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7일부터 내년 1월 4일까지 대학로 두레홀 2관에서 공연되는 연극 <밀키웨이>. 독일의 희곡작가이자 배우 겸 연출가 칼 비트링거(1922~1994)의 1955년 작 <은하수를 아시나요>를 원작으로 한 <밀키웨이>는 2차 대전 중 실종됐던 한 독일병사가 고향으로 돌아와 겪는 혼돈과 상실감에 대한 이야기를 국내의 실정에 맞게 번안·각색한 작품이다. 70년대 후반 베트남전 직후의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밀키웨이>는 극중 참전 후유증을 앓는 환자가 자신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정신병동 의사와 함께 연기하는 ‘극 중 극’ 형식의 2인극이다. 이때, 실제 관객은 정신병동의 환자가 되어 배우와 함께 연극을 만들어 간다. 130석의 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이 작은 규모의 연극이 관심을 모으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2006년 3월부터 2007년 5월까지 문화체육관광부(구.문화관광부) 장관직을 지낸 김명곤(55·金明坤)씨가 오랜만에 연출가의 면모를 보이는 복귀작이기 때문이다. 11월 18일 오후 <밀키웨이>의 저녁 공연을 몇 시간 남겨두고 극장에서 김명곤 연출을 만났다. 약속된 시간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들어서는 김 연출의 모습에서 철두철미한 장관의 모습이 오버랩 됐다. 하지만, 자리에 앉아 기자를 보며 미소 짓는 표정에서는 따뜻한 연출가의 향기가 풍겨왔다. ■ 소규모 연극 <밀키웨이> 연출가 연극 <밀키웨이>는 김명곤 연출이 서울대 독어교육과 재학 중 스승인 이동승 교수가 번역한 <은하수를 아시나요?>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아 30년 넘게 품고 다닌 작품으로 알려졌다. <밀키웨이>를 복귀작으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 김 연출은 11월 7일 <밀키웨이> 시연회 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주고 싶다”고 전했다. <밀키웨이>에 대한 관심은 곧 연출님에 대한 관심이라고 생각되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동안 오랜 시간 공직에 있다 돌아와 올리는 첫 작품이다 보니, 관심을 많이 받는 것 같습니다. 본래 배우와 연출 활동을 꾸준히 해왔는데, 아무래도 국립극장장과 장관 일을 하는 동안 많은 분들이 제가 연출가라는 사실을 잊었나 봅니다(웃음). <밀키웨이>에 대한 반응은 어떻습니까? 처음에는 대학로를 찾는 젊은 관객들하고 이 작품이 과연 통할까. 그러기에는 작품이 너무 무겁지 않을까 고민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습니다. 관객들 스스로가 재밌는 부분을 찾으면서 보려하고 리뷰도 적극적으로 올려주고 있구요. 물론 작품을 만들면서 젊은 관객과의 교감을 위해 보완한 부분도 상당수입니다. 젊은 세대로부터의 인기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연극적인 요소도 작용하는 한편, 정체성의 문제를 다룬 주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현실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순수한 영혼을 가진 젊은이의 아픔을 관객들도 공감하는 것 같습니다. 30여 년 간 가슴 속에 담아둔 이 작품을 이제야 올리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제가 청춘 시절 이 작품 보고 감동한 부분은 계속되는 방황과 상실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여전히 꿈을 꾸는 젊은이의 모습이었습니다. 지금 젊은 세대에게도 같은 감동 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에 연극화했고, 젊은 시절의 순수한 세계를 다시 찾고 싶은 개인적인 소망도 작용했습니다. <밀키웨이>의 가장 큰 재미는 꼽는다면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주인공 청년이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무대를 이끌어 나가는 장면입니다. 또한, 연극적인 요소를 가미해 담은 풍자적인 장면도 있습니다. 모든 장면 마다 한 명의 배우가 여러 인물로 변신해 주인공과 부딪히는 광경도 재밌습니다. ■ 예술인→국립극장장→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김명곤 연출은 <완판 창극 춘향전> <민족의 소리 한마당> <태백산맥> <서편제> 등 영화와 드라마, 연극 등에서 연기자·연출가·극작가 등 다방면으로 활약한 예술인이면서, 1986년부터 1999년까지 극단 ‘아리랑’의 대표를 지낸 경영인이다. 그는 이후, 2000년 책임운영기관으로 체제를 바꾼 국립중앙극장의 극장장을 맡아 ‘개방형 임용제’ ‘목표 관리제’ 등의 개혁을 주도했으며, 2006년 3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취임한 이후, 전통예술팀을 신설하고 문화원형콘텐츠 사업과 ‘한스타일’ 브랜드 육성사업 등 전통예술진흥에 역점을 두고 문화정책을 펼쳤다. 공연계의 불황은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무용이나 국악 등 순수예술 분야는 특히 어렵다고 합니다. 국악인으로서 느끼는 점과 국악의 발전을 위해 국악인들이 꼭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다면요? 저는 ‘국악인’이라기보다는 국악과 전통예술을 현대화하는 예술작업을 해온 사람입니다. 국악이 제대로 발전하려면, 초등학교 때부터 기존 교과서에 실린 국악만이라도 제대로 교육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악인들은 현대 대중인들과의 호흡과 재창조, 대중화를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실제 국악은 예술적 감동도 있고, 좋은 점이 많은데도 일반인으로부터 소외되고 있습니다. 이를 해소시키기 위해서는 TV, 라디오 등 매스미디어에서도 국악을 지나치게 소외시키지 말고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국내 창작극인 <사랑은 비를 타고>를 제외하고, 우리나라 창작극이 <캣츠> <시카고> 같은 외국 유명 작품처럼 해외에서 번안이 되고 공연되는 일이 드문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외국에서 이미 흥행한 소위 히트한 작품들을 수입하고 번역·공연하는 일이 주요한 추세이기 때문에 여전히 창작극은 열세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창작극 작업은 성공률도 낮고, 극작가·연출가·프로듀서 등 창작자들의 힘도 10배는 더 듭니다. 때문에, 창작 작품 과 인력에 대해서는 각별한 지원과 관심이 필요하구요. 정부는 물론 기업이나 여러 사회단체에서도 창작 작품의 개발과 제작·공연에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합니다. 국립극장장과 문화부 장관직에 있을 때 호평을 받은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공직의 최고 자리에 있을 때, 특별히 최우선으로 삼았던 기준이 있었습니까? 고객중심입니다. 국립극장은 ‘국민들의 극장’이란 인식을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국민이 극장을 찾게 만들까 고민하던 차에, 대중들의 요구사항을 받아 극장을 새롭게 리모델링하고, 관객들이 원하는 작품을 개발하는 등 관심의 초점을 모두 국민에게 집중시켰습니다. 장관으로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문화정책과 지원 사업들이 어떻게 하면 문화를 향유할 고객인 국민에게 보다 더 많은 혜택을 주게끔 할 수 있을까하고 말이죠. 국립극장장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있을 때, 미처 펴지 못한 정책이 있습니까? 물론 많죠. 국립극장장이었을 때는 국립극장을 좀 더 세계적인 극장으로 만들기 위한 ‘제2의 국립극장’ 건립 계획을 세운 적이 있습니다. 남산에 부지를 마련해 청사진을 갖고 발전계획까지 다 만들었는데, 결국 못 만들었죠. 허허. 문화부 장관일 때는 한국 전통문화를 대중화·산업화하기 위해 ‘한 스타일’이라는 명칭의 사업을 구상하고 기초 준비를 마쳤지만, 더 크게 발전시키지 못해 많이 아쉽습니다. 공직에서 연극인으로 돌아와 새롭게 발견한 공연계의 문제점이 있다면요? 좀 더 화려해지고 볼거리도 많아진 반면, 지나치게 상업화되고 흥행위주의 공연 문화가 형성된 것입니다. 인기에 밀려 연극의 진지함이나 본질을 성찰하는 작품 활동이 많이 없어져 안타깝습니다. 오락으로서의 연극과 교양으로서의 연극, 교육으로서의 연극, 사회적 참여로서의 연극 등 연극의 기능은 다양한데, 지나치게 오락으로서의 연극만 부각되고 있습니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관장들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는 사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약속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물론, 그들에게 정말 물러나야 하는 사유가 있다면 교체는 당연한 일이지만, 단순히 전 정권에서 일한 사람들이니 바꿔야 한다는 논리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 평생 꿈을 향해 달린 인간 김명곤 서울대학교 독어교육학을 전공한 김명곤 연출은 ‘뿌리깊은나무’ 기자와 배화여고 교사를 거쳐 1983년 영화 <바보선언>을 통해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그는 이후 극단 경영자로, 국립중앙극장 극장장으로, 문화체육관광부의 장관으로 문화계를 거느렸다. <밀키웨이> 연출에 앞서 그는 올 초 KBS 드라마 <대왕세종>에 출연하면서 연기자로 안방극장을 노크하기도 했다. 기자와 교사, 국악인, 연극인, 연출가, 공무원, 또 다시 연출가 등 많은 변신과 쉽지 않은 도전을 시도했는데, 이런 도전을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술에 대한 원대한 꿈과 열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적인 명작, 불후의 명작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20대 때 가졌는데, 이를 위해 배우와 연출을 하게 됐고, 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작품도 썼습니다. 그러다 극단을 경영하고 소극장을 세우고, 이런 일들이 기반이 되어 국립극장장과 문화부장관 직도 맡게 된 것 이구요. 저는 작품을 만드는 창작자면서, 창작에 관계된 모든 일에 흥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일단 몸을 사리지 않고 뛰어드는 성격입니다.
극장장, 장관 등 주목받는 자리에 있다 일반 연기자로 서기도 했는데, 주위 반응은 어땠습니까? 저야 뭐 오래전부터 연기를 해왔고 촬영장에 몸담아온 사람이기 때문에 기분이 좋지만, 다른 배우들은 처음에는 절 어려워하고, 낯설어 하고 또, 저를 어떻게 대해야 하나 신경을 쓰는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신경 쓰지 말고 배우로 대하라고 말했죠(웃음). 따님이 공연 경영 등 형태는 다르지만, 부친을 따라 소위 ‘광대’일을 시작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아주 기분이 좋고, 뿌듯합니다. 물론 이쪽 일이 안정되지 않고 불안하고 어렵기 때문에 부모로써 걱정은 되지만요. 하지만, 딸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제가 의지가 될 수 있고, 저 역시 딸에게 의지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서편제>로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이후 명예로운 일이 많았던 것 같은데, 연출님께 있어 <서편제>는 어떤 의미입니까? 무엇보다 제가 오랫동안 좋아하고 추구했던 전통음악인 판소리를 영상으로 만들 수 있어 좋았습니다. 대중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보였다는 점에서 20여 년 연극을 해오면서 제가 추구했던 결실을 맺은 것 같은 기분도 느꼈습니다. 그 당시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판소리로 영화를 만든다 할 때 ‘모두 미쳤다’ 했거든요. 이후로 명예로운 일이 생긴 것은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구요. <서편제>가 스스로도 인정하는 대표작입니까? 누가 생각해도 저의 대표작이라 생각하겠죠. 하지만, 솔직히 <서편제> 때문에 저의 다른 작품들은 가려졌습니다. 모두들 저를 <서편제>만 하는 사람으로 알더군요(웃음). 최종적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요? 막역하지만 제가 만족할 만한 불후의 명작을 남기는 일입니다. 배우든 연출가든 작가든 아무래도 좋습니다. 죽기 전에 스스로 “이 정도면 됐다!”라는 작품만 만들면 됩니다. 언제 이룰지도 또 못 이루고 죽을 지도 모르지만요. 허허. CNB저널이 창간 2주년을, CNB뉴스가 창립 4주년을 맞이했습니다. CNB저널과 뉴스의 발전을 위해 격려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인터넷 언론으로써 시대를 앞서가는 좋은 뉴스를 많이 만들어내고 독자들에게도 사랑받는 신문이 되기를 기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