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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내 인생의 동반자”

음악과 운명적으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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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42호 편집팀⁄ 2009.11.03 10:11:07

이종구 심장내과 전문의·예술의전당 후원회장 필자는 12살쯤부터 클래식을 들으면서 살아왔다. 개구쟁이 시절을 지나 사춘기가 오면서 축음기로 음악을 듣기 시작하였는데, 그때 필자가 좋아한 음악으로 베토벤의 월광소나타(No.14)와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곡(No.8)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음악을 더욱 가까이 하게 된 것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부산 초량진에 있던 육군군악학교에 입대했기 때문이었다. 이 학교는 육군의 나팔수를 양성하여 인민군·중공군과 싸우는 일선 부대로 보내고 있었지만, 심포니 오케스트라도 유지하고 있었으며, 교장 겸 지휘자는 일본에서 작곡을 공부한 육군 대령이었다. 필자는 이 학교에서 생활필수품과 월급을 나누어주는 말단 병사였지만, 이 음악인들과 동고동락하게 된 것이다. 6.25전쟁 중에 음악과 맺은 인연 이 육군 군악 오케스트라는 부산의 한 영화관에서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과 베토벤의 전원교향곡(No.6)을 연주하는 성과를 올렸다. 당시 필자의 음악 지식은 밑바닥이었기에 제대로 평가할 수는 없었지만, 러시아군이 나폴레옹군의 침략을 물리치는 내용인 1812년 서곡을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싸우면서 연주함으로써 국민의 사기를 고무시키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군에서 제대한 후 의과대학으로 돌아간 필자는 1954년 여름에 중앙청 앞마당에서 미국 NBC 심포니의 연주를 볼 행운을 얻었다. 당시 미국의 최대 방송사인 NBC는 1937년에 이태리 라스칼라에서 최고의 지휘자로 명성을 떨치던 토스카니니(1867~1957)를 초대하여 이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 토스카니니는 1954년 4월에 카네기홀에서 전 바그너 콘서트를 지휘하던 중 중풍의 초기 증상으로 기억력을 상실하여 은퇴하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NBC 회장이 NBC 심포니를 해체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쇼크를 받아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토스카니니는 서울에 오지 못했지만, 세계 최고의 명성을 유지해온 오케스트라가 하얀 턱시도와 검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연주하는 그 모습은 아직도 필자의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필자는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캐나다로 향했다. 1960년 초반에 몬트리올에 있었는데, 몬트리올 심포니의 지휘봉을 잡은 25세 주빈 메타의 지휘를 그때 처음 볼 수 있었다. 당시 몬트리올에서는 데이비드 오이스트락 같은 세계적 명장을 볼 수 있었으며, 난생 처음 볼쇼이발레단의 백조의 호수를 보면서는 사람이 아닌 요정들이 춤을 추고 있다는 환상에 빠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세고비아와 칼로스 몬토야의 연주를 보면서 스페인 음악에 대한 특별한 애정도 갖게 되었다.

1964년에 필자는 유럽에서 1년 간 연구원 생활을 하였는데, 잘츠부르크 음악축제에서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를 볼 수 있었다. 턱시도와 화려한 롱 드레스를 입은 청중 속에서 평복을 입은 한 동양인의 모습이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필자로서는 영원히 남을 추억이었다. 그 후 필자는 캐나다의 에드먼터으로 돌아와 의과대학 교수 생활을 시작하면서 에드먼턴 심포니의 공연을 자주 보았으며, 그때부터 CBC FM 프로그램이나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독서도 하고 글을 쓰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도 음악이 없으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습관이 있으며, 음악을 들으면서 환자를 보고 있다. 추억에 길이 남을 지중해 크루즈 음악여행 1989년에 필자는 한국으로 돌아와 콘서트장을 자주 찾으면서, 한국 음악계의 눈부신 발전을 목격하고 있다. 특히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 버젓한 성인으로 발전하고 있는 오페라와 발레, 그리고 사라장·장한나·김선욱 같은 젊은 스타들의 탄생을 보면서 한국 음악계의 르네상스를 목격하는 기분이다. 나에게 가장 추억에 남을 음악적 경험은 지난 6월 19~30일 비엔나필과 주빈 메타와 랑랑이 함께 한 지중해 크루즈일 것이다. 이 크루즈는 스페인의 마요르카 섬에서 출발하였는데, 이곳은 쇼팽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쇼팽과 그의 연상 애인 조르주 상드는 폐결핵으로 악화되는 쇼팽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1938년 11월 8일부터 이듬해 2월 13일까지 이 섬을 찾았었다. 그는 단 5주 만에 프렐류드(opus 38), 발라드(opus 38), 폴로네즈(opus 40), 스케르초, 마주르카(Opus 41)를 작곡하였으며, 동시에 소나타 No.2를 수정하였다. 필자는 그가 머물던 발레모사 수도원과 그가 사용하던 피아노를 보면서 그가 작곡한 피아노곡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가 탄 배(Aida, Diva)는 플로렌스에 들러 비엔나필과 랑랑의 연주를 보고, 바르셀로나에서도 또 한 번 연주가 있었는데, 랑랑은 쇼팽의 콘체르토 1번과 2번을 연주하였다. 2007년에 유럽의 언론매체들은 투표를 통해 비엔나필을 유럽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선출한 바 있으며, 현재 주빈 메타는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지휘자이다. 그리고 랑랑은 러시아의 에브게니 키신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젊은 피아니스트이다. 그리하여 비엔나필, 주빈 메타, 랑랑의 협연이야말로 오늘의 가장 환상적인 콤비라고 할 수 있다. 랑랑은 DVD와 여러 번의 연주로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지만, 중국에선 문화영웅이 되었다. 특히 그는 2008년 올림픽 개막식 연주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과거에 그의 연주는 너무 과장된 감정의 표현 또는 쇼맨십으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서는 젊은이의 패기가 넘치는 화려하면서도 성숙한 연주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우울하고 외로울 땐 음악이 ‘묘약’

랑랑은 지난 9월에 서울과 성남에서 정명훈이 지휘하는 라스칼라 필하모닉과 함께 내한공연을 하였다. 필자는 이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두 번 다 보았는데, 이들이 연주하는 차이코프스키와 말러 교향곡의 음색은 국내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소리와는 차별화된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다소 비싼 관람료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다. 그리고 랑랑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도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연주가 끝나 그의 사인을 받으려고 긴 줄을 선 젊은이들을 보면서 한국의 클래식 음악의 장래는 유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8년 10~11월은 클래식 음악의 풍년이었다. 사라장과 LA 필하모닉의 연주도 훌륭했지만, 장한나와 런던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공연은 완전매진에다 끊일 줄 모르는 기립박수를 받기에 충분하였다. 이 연주로, 바로크 음악과 비발디의 첼로 음악과는 거리를 두고 지내온 것이 잘못이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학생시절에 잠시 교회 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러본 경험밖에는 없지만, 지난 반세기 동안 음악은 필자의 꾸준한 동반자였으며, 마음이 우울해지고 상처를 받을 때 좋은 피난처가 되기도 한다. 외로운 외국 생활을 시작할 때 멘델스존과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고독을 위로해주었으며,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과 심포니는 용기를 심어주었고, 모차르트의 경쾌한 음악은 실망과 우울증을 해소해주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필자는 앞으로도 이런 좋은 친구가 옆에 있음을 행복하게 생각하면서 여생을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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