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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익 vs 이명박

이용익, 일제시대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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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9호 김원섭⁄ 2008.08.13 09:53:38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공약이었던 재산 사회환원을 곧 시행한다고 한다. 이 대통령의 재산 사회환원을 듣고 구한말 때 고려대학교의 창립자인 이용익 선생이 문득 떠오른다. 이용익 선생은 일제시대 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독립운동가로 전해지고 있다. 이용익 선생은 구한말의 걸음을 빨리 걸었던 덕분에 출세길이 열린 사람이다. 그는 함북 명천 사람으로 신장 6척(180cm), 잘생긴 용모의 쾌남아로서 17~18세 때 함남 갑산금광에 들어가 주먹 만한 금괴 여러 개를 파내 등에 짊어지고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서울에 올라와 고종께 바쳤다. 고종께서는 처음 보는 시골 사내지만 말에 거짓이 없고 꾸밈없는 그 풍격이며 기골이 장대한 풍채를 보고 국가에 유용한 인물이라 생각하여 관직을 주었다. 때마침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싸움이 있어 대원군이 황후를 쫓자 이 변고를 피하고자 황후가 장호원에 피난하였다. 이용익 선생은 민영익과 협력하여 사태를 수습하고, 단신으로 장호원 산곡에 내려가 황후를 모셔다가 창덕궁에 들게 했다. 이 일이 있은 뒤 고종은 이용익 선생을 더욱 신임해 군수, 북방부사 등 관직을 제수했다. 중앙 정계에 입성한 이용익 선생은 전국 금광의 세무감독사가 되었고, 나중에는 영화가 극에 달하여 내장원경, 원사부(元師府), 검사총장(檢事總長) 등 중임을 맡게 되었다. 이용익이 군부대신으로 있을 때 러일전쟁이 터졌다. 그때 일본 공사 하야시와 헌병사령관 노즈는 이용익을 군함에 실어 도쿄로 보냈다. 그것이 1904년 2월이다. 도쿄에 간 이용익 선생은 약 1년 동안 열심히 교육제도와 문화를 시찰하고 돌아왔다. 귀국할 때 그는 사재 10여만 원을 던져 서적을 사가지고 돌아와서 보성관을 만들고 보성전문(지금의 고려대학교)을 창립하였다. 이용익 선생은 을사늑약에 반대하다가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망명길에 올랐다. 1905년 8월 17일 한밤중에 고종이 하사한 금괴를 여비로 삼아 인천에서 중국인 목선을 타고 상하이로 가서 그곳에서 배를 갈아타고 프랑스로 떠났다. 프랑스를 경유해 간신히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을 때, 일본에서 파견한 자객 세 명의 총격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 겨우 몸을 추슬러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나왔다가 1907년 1월 20일 세상을 뜬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지난 60년대 보릿 고개 때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면서 학비를 벌며 어렵게 대학을 졸업한 면에서는 이용익 선생과 닮은 꼴이다. 특히, 이 대통령은 이용익 선생이 설립한 대학을 나왔고, 대학 때 한일수교 반대에 선봉에 섰던 점에서도 이용익 선생과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대통령의 350여억 원에 달하는 재산이 제 2 이용익 선생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창출할 수 있는 문이 되기를 바란다. 특히, 이 대통령의 재산 사회환원은 불우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는데 쓰인다고 하니, 이용익 선생의 고려대 설립정신과도 상통하는데다가, 나아가 빌게이츠가 추구하는 영재 육성에도 딱 맞아 떨어진다고 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대중 도서관을 설립한데 이어 노무현 전 대통령도 기념관 설립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이들 재단은 자선단체인 ‘클린턴 재단’ ‘카터재단’과는 달리 정치성이 강한 재단들이다. 우리나라는 빌게이츠 같은 한 사람만 배출한다면 나라를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의 환원 재산이 이런 인재를 양성하는데 쓰여 대선공약인 보잉 747이 오대양을 누비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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