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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철의 장벽에 금을 낸 피아니스트

소련 독재자 흐루시초프의 심금 울린 인류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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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21호 편집팀⁄ 2009.06.09 16:12:14

이종구(이종구심장내과 원장·예술의전당 후원회장) 번스타인 외에 미국의 자존심을 살려준 미국의 아들 음악인이 또 하나 있다. 그는 1958년에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을 한 밴 클라이번(Van Cliburn:1934년 7월 12일~)이다. 그는 1934년에 유전과 축산업의 본고장인 텍사스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유전산업가였으며, 어머니가 피아니스트였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한 미국인 청년 1958년은 구 소련과 미국의 냉전의 절정기였으며, 러시아와 미국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을 때다. 이 콩쿠르가 열리기 전인 1957년 10월 4일에 소련은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우주로 발사했으며, 세계는 핵전쟁의 검은 구름으로 덮여 있을 때였다. 그리하여 4년마다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이 콩쿠르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세계의 문화적 우월성을 겨루는 하나의 전쟁터이기도 했다. 이 콩쿠르에서 24세의 젊은 클라이번은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콘체르토 1번의 4악장과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였으며, 심사위원들은 클라이번이 최고였다고 결론 지었다. 그러나 소련의 적국이나 다름없는 미국인 클라이번에게 금상을 주는 것은 소련 공산당의 흐루시초프 서기장의 승인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심사위원들이 흐루시초프 서기장에게 의견을 묻자, 그는 “그 미국인이 정말로 최고냐?”라고 묻고, 그렇다면 그에게 상을 주라고 명하였다. 이때 쇼스타코비치가 클라이번에게 시상을 하고, 흐루시초프가 클라이번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서방 언론은 클라이번이 처음으로 철의 장벽에 금을 냈다고 평가하였다. 클라이번이 우승을 하고 귀국하자, 클래식 음악의 애호가뿐만 아니라 온 미국인이 열광하여 그는 미국의 영웅으로 탄생하였다. 시카고의 엘비스 프레슬리 클럽은 그 이름을 클라이번 클럽으로 바꾸었을 정도였다. 그 후 클라이번이 흐루시초프에게 직접 부탁하여 자기의 연주를 지휘했던 러시아 지휘자가 미국을 방문하게 되었으며, 클라이번은 흐루시초프의 초청을 받고 러시아를 다시 방문하여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면서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연주를 하였다. 모스크바에 매료된 음대생 클라이번은 하루에 몇 시간씩 어머니의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으며, 네 살 때 악보를 완전히 읽을 수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17세까지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그 후 줄리아드 음대에서 피아노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거기서 러시아 출신의 여자 레빈 교수의 제자가 되었다. 줄리아드 음대의 카페테리아에서 클라이번은 아주 인기 있는 학생이었으며, 여기서 흑인 오페라 가수 레온타인 프라이스와 좋은 친구가 되기도 했다. 클라이번은 모임에 늦게 나타나기로도 유명하였는데, 졸업사진을 촬영할 때도 늦어 친구들은 그가 나타날 때까지 30분을 기다려주었다고 한다. 그의 동창생들은 그가 언젠가는 대스타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클라이번이 모스크바와 인연을 맺은 계기는 그가 어린 나이에 크레믈린과 성 바실리 사원의 그림을 보았을 때였다. 그는 어머니에게 성 바실리 사원에 데려가 달라고 졸랐다. 어머니는 그에게 약속을 했고, 20여 년 후에 이 두 사람은 모스크바에 나타났다. 음악성, 인간성, 스타 기질 3박자 고루 갖춰 정치적 억압과 의심에 싸여 살던 러시아 시민들은 장신의 미남인 클라이번의 활짝 웃는 친근한 모습에 완전히 반해버렸으며, 클라이번은 타고난 시민외교단의 소질을 유감없이 나타냈다. 그는 러시아 언론에게 러시아 사람들은 매우 진지하며 텍사스 사람과도 같다고 칭찬하면서 텍사스인은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솔직하게 알려주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하였다. 클라이번은 러시아에서 귀국하자 필하모니와는 물론 전 미국에서 유명 오케스트라와 공연하였다. 그는 콩쿠르에서 우승하기 전에 시카고 심포니와 아주 소액을 받고 연주계약을 한 바 있었는데, 러시아에서 돌아온 후 그 계약을 이행하였다 하여 미국인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그는 근 20년 간 많은 연주를 하고 RCA와 음반도 만들었다. 그의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클래식 음악으로는 처음으로 100만 장이 팔렸으며, 결국 300만 장을 돌파하였다. 휴식과 재충전의 필요성을 느낀 클라이번은 1978년부터 9년 간의 긴 안식년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의 이 긴 인터미션은 1987년에 막을 내렸다. 냉전 종식의 필요성을 느낀 소련의 지도자 고르바초프가 백악관에서 레이건 대통령을 방문할 때, 클라이번이 연주를 하고 난 후 “나는 러시아 사람을 사랑합니다. 러시아의 예술을 사랑합니다”라고 선언하면서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을 포옹하자, 긴장감에 싸였던 고르바초프의 태도는 한결 부드러워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차이코프스키의 음악과 밴 클라이번의 피아노 연주가 러시아와 미국 간의 평화를 유지하는데 큰 힘이 된 듯하다. 그 후 1989년에 클라이번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가 열렸던 차이코프스키 홀에서 다시 연주를 하였고, 가는 곳마다 러시아 시민 특히 젊은 여성들은 그의 사인을 받기 위해 긴 줄을 이루었다. 러시아에서 귀국한 그는 18개의 미국 도시에서 거의 모든 유명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였다. 특히 시카고의 그랜드파크에서는 미국 태생인 슬래트킨의 지휘로 야외공연이 있었는데, 공식적으로 35만 명이 참가하였다. 미국 시골 출신인 클라이번이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가 사랑하는 피아니스트가 된 것은, 물론 그의 뛰어난 기술도 있었지만, 그의 인간성과 스타 기질(star quality)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명성에 도취되지 않고 겸손하며 팬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따뜻한 인간이었다. 또한 탁원한 스타 기질의 소유자였다. “진정한 스타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다”(A star is borne, not made.)는 외국의 격언이 맞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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