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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음악의 마지막 황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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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116,117호 편집팀⁄ 2009.05.07 09:39:47

이종구(이종구심장내과 원장·예술의전당 후원회장) ‘음악의 황제’하면 베토벤이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 5번은 황제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나, 많은 사람이 베토벤을 황제로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그 시대의 음악을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거의 모든 낭만시대의 작곡가들이 베토벤을 존경하였으며 그와 동등한 음악을 작곡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황제가 아니었다. 황제란 절대적 권력과 권위 그리고 부와 명예를 누리는 사람이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베토벤을 황제로 볼 수는 없다. 반면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 1908년 4월 5일~1989년 7월 16일)은 독일과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전 유럽의 음악계를 확실히 장악하고 좌지우지했으며, 세계에서 가장 많은 CD와 비디오 영화를 제작하고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음악계의 황제로 볼 수 있다. ■47세에 “나는 독재자가 될 것이다” 선언 카라얀은 그의 개인 제트 비행기와 가장 빠르고 비싼 페라리 자동차 그리고 77피트짜리 요트를 프랑스 리비에라에 정박시키며 살았다. 그의 세 번째 부인(프랑스의 모델)은 피카소와 르누아르의 그림을 수집했으며, 가장 아름다운 보석들의 주인이 되었다. 이러한 씀씀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3,000억 원 이상의 유산을 남겼다. 1955년에 그는 “나는 독재자가 될 것이다”라고 선언한 바 있고, 그 후 베를린 필하모니, 비엔나 심포니 그리고 비엔나 국립 오페라를 근 30년 간 지배한 것이나 다름없다. 카라얀은 1908년에 잘츠버그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1769년에 그리스로부터 이민을 온 집안이다. 그는 4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1916년부터 26년까지 모차르트 음악원에서 지휘 공부를 하고, 1929년부터 1934년까지 독일 우름 시에서 지휘자(Kapellmeister)로 지냈다. 25세 때인 1933년에 잘츠버그 음악축제에 데뷔하고 비엔나 필하모니를 처음으로 지휘하였다. 히틀러가 집권한 지 두 달 만에 카라얀은 25세의 젊은 나이에 나치당에 자진 입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나치당 이념의 신봉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후일 그는 유태인의 손자 딸과 결혼을 하였는데, 이로 인해 나치 수뇌부의 신임을 잃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치당의 입당은 그의 출세에 큰 힘이 된 것은 사실일 것이다. 1935년에 카라얀은 독일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General Music Director’라는 호칭을 받았으며, 2차 대전 중에도 지휘자 활동을 계속하였다. 히틀러의 선전과 문화부 장관격인 괴벨스(Goebbels)는 그를 ‘Das Wunder Karajan(기적의 카라얀)’이라고 극찬하였으며, 아주 젊은 나이지만 나치 수뇌부가 선호하는 지휘자였다. 1945년에 히틀러가 패한 후 연합군은 카라얀을 수사 대상으로 삼았으므로, 카라얀은 북이태리에 숨어 있으면서 이태리어를 배웠다. 그 후 그는 공연 중지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영국의 EMI 음악회사가 카라얀에게 구제의 기회를 주었다. EMI는 음반을 만들어 팔기 위해 오케스트라를 창설하고 카라얀을 모셔 간 것이다. 카라얀은 공연 중지를 당했지만 녹음까지 중단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카라얀은 그때까지 이류 오케스트라였던 The Philharmonia를 일류 오케스트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1954년에는 베를린 필하모니아의 지휘자로 자리를 옮기고, 1989년까지 무려 35년 간 베를린 필하모니에 군림하였다. 이미 1948년에 지휘 금지령이 해제된 후 그는 비엔나 심포니의 지휘자로(1948~1960) 활약하였다. 1956년부터 1964년까지는 비엔나 국립 오페라의 지휘자가 되면서 그는 베를린과 비엔나의 음악세계를 독재자처럼 지배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1969년부터 71년까지 파리의 오케스트라(Orchestre de Paris)까지 지휘하였고, 일찍부터 잘츠버그 음악축제를 주관하기 시작하여 측근들을 이사회에 영입시킴으로써 거의 평생 잘츠버그 축제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필자는 1964년 8월에 유럽 여행 도중 카라얀이 잘츠버그에서 베를린 필과 베토벤 심포니를 지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이것은 나의 일생에서 가장 인상 깊은 콘서트의 하나였다. 또 하나의 추억에 남는 콘서트는 1955년 나의 학창시절 미국의 NBC 오케스트라가 중앙청 광장에서 야외 콘서트를 했을 때이다. 나는 그들이 하얀 턱시도를 입고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으며, 영원한 클래식 음악의 팬이 되었다. 아무튼 카라얀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번스타인과 솔티는 베를린 필과 잘츠버그 축제에 나타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디지털 음악 선점한 카라얀의 혜안 잡음이 나고 잘 깨지는 LP에 싫증이 난 음악 애호가들에게 영원히 변하지 않는 디지털 음악의 탄생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디지털 녹음의 발명자는 필립사이다. 그러나 그들의 치밀하고 보수적인 개발이 늦어지자, 약삭빠른 소니사의 모리타 회장은 카라얀과 손을 잡고 CD 녹음을 빠른 속도로 발전시켰다. 최초의 CD는 60분으로 제한되어 있었으나, 마러 심포니 9번을 녹음하기 위하여 카라얀이 79분짜리 CD를 만들게 한 것이다. 카라얀은 제트 비행기를 스스로 조종할 만큼 테크놀러지에 관심이 있었으며, 그의 스위스 별장은 최신형 음향장치로 무장된 요새였다. 디지털 시대가 오면서 카라얀에게는 콘서트보다는 비디오와 CD를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하게 되었으며, 더 큰 수입원이 되었다. 카라얀은 베를린 심포니를 미국과 일본을 포함해 전 세계에 이끌고 다니면서 팬들을 만들었고, 그들은 카라얀의 CD들을 불티나게 사들였다. 많은 사람들은 거금을 내고 기침소리와 완벽하지 못한 콘서트를 듣는 것보다 관중의 방해 없이 완벽하게 만들어진 CD를 집과 자동차 안에서 듣기를 선호하게 된 것이다. 카라얀은 마지막 수년을 제외하고 무려 35년 동안 베를린 필을 완전히 지배하였으며, 토스카니니(Toscanini)나 카라얀의 전임자 푸르트뱅글러(Furtwaengler)가 만들어 내지 못한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음향을 만들기 위해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혹독하게 연습시켰다. 카라얀이 그들을 그렇게 혹사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의 탁월한 능력과 카리스마의 탓이었지만, 그가 순회공연과 레코딩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자금을 단원들에게 후하게 뿌릴 수 있었던 넉넉함도 중요한 요소의 하나일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황제적 독재자의 권위는 언젠가는 추락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카라얀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1982년에 시작되었다. 카라얀은 한 유능한 여성 클라리넷 연주자를 영입시키려 했으나, 단원들은 그가 여자이고 카라얀이 추천했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언론은 카라얀을 여성 옹호자로 호평하였지만, 그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84년에는 오케스트라의 지배인이 물러난 후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화합이 이루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카라얀이 한 부실한 연주자를 해고하려 하자,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소송을 제기하고 카라얀이 패소하였다. 그러자 카라얀은 베를린 750주년 기념 해에 1년 동안 단 6번만 연주를 하고 모든 순회공연과 레코딩을 취소하여, 그 결과 단원들의 수입이 감소하였다. 한 국가의 원수가 방문했을 때 그는 배탈이 났다는 이유로 연주장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그 다음날 건재한 모습으로 일본을 향해 출발하는 해프닝까지 연출하였다. 카라얀은 노년이 되면서 허리에 대수술을 받게 된다. 두 명의 지휘자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다 거의 같은 장면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진시왕이 불로초를 찾듯이 죽음에 대해 집착하게 되고, 그는 지휘로 인한 스트레스와 심장에 대한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거금의 연구비를 지원하여 연구소까지 만들었다. ■카리스마적 독선이 오히려 발목 잡아 무엇보다 카라얀이 원했던 것은 그의 선임자처럼 지휘자의 명칭뿐만 아니라 예술감독이 되어 단원들을 선발하는 권리와 자기의 후계자를 지명하는 특권이었다. 그러나 베를린 필은 모든 단원들이 주인인 민주적 전통을 고수하였으므로, 이것이 실패하자 카라얀은 1989년 사망하기 얼마 전에 베를린 필에 사표를 내던졌다. 카라얀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제임스 레바인의 보호자격이었으며, 그를 자기의 후계자로 만들고 싶어 했으나 이것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카라얀의 나치 연루 때문에 미국의 유태인 출신 음악가들은 그를 냉대했으며, 줄리아드 음대의 이사장이었던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삭스턴과 이스라엘 출신의 아이삭펄만은 카라얀과의 협연을 거부하였다. 그러므로 카라얀은 유태인 출신의 미국인 레바인을 자기 후계자로 만듬으로써 자기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완화시키고자 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음악계에도 민주화 바람이 불기 시작한 지는 오래 되었다. 베를린 필은 카라얀의 후계자로 명성이 다소 퇴색해 가고 있던 이태리의 아바도(Abbado)를 선택하였다. 아바도는 독재적인 카라얀과 반대적인 성품과 접근방법을 가진 지휘자로서 단원들이 선호하는 지휘자였으며, 1989년부터 2002년까지 성공적으로 임기를 마치고 그 자리를 영국의 뜨는 지휘자 사이몬 래틀(Simon Rattle)에게 내주었다. 예측컨대 21세기에는 카라얀 같은 황제적 지휘자는 다시 보기 어려울 것이다. 강해진 음악인들의 노조는 그것을 어렵게 만들 것이다. 아마도 더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필라델피아의 오르만디는 42년을, 베를린의 카라얀은 35년을, 시카고의 솔티는 22년을 지휘자였다. 그러나 이것은 옛날 이야기이다. 피츠버그 심포니를 세계의 지도에 올린 얀손스는 7년 후에 60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더 좋은 세상을 향해 떠났고, 1년 후 다시 자리를 옮겼다. 2007년부터 러시아의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런던 필의 상임지휘자가 된다. 그러나 그는 이 외에도 2개의 오케스트라를 계속 지휘한다고 한다. 마에스트로와 오케스트라는 결혼을 하는 것과 같다는 말은 옛날의 전설이 되었다. 21세기는 러시아의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보레이코, 영국의 사이몬 래틀과 파파노, 이태리의 카이리, 미국의 일본인 2세 켄트나가노, 라트비아의 마리스 얀손스 등 수많은 젊은 지휘자들의 춘추전국시대가 예상된다. 우리는 그들의 치열한 경쟁을 흥미롭게 지켜보면서 클래식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계속 증가하는 마에스트로와 유명 연주자들의 개런티로 부자들만이 좋은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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