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날씨다.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은 항상 복잡하고 붐빈다. 엄청나게 넓은 터미널! 팔도 사람들이 팔도언어로 말하면서 오가는데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매표원에게 물었다. “전남 강진 얼마죠?” 일반은 1만9,600원이라고 한다. 물론, 우등은 편하기는 하지만 요즘 같은 불경기를 감안, 그냥 일반 고속버스를 타기로 하고 2만 원을 주고 400원을 돌려받았다. 강진으로 가는 고속버스는 오전에 7시 30분, 9시 30분, 11시 30분 등 2시간 간격으로 있으며, 금호고속이다. 서울 강남에서 전남 강진까지 걸리는 정규시간은 4시간 30분인데, 보통 내려갈 때는 5시간 정도, 돌아올 때는 4시간 20분 정도 걸린다고 보면 된다. 좀 멀지만 “뉴욕 맨해튼에서 뉴욕 나이아가라까지 갈 때 버스로 10시간 정도 걸린 경험을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라고 생각하면서 차 안에서 잠을 청했다. 드디어 강진고속버스터미널! 눈에 보이는 시야에서, 그리고 들리는 말소리에서 시골냄새가 물씬 풍긴다. 터미널은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어 오가는 손님들을 즐겁게 하는데, 구수한 전라도 말씨가 정감을 더하는 것 같다. 그런데 왜 이리 더울까? 마치 여름날씨 같다. 반팔을 입은 사람들도 많다. 서울에 비해 남쪽의 여름은 빨리 오나 보다. 오늘의 목적지는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선생이 유배 시절을 지낸 흔적들을 살펴보고 다산유물전시관을 견학한 뒤 인근에 있는 백련사와 영랑 생가를 방문하려 한다. ■다산 정약용과 전남 강진 가상의 CNB-TV 독자 퀴즈 시간… 사회자가 ‘조선후기 대표적인 실학자로서 남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사람?’하고 물으니 독자들이 바로 ‘정약용 선생’이라고 답한다.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국민적 관심사는 엄청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산 정약용은 경기도 남양주에서 출생했으며, 실용학문인 실학과 천주교 사상, 서양 과학에 심취했었다. 정약용의 형제들은 당시 ‘사악한 종교’로 금지된 천주교를 몰래 믿다가 집안 전체가 몰락하는 신유사옥(천주교인 박해사건)으로 정약종은 참수형, 다산과 정약전은 전라도 강진과 흑산도로 각각 유배형에 처해지면서 유배생활이 시작된다. 정약용이 1801년 강진에 유배 와서 처음 묵은 곳은 주막집 골방.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기거하게 되었는데, 그 방의 이름을 사의재(四宜齎)라고 했다 사의재의 뜻은 ‘생각·용모·언어·행동’ 등 네 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사의재? 좋은 이름 같다. 다른 데 가서 건배사할 때 멋있게 써먹게 외워둬야겠다. ■시공을 넘어 정약용 선생을 만나다
다산초당을 향해 가는 돌계단과 흙계단을 번갈아 가며 다소 헉헉대면서(살을 빼야 돼!)…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339-1번지로 올라가니 다산초당이 보인다. 초당은 1958년에 이미 허물어져 흔적만 남은 주춧돌 위에 다시 복원한 것이다. 필자가 계단의 맨 위에 올라서니 정약용을 소개하는 입간판이 있는데, 땟 자국을 보니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 것 같다 정중앙의 다산초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서암이 있고 오른쪽에는 동암이 보인다. 동암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정약용 선생이 18년의 유배 기간 중 10년의 고독을 씹었다는 장소에 지은 천일각이 보인다. 다산은 여깃에서 바다를 보며 무엇을 생각했을까? 일단 왼편의 서암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1808년에 지어진 초막은 윤종기·윤종벽 등 18명의 제자들이 기거한 곳으로 다성각(茶星閣)이라고도 하는데, 이미 허물어져 없어진 것을 1975년에 강진군이 복원한 것이다. 방안을 들여다보니 다산의 제자들이 열심히 학문을 연구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초당의 오른 쪽에 있는 동암(東庵)은 소나무 바람이 많이 부는 곳에 있다고 해서 송풍암이라고 하는데,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000여 권의 책을 갖추고 손님을 맞기도 한 곳이다. 지금처럼 말하면 서재라고나 할까? 여기에 있는 ‘다산동암’이라는 현판은 정약용 선생의 친필이며, ‘보정산방’(寶丁山房)이라는 현판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를 모각한 것이다. 다산초당은 만덕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데,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 18년 중 10여 년을 생활하면서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 등 600여 권에 달하는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곳이다. 물론, 붕괴되었던 것을 다산유적보존회가 1958년에 복원했다. ■유배생활의 외로움을 달래면서 초당 왼편 위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정약용 선생이 바위에 직접 새겨 넣은 ‘丁石’ 이라는 암각 글씨가 보인다. 유배 생활의 억울함과 외로움을 달래고자 애썼던 흔적으로 보인다. 그는 요즘처럼 입만 떠드는 선비를 나무라고 경자유전의 원칙을 내세우며 지식인의 실천윤리를 주장해 왔는데, 그것은 지금도 통용되는 기준이 된다. 정석(丁石) 바위를 지켜보며 걸음을 떼면 약천이 보인다. 다산이 직접 파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필자가 볼 때는 약천은 그냥 좋은 뜻에서 지은 이름으로 보이며, 단지 산에서 내려오는 생수를 받는 장소인 것 같다. 그렇다고 우물 같지는 않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설명이 있지만, 그건 아니고… 약간의 물이 고여 있는 상태이다.
■강진의 다산제와 새로 만든 초상화 마침 강진에서는 2001년부터 매년 추모해 오던 다산제(茶山祭)가 개최(5월 8일~10일)되었는데, 유배행렬을 비롯하여 오광대 공연, 다산학당 체험, 다산 휘호대회 등 많은 추억거리를 관광객들에게 선사했다. 그리고 지난 4월 17일 처음 공개된 다산의 새로운 초상화(가로 96cm, 세로 178cm)도 다산초당과 다산유물전시관에서 만나볼 수 있는데, 안경을 끼고 있는 사실적 초상화에 엄청난 공이 들어갔다고 한다 ■다산, 백련사의 동백림에서 외로움을 달래다 만덕산을 넘어 백련사에 이르면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동백림(천연기념물 제151호)이다. 이른 아침 지인의 승용차를 타고 유쾌 상쾌 통쾌한 산소를 마시며 드라이브하는 기분은 잊을 수가 없다. 백련사의 서쪽과 남쪽 구간의 면적 3.12ha에는 수천 그루의 동백나무들이 이곳의 유구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수백 년 수령의 선조 할아버지뻘 동백나무들의 잎새는 한낮에도 지나가는 길을 어두컴컴한 터널로 만드는 장관을 보이기도 한다. 백련사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보이는 시야는 강진만이다. 정말 시원하다. 세상의 모든 일도 이처럼 시원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 참! 여긴 산책길로도 만점이다. 완만히 만덕산을 끼고 도는 오솔길은 중간중간에 시원하게 펼쳐진 강진만의 모습을 보면서 다산초당에서 백련사까지 천천히 걸어도 30분이면 족하니, 다산초당을 보고 백련사로 이동하는 방법도 있다. 백련사(白蓮寺)는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11번지의 월출산 남쪽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 대둔사의 말사이다. 처음에는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社)로 명명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만덕사(萬德寺)로 불리다, 현대에 와서 다시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대웅보전에 있는 중수기 현판을 보면, 통일신라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6) 때 무염(無染, 801~888) 스님에 의해 창건된 이래, 고려 명종 1170년 원묘국사 요세에 의해 재창건되어 고려 후기 8국사를 배출하고 백련결사를 일으킨 유서 깊은 명찰인데, 조선 후기(1760)에 큰불이 일어나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1762년에 대법당을 재건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