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범 건축가, 예술비평 ybreigh@hanmail.net 갤러리 정미소에서 2009년 9월 10일부터 30일까지 작가 김송이의 개인전이 열렸다. ‘Slip Away'란 제목을 단 이 전시는, 기존의 전시가 보여주는 작품의 콘텐츠와 전혀 다르게 와 닿았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전시가 시작되기 전 약 2개월 정도의 작가 입주기간이 있었다는 점도 갤러리 정미소의 공간 못지않게 실험적이고 흥미로운 점이다. 작가의 드로잉이 중심이 된 이번 전시는 어둡고 당황스럽다. 지워져 버린 초상 때문이다. 검고 무겁게 지워져 버린. 지움과 기억, 되살림과 어렴풋함이 뒤섞인 풍경을 드러내는 이 두껍게 칠해진 검은 칠은 무엇을 의미할까. 검은 칠의 의미는 불완전성에 대한 작가정신의 표현이다. 불완전성? 어두운 초상들이 보여주는 불완전성은, 기억 자체의 불완전성이나 기억 속에 남은 과거 그 자체에 대한 불완전성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작가에게 기억은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인간존재의 방식이다. 기억의 지움처럼 보이는 'slip away' 전시는 어찌 보면 기억의 되살림을 통해 지나온 삶과의 화해를 시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덧대인 기억들, 지우고 싶은 기억들, 사라지지 않고 남은 잔상의 기억들, 이제는 다시 되살리고 싶은 기억들로 읽히는 왜곡된 초상의 작업은 달리 보면 지우고 싶은 기억이 아니라 지워진 기억을 되찾는 노력이다. 어렴풋한 기억에 뭔가를 덧대면 어떤 순간의 기억이 명확하게 드러날 것 같은 그런 작가적 개입이기도 하다. 검게 덧칠된 초상화 시리즈는 애써 덮어두고 싶은 자신에 대한 기억이기도 하고, 자신을 둘러싼 객체를 통해 자신을 기억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것이 작가가 자신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관객에게 자신의 히스토리를 이야기하는, ‘소통의 방식으로서의 흥미로움’이 있다.
통상 기억에 대한 지움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검고 두꺼운 덧칠은 하지만 자세히,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엇이 먼저인지 알 수가 없다. 검은 덧칠에서 기억 속의 잔상을 드로잉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기억의 왜곡이 아니라 왜곡되고 지워진 과거 속에서 자신과 가족들을 구해내는 일련의 작업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온전하지 않다. 무엇 때문일까? 불완전성이다. 삶 자체의 불완전성이 클 것이다. 하지만, 그 불완전성은 여전히 인간관계에 근거한다. 어머니(Mom), 사랑했던 이(Lover), 그리고 가족의 초상에서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 역시 불완전하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의도적인 지움으로 기억의 공백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기억의 공백을 갖기 위한 어두움. 기억에 대한 지나친 중첩이 이 어두움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드로잉은 기억을 지웠다기보다는 기억을 가둬버린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시각적으로 어둡게 처리된 회상에 대한 묘사는 기억의 가장 깊숙한 저층에 자리 잡고 있는 인간에 대한 애증을 표현하게 하는 데 공헌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왜곡이 착각일 수 있다는 발상의 뒤집음이 도사리고 있다. 가두어 버려 결국은 갇힌 기억이 절대적 현실이 아닐 수 있기에 기억을 상상으로 만드는 발상의 뒤집음 같은 것 말이다. 구체적인 삶의 무게를 지니지 않는 존재 인식이 그 발상의 뒤집음을 통해 가능해진다. 왜곡, 잔상, 불완전성, 기억, 지움, 자화상, 초상, 집단적 기억, 자신, 가족. 이번 전시에서 가족은 작가 김송이에게 지울 수 없는 어릴 적 트라우마처럼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래서 이번 전시의 한 부분은 ‘가족에게 나란 의미는 무엇일까?’를 묻는 일종의 개인의 가족사에 대한 작가의 독백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