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쇄
  • 전송
  • 보관
  • 기사목록

[클래식]이스라엘의 평화운동가 바렌보임

중동 평화 역설하는 마에스트로…한반도에도 남북 오케스트라가 생겼으면

  •  

cnbnews 제119호 편집팀⁄ 2009.05.26 11:17:36

번스타인과 카라얀 이후 현재 클라우디오 아바도, 주빈 메타, 마리스 얀손스, 라카르도 무티, 사이몬 래틀 등 수많은 지휘자들이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으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 :1942년 11월 15일~)만큼 화제가 되고 있는 마에스트로는 없을 것이다. 그는 당대의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와 마에스트로일 뿐만 아니라, 1967년에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영국의 미녀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Jacqueline Du Pre)와 결혼함으로써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다. 그 후 그녀가 27세의 젊은 나이에 다발성 마비라는 불치병에 걸려 연주를 중단하고 42세에 이 세상을 떠나자, 재클린에게 세계의 동정이 쏠리고, 동거 여인이 있던 바렌보임에게는 차가운 눈초리가 쏠리게 되었다. 그러나 바렌보임이 그 어느 음악인보다도 세계의 화젯거리가 되고 있는 이유는, 그가 유태인이자 이스라엘의 국민으로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강경 외교정책을 맹렬히 비판하고 나섰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및 아랍 젊은이들로 구성된 West-Eastern Divan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음악을 통해 이스라엘과 아랍 세계의 상호 이해와 팔레스타인의 자유를 위해 용감히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 최고의 미녀 첼리스트와 결혼하다 바렌보임은 1942년에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으나, 1952년에 부모와 함께 모든 유태인의 조국 이스라엘로 이민을 갔다. 그는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며, 12살의 나이에 지휘 지도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정식 음악학원을 졸업하지는 않았다. 1952년에 그는 비엔나와 로마에서 피아노 데뷔를 하였으며, 1957년에는 마에스트로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하는 뉴욕 필에 데뷔하였다. 1966년 크리스마스 때 영국 최고의 천재적 첼리스트인 재클린 뒤 프레를 만나고, 이스라엘에서 결혼을 했는데, 이때 바렌보임의 친구인 주빈 메타가 유태인이 아니면서도 유태인 행세를 하면서 들러리를 서준 해프닝도 있었다. 그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재클린이 이스라엘의 유태인과 결혼하자, 많은 영국인들은 부러워하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이들은 클라라와 로버트 슈만 이후 최고의 음악인의 사랑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당시 가장 유명한 음악인 부부가 되었다. 그리고 바렌보임은 1967년에 런던 필하모니의 지휘자로 데뷔를 하였으며,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피아노 콘체르트를 연주하면서 동시에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재능을 보여 더욱 유명해졌다. 사랑스러운 재클린의 연주를 지휘하는 바렌보임의 모습은 지금도 DVD를 통해 즐겨 볼 수 있다. 재클린 뒤 프레는 1962년 17살의 나이에 BBC 오케스트라와 엘가 첼로 콘체르토 E minor로 데뷔하였다. 이때 영국의 신문들은 재클린이 영국에서 300년 만에 나온 천재적 음악 연주자라고 극찬하였다. 그 당시 영국은 독일과 프랑스에 비해 내놓을 만한 작곡가가 없다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며, 영국인과 언론계는 재클린의 등장으로 엘가와 재클린을 국가적 영웅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것 같다. 1973년 28살의 나이에 재클린은 손가락의 감각을 잃기 시작하였으며, 곧 공연을 포기할 수밖에 없어 첼로 선생이 되고 휠체어를 타는 신세가 되었다. 다발성 마비라는 병은 전신의 신경과 근육이 서서히 마비되기 시작하고 궁극적으로 호흡이 불가능해져 사망하는 비참한 질환이다. 바렌보임은 1975년부터 1989년까지 파리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었다. 이때 런던에서 병 간호를 받고 있는 재클린과 바렌보임은 주말부부가 되었으며, 바렌보임은 미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고 재클린과 가까이 있기 위해 파리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30대의 젊은 바렌보임은 홀로 살 수는 없었으며, 엘레나와 동거를 하고 아이까지 갖게 되었다. 그러나 바렌보임은 끝까지 재클린을 지켜보았으며, 재클린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고, 신문·잡지까지도 함구하는 배려를 했다고 한다. 바렌보임은 재클린이 사망한 후 엘레나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스라엘인으로서 팔레스타인 학자와 교우 바렌보임은 또 하나의 전설적인 지휘자 게오르그 솔티에 이어 1991년부터 현재까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2001년 7월 바렌보임은 베를린 국립 오페라와 이스라엘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그는 바그너의 음악(Tristan과 Isolde)을 공연하고 싶어 했지만, 그때까지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의 음악이 공연금지 상태였다. 대신 슈만과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연주한 후 앙코르 시간이 오자 바렌보임은 바그너의 음악을 연주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반대하는 사람은 연주장에서 퇴장해 달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건국 이후 처음으로 바그너의 음악이 연주된 것이다. 이미 1999년에 그는 팔레스타인의 저명한 학자이자 저자인 사이드와 친구가 되고, 이 둘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와 팔레스타인의 자유를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2001년에 이 둘은 이스라엘과 아랍 음악인들의 West-Eastern Divan 오케스트라를 창립하고, 이 젊은 음악인들은 매년 여름 스페인의 세르비아에 모여 바렌보임의 지휘 아래 연주 연습을 한다. 그들은 독일과 스페인에서 연주를 하였으나, 그들의 꿈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서 연주를 하는 것이었으며, 드디어 2005년 8월에 팔레스타인의 라말라에서 사이드의 추모 음악회를 열었다. 언젠가는 이스라엘에서도 콘서트를 가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매년 여름에 연습을 하고 있다. 2002년에 바렌보임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의 정책은 비도덕적이며 정략적으로도 옳지 않다”고 비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국회는 바렌보임에게 그의 음악적 성공을 축하하기 위해 최고의 문화상을 수여하기로 하였다. 이스라엘의 대통령과 문화부 장관이 참석한 수상식에서 바렌보임은 이스라엘의 정책이 이스라엘의 건국이념에 상반되며 이웃 즉 팔레스타인과 아랍국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폭탄선언을 하였다. 바렌보임은 이스라엘과 아랍인들의 음악이 중동의 평화를 가져오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음악 활동은 서로를 이해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것은 평화를 만드는 작은 시작이 될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분단된 한반도에서는 언제나 민간단체의 남북 오케스트라가 생기고 이를 통해 서로를 발견하고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지 궁금하다.

배너
배너
배너

많이 읽은 기사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