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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성공하고 실패한 피아노 거장들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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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24호 편집팀⁄ 2009.06.30 17:33:49

이종구(이종구심장내과 원장·예술의전당 후원회장) 필자는 지난 2006년 12월에 우리의 자랑 백건우 선생의 30주년 결혼기념과 60주년 생신을 축하하는 자리에 참가하여, 백건우 선생이 부인인 영화배우 윤정희 씨와 자기의 ‘성공한 사랑’에 대해 감사한다는 인사말을 들었다. 목이 메어 말하는 그의 눈가에는 이슬이 비쳤다. 이 세상에는 성공한 사랑도 많지만, 아마도 실패한 사랑이 더 많을 것이다. 부부가 30년 이상 이혼하지 않고 산다고 반드시 사랑에 성공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백건우 부부야말로 정말 성공한 사랑인 듯하다. 1976년 당시 한국의 최고 미인 여배우였던 윤정희 씨는 영화배우로서의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오로지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의 아내로서,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비서로서, 매니저로서, 가장 헌신적인 후원자로 30년을 살아왔다. 그 내조의 힘으로 백건우 씨는 오로지 예술의 완성을 위해 일생을 살아왔으며, 그 덕분에 60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술과 인기는 상승세를 타고 있다. 여류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의 숭고한 사랑 19세기에 가장 명성을 날린 피아니스트로서 폴란드의 쇼팽(1810~1849), 헝가리의 리스트(1811~1886), 독일의 여류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1819~1896)을 들 수 있다. 이들 중에서 클라라 슈만과 로버트 슈만(1810~1956)은 유명 음악인들 중에서도 가장 사랑에 성공한 주인공으로 꼽을 수 있다. 이 두 사람의 사랑은 로버트 슈만에게 낭만주의시대에 가장 사랑받는 작곡가의 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에너지와 동기를 주었으며, 반면에 클라라는 자기 남편의 음악을 전 유럽에서 연주함으로써 당대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와 피아노 교수가 되었고, 남편을 유명 작곡가로 만드는데 큰 공을 세웠다. 클라라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Friedrich Wiek)는 독일의 정상급 피아노 교육자였으며, 그 밑에서 일찍이 피아노를 공부한 클라라는 13세부터 콘서트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로버트가 9세 연하인 클라라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그가 18살 때였다. 그러나 이때 그들의 사랑이 싹트기엔 너무 일렀다. 2년 후에 파가니니(Paganini)의 연주를 들은 로버트는 법학 공부를 포기하고 피아노를 전공하기 위해 클라라의 아버지의 제자가 되어 그의 집에서 하숙을 시작하였다. 로버트는 상당한 수준의 피아니스트가 되었지만, 오른손에 부상을 입어 마비가 오면서 피아노를 포기하고 작곡에 전념하게 된다. 24세의 로버트와 15세의 클라라는 숙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로버트가 피아니스트로서 성공할 수 없음을 알게 된 클라라의 아버지는 그들의 사랑을 적극 반대하였다. 그러나 로버트는 결혼을 위해 법정에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고, 1840년 로버트의 나이 30세에 아버지의 동의 없이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이러한 스트레스에도 불구하고 로버트는 1838~1839년에 클라라를 위해 아라베스크(Arabesque in C Minor)를 작곡하였다. 그러나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기 시작한 그는 후일 정신병자가 되어 46세의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런 와중에도 로버트의 사랑은 창작의 원동력이 되었고, 1840년에는 멘델스존의 권유로 무려 168개의 리드(Lied)를 작곡하였다.

로버트의 가장 사랑받는 피아노 콘체르토(A Minor)는 1841년에 시작하여 1845년에 완성되었다. 로버트는 피아노와 리드 외에도 심포니 4개, 실내악, 합창곡, 오르간 곡, 오페라 등 많은 작곡을 남겼다. 이 두 사람 사이에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의 등장은 새로운 차원을 추가한다. 1853년에 로버트는 20세의 젊은 브람스를 만나 그의 천재성을 극찬하였다. 브람스는 두 사람과 절친한 사이가 되었으며, 그는 14년 연상인 클라라를 정신적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로버트가 정신병으로 시달리자, 그는 집안의 가장 또는 집사의 역할을 맡게 되었고, 로버트가 최후의 2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낼 때는 두 사람 사이를 오고가는 연락병의 역할까지 맡아 하였다. 평생 독신이었던 브람스는 클라라를 지극히 사랑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플라토닉한 정신적 사랑이었다고 한다. 그 플라토닉 러브가 브람스의 음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관심의 대상이지만, 이 또한 성공한 사랑의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실패작으로 끝난 쇼팽의 사랑 쇼팽과 리스트는 당대 최고의 거장이자 낭만주의 음악의 선구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폴란드의 천재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쇼팽이 파리에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후 그는 리스트의 연인이었던 다구(d'Agoult) 백작 부인의 소개로, 남장을 하고 남자의 이름을 가진 남작 부인 조지 샌드(George Sand)를 만났다. 그 여자는 일부일처제는 막을 내렸다고 주장하는 당대의 유명한 여성주의자 문인이었으며, 이미 많은 유명 인사들과 연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처음에 쇼팽을 그 여자는 지겹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나, 쇼팽의 천재성에 반한 그녀는 드디어 쇼팽을 또 하나의 연인으로 만들었다. 쇼팽은 4년 간 샌드와 동거하면서 많은 음악을 작곡하였으나, 쇼팽의 날로 나약해지는 건강과 그녀의 복잡한 가족 관계와 쇼팽을 격화시키는 듯한 소설은 이 두 연인을 갈라놓고야 말았다. 즉, 파리 사교계에서 가장 큰 화젯거리가 된 그 둘의 사랑은 실패작으로 끝났던 것이다. 그 당시 가장 뛰어난 피아노 거장이자 작곡가로서 프란츠 리스트를 들 수 있다. 쇼팽의 친구이자 경쟁자이기도 한 그는 열광적인 피아노 연주로 전 유럽에 리스트 마니아를 일으킬 정도였다. 리스트는 유부녀였던 다구 부인과 사랑을 했으나 실패하고, 캐롤린 공주를 만나 30년 간 서로를 사랑하였다. 그러나 결혼은 못하고 정신적 사랑으로 인생의 막을 내렸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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