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매 순간은 신성하다. 나는 항상 이런 생각을 한다. 사고를 통해 장애를 입었지만 다시 재기해 활동하는데 필요한 최소의 부분은 하늘이 가져가지 않았다고. 나는 언제나 운이 좋았다. 지금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나는 하늘이 내린 행운을 누리고 있다.” ‘한국의 스티븐 호킹’이라고 불리는 서울대학교의 이상묵 지구환경과학부 교수. 그에게 ‘스티븐 호킹’이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는 그가 휠체어를 타고 첨단 보조기구에 의존해 학술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우리나라에는 ‘한국의 스티븐 호킹’이 있었을 정도로, 장애를 갖고 있는 학계 인사들에게는 흔히 이 별명이 대명사처럼 따라다니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이 교수의 전유물이 된 듯 보인다. 이번 기사에서는 장애 극복 케이스의 모델로 꼽히는 이 교수와 인터뷰를 가졌다. 언론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자의 이름으로 대체돼 불리는 것에 대한 기분을 묻자, 이상묵 교수는 먼저 자신과 스티븐 호킹 박사의 차이점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 일단, 스티븐 호킹 박사는 선천성 유전질환인 루게릭 병으로 장애를 얻었고, 이 교수는 질병이 아니라 후천적 요인인 자동차 사고로 장애가 생겼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또, 호킹 박사는 말을 할 수 없지만, 이 교수는 전혀 어려움 없이 말을 통한 의사소통을 한다. 같은 점을 굳이 찾는다면, 자연과학을 연구한다는 부분을 공통점으로 꼽을 수 있다. ■“내가 스티븐 호킹? 진짜 호킹 불쾌할 수도” 이상묵 교수는 ‘호킹’이라는 별명이 그리 거슬리게 들리지는 않은 듯해 보인다. 딱딱하고 지루한 과학 서적을 베스트셀러에 올릴 만큼 뛰어난 설명력과 학술 식견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를 높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다치기 전에 스티븐 호킹의 책을 읽었는데 천문학의 우주의 원리 상대성 이론 등 어려운 내용을 책으로 써서 3년간 베스트 셀러를 만들었어요. 과학도에게도 이해하기 힘든 과학을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쉽게 썼다는 얘기거든요. 웬만한 필력과 식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죠. 그런 면에서 스티븐 호킹은 대단한 과학자입니다. 오히려 스티븐 호킹 박사가 저와 비교된다는 점을 불쾌해 할 수도 있죠.” 그는 척추 4번 밑으로는 신체를 전혀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장애인 보조기구를 사용한다. 빨대를 불고 빠는 식의 입력장치인 인테그라 마우스와 여러 각도로 신체를 굽혀주는 고급 전동휠체어 등이 그것이다. 욕창을 방지하기 위해 인터뷰 내내 의자의 각도를 높였다 낮추는 일을 반복하기도 했다. 간병인의 도움 없이는 물도 혼자 마실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장애인 과학자’가 아닌 ‘과학자’였다. 이상묵 교수는 최근 ‘0.1그램의 행복’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을 판매하면서 생기는 모든 수익은 ‘서울대 이혜정 장학금’에 기부된다고 한다. 또, 출판사에서도 권당 판매수익에서 1000원씩 장학금에 기부하고 있다. 그는 ‘0.1그램의 행복’이라는 책제목에 대해 아무 의미 없다고 담백하게 털어놓는다. 출판사에서 제목을 잘 뽑아야 책이 잘 팔린다고 해서 편집부에 제목 정하는 일을 맡겼다는 것이다. 책 제목을 두고 “인상적”이라고 칭찬한 독자도 있고 “0.1그램에 대한 내용을 당최 찾을 수 없다”며 불평을 늘어놓는 이도 있었다고. 한 언론사에서는 이 교수에게 0.1그램의 횡격막이 남아 살 수 있었던 데서 그 의미를 찾기도 했다. ‘0.1그램의 희망’을 장애 극복기로 오인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책을 읽어보면, 과학자가 되기 위한 도전과 소신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사고 6개월 만에 뜻밖의 도움으로 교수 재임용 책에 대한 질문을 하자, 이 교수는 차량 전복사고를 당했던 2006년 미국 캘리포니아 야외지질조사 당시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저는 당시 혼자 다친 줄 알았어요. 차 안에 나를 포함해 7명이 탔는데, 사고 후에 모두가 나만 다쳤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다친 게 하늘의 뜻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사고 후에도 대학교수를 계속 할 수 있다는 사실과 혼자 다쳤다는 사실이 정말 오묘한 조화였죠. 하지만 혜정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는 많이 실망했어요. 교단에 복귀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러다 저와 일면식의 연고도 없던 서울대 이건우 교수님이 1억 원 가량의 학술상 전액을 내게 기부하겠다는 거예요. 그때부터 주변 교수님들이 강단에 설 수 있도록 도와주셨어요. ‘빨리 당신만 오길 기다리고 있다’는 격려를 해오는 이도 있었고요. 학교 어떤 상황이더라도 날 보호하겠다고 돌아선 거예요. 그래서 사고 후 6개월 만에 금의환향 하게 됐어요. 결국 1억 원이라는 이 교수의 지원금이 서울대 교수라는 직업을 준 것이나 다름없어요.” MIT-우즈홀 공동박사과정을 통해 박사학위를 받은 이상묵 교수가 서울대 부교수로 임용될 2003년 12월 당시에는 학교 측의 러브콜이 극심했다. 그를 임용하기 위해 공채를 4번 하고 27명의 지원자를 떨어뜨리기도 했다는 것. 수많은 배려와 환영 속에 교수로 채용됐던 이 교수였지만, 그는 2007년 1월 재임용 당시를 더 의미 깊게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는 사고를 당하고 나서야 인생의 참 의미를 깨달았다고 한다. 당시 수차례 사경을 헤매면서 더 살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베풀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제가 다쳤을 때 임사체험(臨死體驗) 체험을 했거든요. 맨 처음에 다쳤을 때 ‘상묵, 너 지금 공경에 빠졌어. 이런 것 잘 이겨내잖아. 해봐. 할 수 있어’라고 계속 자기암시를 했죠. 하지만 이번엔 제대로 빠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늘이 갑자기 저를 삶이라는 무대에서 끌어 내리길래 하늘에 얘기했죠. ‘난 더 살수 있을 줄 알았는데. 각본이 이렇게 끝나지 않아. 감독 불러봐’라고 불만을 얘기 했어요.…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있어서 여기까지 왔어요. 그러면서 본의 아니게 실수 한 것이 없는지, 피해는 주지 않았는지 반성하게 되더라고요.” 철없던 서울대 학생, MIT에서 철들다. 그도 한때 공부를 못할 때가 있었다. 유년기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보내다가 우리나라 중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에는 약 70명 중 48등을 한 적도 있고, 대입에 실패해 재수를 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노력파라는 주변 평가에 대해 “내가 아는 사람 중 노력파가 아닌 사람은 없다. 나도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해양학이라는 명확한 꿈이 있었다. 이 때문에 고등학교와 재수 시절에 방황을 할 겨를도 없었다. “당시에는 해양학이 뭔지도 모르고 도전을 했죠. 막상 해양학을 공부하니까 ‘내가 이를 위해 목숨을 걸었나’ 싶을 정도로 회의가 들 때도 있었어요. 학문을 안 것은 대학에 들어오고 유학을 가서 인생의 계획을 점검하면서 알게 됐죠.” 그도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3학년까지는 친구들과 술 먹고 놀기 좋아하는 보통의 학생이었다. 숙명처럼 다가왔던 해양학을 향한 의욕도 점차로 사라져, 아버지가 조언하던 대로 한의사가 됐으면 하고 후회하기도 했다. 그의 책 속 표현대로 “해양학이 재미있었지만 뭔가 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막연한 부담감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MIT에 입학하고 나서부터 학문을 대하는 자세가 바뀌었다고 한다. 특히, 그곳에서 만난 한국 유학생들이 그에게 많은 교훈을 던졌다. “MIT에는 대학원생이 4500명인데, 이중 한국인이 150명이고 120명 서울대 출신이에요. 한국에 있을 때 다 술 먹는 얘기가 전부였는데, 유학을 가니 학업과 연구에 관한 얘기를 많이 했어요. 그런 한국 유학생에게 많은 것을 배웠어요. 지금 가르치는 대학원생들을 보면서 ‘얘네도 공부 안 하다가도 MIT에서는 하겠지? 나도 했는데’라는 생각을 해요. 바보도 거기 갖다 놓으면 잘 합니다. 학교 내에서 경쟁의식이 상상 이상으로 치열하거든요. 우리도 미국 같은 면학분위기를 만들어주지 못해서 문제예요.”
■ “장애인도 IT 생활할 수 있어야” 그는 여러 장애인 보조기기 중 IT기술로 이루어진 보조기구에 관심의 비중을 두고 있다. 그는 인테그라 마우스와 음성입력이 가능한 컴퓨터를 작동해 강의 준비를 하고 전 세계의 동료 친구들과 e메일로 의견를 주고받고 있다. 그는 보조공학기기와 IT기술의 도움을 받으면 장애가 있어도 얼마든지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강조한다. 현재 컴퓨터의 음성인식 프로그램은 영어와 일본어·중국어 밖에 인식을 못한다. 따라서, 한국말 이외에 사용이 힘든 장애인의 경우 컴퓨터 장비를 갖추어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가 없다. 또, 일반 기업들에서 시장성이 약하다는 이유로 음성인식 기기의 개발에 노력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저 같은 학자는 영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지만, ‘나랏말싸미 미국과 달라’ 일반 장애인들은 사용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죠. 또, 원래 시장이 적다고 일반 기업체에서 개발을 꺼리죠. 일반인들은 음성 인식을 이용할 수가 없어요. 이를테면, 네비게이션에 남대문이라고 얘기했는데, 기계가 남영이라고 인식을 하면 일반인들은 답답해 하죠. 오히려 마우스와 키보드가 일반인에게 훨씬 유용한 입력수단인 거죠. 하지만 손발을 사용할 수 없는 장애인에게는 유용하죠. 그렇다보니 시장성이 떨어지는 것이죠.” 그는 같은 학교 이건우 기계항공공학부 교수와 ‘서울대 장애우 의료장비 개발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이상묵 교수와 “장애인들도 IT 기술을 통해 정상인처럼 생활할 수 있을 때에야 한국이 진정한 IT 강국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개발센터에서는 한국말로 입력했을 때 알아듣는 컴퓨터 등 이 교수가 필요한 의료장비뿐 아니라 다양한 재활관련 기구를 연구·개발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 교수의 몸은 연구실에 머물러 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바다와 육지의 곳곳을 누비는 과학자이다. 사고 이후로 연구현장에 나간 적이 없지만, 머지 않아 육지에 한해서는 실지 연구를 재개하고자 하는 마음이 크다. ■ “현장에 직접 나가 연구하고 싶다” 그는 장애를 만나기 전 평범한 조교수였다. 하지만, 장애를 겪고 나서부터는 ‘장애인들의 희망’ ‘우리나라 대표 지구과학자’ 등 직함이 불어났다. 그러다 보니, 만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눈코 뜰새 없이 바빠졌다고 한다. 빗발치는 언론의 취재요청과 각계에서 마련한 스케줄로 앞으로도 연구할 시간이 생길지 걱정이 되기도 하다. “2억년의 지구를 연구해 45억년간 지구가 어떻게 변했는가 유추하고 비슷한 행성도 어떻게 진화하는가를 연구해요. 95페이지가 없는데 상황에서 5페이지를 보고 지난 스토리를 유추하는 것이죠.” “아직은 학자로 남고 싶어요. 지금은 힘들지만, 앞으로는 현장에 직접 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해양연구도 배를 탈 수는 없어도 인터넷을 통해 연구가 가능한 시대가 됐어요.” “연구할 시간이 앞으로도 안 생길 것 같아요. 그게 고민거리예요. 내 목표는 학자로 성공하는 것이었는데, 머리가 나빠서 하늘이 봉사하며 살라고 다른 길을 열어 준 것 같아요. 내가 억울하게 생각하는 부분이기도 해요. 과학자 이상묵 교수의 면모를 보여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