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구(이종구심장내과 원장·예술의전당 후원회장) 필자는 2006년 7월 초에 국립발레단과 예술의 전당 후원회원들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리는 백야축제(White Nights Festival)에서 발레(3편), 베르디의 오페라(2편), 쇼스타코비치 갈라(유비 바쉬메트와 모스크바 실내악단)를 관람하는 행운을 얻었다. 이 축제는 매년 여름 마린스키 극장에서 열리는데, 마린스키 발레단은 황제 발레단(Imperial Ballet), 마린스키 발레단, 키로프 발레단의 이름을 모두 사용하고 있어 그 배경이 궁금해졌다. 물론 마린스키 극장은 발레뿐만 아니라 키로프 오페라와 오케스트라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2006년에 키로프는 301명의 오케스트라 멤버, 120명의 코러스 멤버, 130명의 오페라 가수, 260명의 무용수, 300명 이상의 기술자들을 고용하고 있으며, 지휘자의 수도 14명이나 된다. 세계에 이보다 더 많은 예술가들을 거느리고 있는 하나의 예술단체는 없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고전 발레의 역사 고전 발레는 프랑스의 루이 14세 왕 때 시작되었는데, 그 태양의 왕은 춤을 좋아했으며, 발레 학교를 설립하고 귀족들과 같이 무용공연을 즐겼다. 반면, 미개국으로 천대받던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가 수도를 새로 건설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기면서 서방문명을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1738년에 아나 여제(Empress Anna)가 겨울궁전의 2층에 최초의 발레 학교(황제발레단)를 설립하고, 프랑스인 란데후 발레 마스터가 되면서 러시아의 발레는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예카테리나 2세는 자기 남편인 표트르 3세를 폐위시키고 살해했다는 의심을 받기는 하였으나, 서방문화를 도입하기 위해 계몽정책을 시행하고, 1783년에는 러시아 최초의 석조 극장(볼쇼이)을 설립하여 서방국의 오페라와 발레를 공연하고 러시아의 발레를 발전시켰다.
초기의 러시아 발레는 디데로, 페로, 마리우스 페티파(Marius Petipa) 같은 프랑스의 무용인들에 의해 지도되었다. 특히 페티파는 20년 간(1802~1811, 1816~1827)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살면서 46개의 발레를 안무하였는데, 차이코프스키와 좋은 팀을 이루어 백조의 호수, 숲속의 잠자는 미녀, 호두까기인형 등 유명한 발레를 만들었다. 그의 작품은 지금도 전 세계에서 공연되고 있으며, DVD를 통해 즐겨 볼 수 있다. 1860년에는 알렉산드르 2세의 딸인 마린스키의 이름을 따서 마린스키 극장이 건립되었다. 이 극장은 발레보다는 러시아의 민족 작곡가(글린카·무소르그스키·큐이·보로딘·림스키코르사코프)들의 음악을 장려하려는 국민의 소원을 담아 만들어졌으며, 개관기념으로 글린카의 오페라 황제의 일생이 공연되었다. 그로부터 마린스키는 러시아 오페라와 발레의 메카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요한손과 이태리의 무용수 3명(체체티 등)의 등장은 새로운 활력소가 되며, 이어서 아나 파블로바(Anna Pavlova), 니진스키(Nijinsky) 등 많은 러시아 출신의 유명 무용가와 안무가가 등장한다.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 무용학교에서 공부한 포킨(1880~1942)은 마린스키 극장의 뛰어난 무용수로서 세계적인 안무가가 되었다. 그가 제작한 발레는 지금도 공연되고 있으며, 그의 작품은 DVD를 통해 접할 수 있다. 마린스키 발레 출신의 아그리파 바가노바(Vaganova, 1989~1951)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레 교사이다. 1934년에 출판된 그의 책 <고전 발레의 기본>은 전 세계적으로 표준 교과서가 되었다. 마린스키 극장의 뛰어난 발레리나였던 그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1917년에 무대생활을 마치고 황제 발레 학교를 이어받아 마린스키 발레에 부속된 무용학교를 살리면서 루돌프 누레예프 같은 뛰어난 무용가들을 양성했으며, 이 학교의 졸업생들은 마린스키 극장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붉은 혁명’의 성공과 러시아 무용인들의 엑소더스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은 예술계에도 엄청난 변화를 불러왔다. 그리하여 마린스키 극장은 키로프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키로프는 혁명가이면서 스탈린의 동지이자 경쟁자이기도 했다. 그는 레닌그라드의 공산당 서기가 되었으며, 그 당시 공산당 내부에서는 스탈린보다도 인기가 더 좋았다고 한다.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스탈린은 키로프를 가까이에서 감시하기 위해 모스크바의 공산당 서기로 올 것을 권하였다. 하지만 키로프는 이를 거절했고, 얼마 후 1934년에 암살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 배후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스탈린의 지시로 암살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 후 스탈린은 대대적인 숙청으로 정적과 경쟁자들을 모두 제거하고, 마린스키 극장을 키로프로 개명했다. 그리하여 황제 발레단으로 출발한 마린스키 발레는 키로프가 되고, 1991년 구 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다시 마린스키의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전통을 중요시하는 러시아인들은 오늘도 이 세 가지 이름을 모두 사용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붉은 혁명이 성공하자, 마린스키 출신의 많은 무용인들이 서방국으로 떠나게 된다. 무용가 출신은 아니지만 마린스키의 예술감독을 지낸 디아길레프(Diaghilev)는 파리에 정착하면서 러시아 발레단(Ballet Russes)을 만들고 마린스키 출신의 무용가들을 파리로 초대한다. 그들 중에는 포킨, 파블로바, 니진스키 같은 전설적인 무용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들 중 또 하나의 세계적인 안무가는 게오르그 밸런친(Balanchine)이다. 그는 1904년에 러시아에서 태어나 황제 발레 학교에서 공부하였으나, 마린스키에서 무용을 하지는 않았다. 1924년에 그가 서유럽에서 공연할 때 다그리예프가 그를 설득하여 망명하게 되고, 발레루스에서 활약하다. 1933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아메리칸 발레와 뉴욕시 발레를 창설하여 미국 발레의 대부가 되었다. 또 한 명의 마린스키 발레 출신인 천재 루돌프 누레예프는 1961년에 KGB 요원들을 따돌리고 서방으로 망명하여 영국 로얄 발레의 간판 발레리나와 환상의 쌍을 이루면서 영국의 로얄 발레를 세계의 정상에 올려놓았다. 소련의 붕괴, 그리고 게르기예프의 백야축제 1991년 구 소련의 붕괴는 마린스키에 또 하나의 급변을 일으킨다. 소련연방은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해 예술과 체육에 대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었다. 그러던 소련 정부가 무너지자, 러시아의 예술인들은 하루아침에 거지 신세가 되고, 마린스키 극장도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이때 한 젊은 지휘자가 나타나 마린스키를 구할 뿐만 아니라, 세계가 주목하는 마린스키 발레·오페라·오케스트라를 만들어낸다. 그 사람은 지금 마린스키와 백약축제를 이끌어 가는 발레리 게르기예프(1953년생)이다. 그는 코카서스 지방 출신의 러시아인으로,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공부하고, 1978년에 키로프 오페라의 유리 테미르카노프(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심포니 지휘자)의 부지휘자, 그리고 1988년에는 수석 지휘자가 되었으며, 1996년에는 33세의 젊은 나이에 마린스키 극장의 총감독이 되었다. 1992년에 그는 엄청난 재능과 에너지로 마린스키의 백야축제를 시작하고, 특히 마린스키 오페라를 세계의 정상으로 끌어 올리는데 성공하였다. 과거의 마린스키 오페라는 주로 러시아 오페라를 제작하였으나, 지금은 이태리뿐만 아니라 바그너에서 모차르트까지 그 레퍼토리를 넓히고 있다. 그는 마린스키 오케스트라뿐만 아니라 로테르담 필의 상임지휘자와 메트로폴리탄의 최고 객원지휘자를 겸하였으며, 2007년부터는 런던 심포니의 상임지휘자가 된다. 2차 대전 후 베를린 필의 지휘자 카라얀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세계의 가장 유명한 음악축제로 키웠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와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마린스키의 백야축제를 강력한 경쟁자로 내세우고 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잘츠부르크에 버금가는 음악축제가 될 날이 올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즉, 카라얀이 20세기 음악의 황제였다면,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21세기의 차르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마린스키는 또 하나의 무대를 건설 중이다. 이것이 완성되면 마린스키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될 것이며,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시설과 예술가들의 메카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