길 들어보니, 부부관계도 좋지 않아 이혼·결혼을 3번이나 반복했는데, 부인한테는 애인도 있었어요. 남편은 아이들이 자기 아이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을 했구요. 뭐 어쨌든, 아들이 죽고 난 뒤 보험금을 타서 좋은 차도 사고 아들 보험금을 낭비하면서 잘 살더군요. 정말 이 사건은 누가 봐도 의심이 가는데, 당시 경찰관이 아버지의 휴대폰을 추적했지만, 잘못된 번호를 추적하는 바람에 1년 정도 엉뚱한 수사를 하고 말았어요. 결국 범인은 못 잡았죠. 이런 일들로 자괴감이 많이 들어요. 우리가 조금만 더 잘 했으면, 억울한 사건을 밝혀낼 수 있었을 텐데…하고요. ‘유능한 변호인’은 역설적이게도 살인자도 무죄로 만드는 사람이라고들 알고 있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사건을 다룰 때 그런 유능한 변호인에게 ‘정의감’ ‘윤리’ 등의 가치가 앞서기는 하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대한변협(대한변호사협회)에 가서 초임 변호사들을 상대로 변론기법 강의를 했어요. 강의를 마치고 맥주 한 잔을 하는 자리에서 한 강사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의뢰인이 유죄인 것이 분명한데, 무죄라고 주장하면 변호사가 무죄를 주장해야 하나? 혹은 자신이 죽인 게 맞는데 증거가 없으니 무죄변론을 해 달라고 요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변호사가 윤리에 어긋난다고 들어주지 않으면, 피고인은 자기 변호사에게 진실을 털어놓을 수가 없어요. 변호사가 스스로 힘들면, 손을 떼면 됩니다. 일반인들이 혼동하기 쉬운 일이 나쁜 사건으로 변호받는 사람과 변호인을 동일시하는 일입니다. 변호사는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 도와주는 것이 사회 공정성을 위해서 맞는 일입니다. 미국에서 ‘배심원제도’를 도입한 이유 중 하나가 ‘일반 시민도 법에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기 쉽도록 하는 데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의 법률제도는 반성할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사법제도는 매우 우수합니다. 그런데도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는 이유가 도대체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궁금해서 법정에 가도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해하기 힘들어요. 검사·변호사가 잘못하는 부분도 있지만, 지금까지는 효율에만 치중했기 때문입니다. 서로 뻔히 아는 이야기를 거듭 할 필요가 없죠. 판사도 “나도 기록 보면 뻔히 알지 않느냐”고 말하거든요. 배심재판을 국내에서도 시행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부작용이 있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배심재판을 하게 되면, 법을 접하지 못했던 일반인을 상대로 변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말이 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재판에서 이길 수 있죠. 이를 계기로 사법관행이 많이 바뀌리라고 생각합니다. 배심재판은 2008년부터 국내에서도 시행되고 있지만, 권고적 효력만 있기 때문에 반드시 배심원의 결정을 따르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5년 뒤부터는 제대로 된 효력을 갖도록 계획되어 있습니다. <디케의 눈> 1장의 ‘유전자 감식과 오판’을 보면, 범죄를 당한 사람도 헷갈리는 사건을 직접 목격하지 않은 사람이 판단하는데 대한 고충이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난해한 사건이 국내에서도 많이 발생하겠죠? 실제로 억울하게 처벌된 사람이 많아요. 특히, 유전자 감식이 나오기 전에는 억울하다 해도 어쩔 수 없었어요. 예전에 어떤 경찰관이 용의자로 몰려 잡혀간 일이 있어요. 이 경찰관은 근무시간에 몰래 나가 애인과 자고 왔는데, 애인이 밤새 죽은 거죠. 경찰 동료들이 사실을 알고 이 경찰을 불러 앉혀 놓고 “큰일 났다. 당신 애인이 죽었다. 자백이라도 해야 사형이라도 면하지 않겠느냐”고 말해, 겁에 질린 이 경찰은 “내가 죽였다”고 자백했죠. 검찰에 가서는 부인을 해 기소됐지만, 1심에서 유죄, 항소심에서 유죄, 아무도 이 사람이 범인이 아니라고는 의심하지 않았죠. 그런데 대법원까지 가니 진범이 잡혔어요. 지나가던 강도가 죽인 거죠. 사건을 담당한 검사도 강력사건에서 내로라하는 검사였는데 말이죠. 나중에는 이 사건을 연구자료·교재로 삼게 됐죠. 2장의 ‘경찰차 뒷 좌석에서 생긴 일’을 보면, 목격자 진술, 피의자의 자백에도 당시의 상황과 수사관·경찰관의 말투 등 뉘앙스에 따라 판결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객관적이어야할 법이 주관적으로도 느껴지는데요. 따라서 수사과정에도 반드시 변호인이 참여해야 합니다. 인간이 가장 약할 때 거든요. 미국 판결문을 보면, “수사받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나와 있어요. 변호인 선임을 예전에는 재판과정에서만 필요하지 않나 했는데, 수사과정에서 자백이 많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그때가 가장 변호인이 필요한 때 같습니다. 법도 주관적인 면이 좀 있어요. 선의를 갖고 있어도 독자적인 결정을 하게 되면 선입견과 편견이 작용하거든요. 사람이 모든 일에 공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죠. 검사·변호사·판사의 역할을 나누는 이유입니다. 옛날에는 원님이 경찰·변호사·검사·판사 역을 도맡아 억울한 일이 많았죠.
이 책은 머리말에도 밝히고 있듯이, 재밌고 쉽게 쓰여져 법에 대한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읽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반면, 사례가 대부분 외국의 것이어서 국내의 실정과 맞을까 싶었는데요. 국내의 사례를 많이 안 쓴 이유는 사실 검사로 일하면서 겪은 사건은 공개하는 일이 금지돼 있어서 쓸 수가 없었어요. 또, 판결문이나 사건기록도 국내에서는 비공개죠. 그래서 외국 사례를 쓰게 됐습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는 탈주범 지강헌이 남긴 명언인데요. 법은 돈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유리하게 작용하는 걸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거액의 변호사를 쓸 수가 없고, 검찰에 수시로 불려 다니기도 힘든 실정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법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일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금 변호사를 많이 늘린 이유도 변호사끼리 선의의 경쟁을 하도록 하기 위함인데, 우수한 변호사는 살아남고 그렇지 않은 변호사는 도태됩니다. 우수한 변호사가 돈을 많이 버는 일은 명약관화합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 유능한 변호사를 쓰죠. 하지만, 지강헌이 이런 말을 할 때보다는 훨씬 좋아졌어요. 특히, 형사절차에 관여하게 된 사람은 돈이 없어도 최소한의 변론을 받을 수 있게 보장해 주고 있습니다. 또, 국선 변호의 사건범위도 늘어났죠. 예전에는 변호사 수도 적고 형사절차도 발달하지 못해 국선 변호인은 잘 봐달라는 얘기 정도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국선 변호인으로 전담해 일하는 사람도 많고, 굉장히 열성을 가지고 일합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 우선 공익활동을 늘려야 합니다. 법의 도움을 받기가 어려운 사람을 위해 현재도 변호사 협회·단체에서 많이 돕고 있지만, 좀 더 제도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습니다. 2006년에 모 일간지에 <수사 제대로 받는 법>이란 칼럼을 연재하셨는데요. 독자들에게 수사 잘 받는 방법을 말씀해 주신다면요? 또, 국내 수사관행의 문제점도 이야기해 주십시오. 사실 2회분까지 쓰고 그만두게 됐는데, 가장 중요한 일은 어떤 경우에도 변호인을 선임하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먼저 변호인과 상담하고 변호인의 충고를 듣고 해야 합니다. 국내 수사관행의 문제점은 변호사 선임을 하기 힘든 사람들에게 수사 단계에서 국선 변호인을 선임해주는 일이 제대로 돼 있지 않은 실정입니다. 강압수사나 직권남용 등의 문제도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고문을 하거나 사람을 2~3일 넘게 가둬두고 수사하는 등의 관행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꼭 때리거나 위협을 주지 않더라도, 수사를 받는 사람은 몇 시간씩 조사를 받는 동안 위축되기 마련입니다. 허위자백을 하는 경우도 있죠. 이는 진실을 발견하는 측면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변호인의 도움을 좀 더 많이 받을 수 있도록 개선되고, 선진국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품격 있는 수사가 되어야 합니다. 끝으로, <디케의 눈>은 어떤 책입니까? 제 책이 잘 썼거나 컨텐츠가 많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감히 재밌다고는 말할 수 있어요(웃음). 제 생각에 이 책은 “로스쿨 가는 사람들이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로스쿨 가고 싶다는 30대 직장인이 저한테 “지금 직장을 때려 치우고 변호사가 되면 잘 살 수 있을까?”라고 물었습니다.하지만, 돈을 잘 벌거나 잘 사는 것은 2차적인 문제입니다. 법도 직업의 한 분야이니만큼 우선 자신이 법에 흥미를 갖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흥미를 느낄 수 있다면, 몇 년이 걸리더라도 한 판의 바둑을 둔다 생각하고 노력할 수 있거든요. 저는 법을 아주 좋아하고, 법이 아주 흥미진진한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일반인도 법에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재밌게 쓰려고 노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