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복궁을 옆에 두고 청와대로 올라가는 길목인 종로구 통의동을 20여 년이 넘게 지켜온 화랑이 있다. 올해로 37주년을 맞은 진화랑은 처음 1972년 10월 서울 사간동에 문을 열면서 지금의 사간동 화랑 거리를 있게 한 장본인이다. 1977년 통의동으로 터를 옮기며 새로운 역사를 쓰는 진화랑의 오랜 전통은 국내외전시 등 약 300회에 이르는 전시 기록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개관 당시부터 해외전시를 감행해온 진취적인 도전은 70년대의 황무지와 같은 당시 화랑계의 사정을 고려할 때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진화랑은 갤러리 현대와 조선화랑에 이어 한국 현대 화랑의 역사를 시작한 1세대다. 이제는 통의동 주변을 화랑 거리로 만들고 있는 유위진 대표를 진화랑에서 만났다. 힘든 시절과 역경을 헤쳐 온 유 대표는 실상 그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아직도 미술에 대한 열정과 젊은 감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미술에 대한 긍지를 갖고 사는 프로이며 여전히 진화랑을 이끌 수 있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요즘 떠들썩한 전 국세청장의 미술품 비리로 말문을 연 유 대표는 “한두 사람의 잘못된 행동이 미술계 전체에 악영향을 미친다”며 “이런 잘못된 사람들 때문에 누구보다 성실히 일하는 미술계 사람들이 오해를 받고 피해를 보는데 몹시 화가 난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어려워진 경제사정으로 화랑계가 너무 힘든데 이 같은 사건에 미술품 양도소득세까지 들먹이면서 그림을 사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고 있다”며 “열심히 살아온 보람이 없어지고 너무 속상하다”고 토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랜 세월 화랑을 운영하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유 대표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미술에 대한 사랑과 긍지가 남다른 유 대표는 미술은 사치품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요즘 미술품이 주식과 증권 등과 같은 투자가치로 인식되면서 눈앞에 이익만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다”며 “미술품을 돈으로 생각하면 안 되고 자신이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작품으로 사고 수집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술을 돈과 연계된 금융으로 바라보는 폐단이 없어져야 미술이 대중적으로 사랑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의 현대미술은 아주 좋다고 칭찬하는 유 대표는 화랑계의 걱정과 함께 작가들 걱정 또한 빼놓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작가가 있지만 흔히 뜬다는 블루칩 작가만 생활이 여유로울 뿐 다른 작가들은 힘들고 고생이 많다”고 말했다. 진화랑은 일본 작가들의 전시도 많은데 작가 섭외와 전시 관련 진행에 대해서는 유 대표가 직접 일본으로 출장을 나설 정도로 열정적이며 작가에 대한 배려심이 높다. 이런 이유로 구사마 야요이 등 일본 작가뿐 아니라 진화랑에서 전시를 했던 작가들이 먼저 찾아오곤 한다. 오랜 경험과 노하우, 풍부한 감성과 깊고 심오한 느낌으로 좋은 작품을 집어내는 ‘예리한 눈’을 가진 유 대표는 개관 초기부터 좋은 작품만 있으면 된다는 신념으로 지금까지 버텨왔다. 또한 모두가 안 된다던 사간동에 화랑을 열면서 일궈낸 성과와 현재 통의동이 변해가는 모습 등 이미 지나온 세월의 결과가 유 대표의 ‘선견지명’을 입증해준다. 미술에 대한 긍지와 열정만큼 삶의 가치도 소중히 여기는 유 대표는 화랑과 15분 거리의 위치에 집을 마련하고 수십 년을 한결 같이 걸어서 출퇴근 했다. 뛰어난 미적 감각으로 꾸민 심상치 않은 옷차림으로 수십 년을 걸어 다니고 있으니 동네에서는 명물로 소문날 정도라고 한다. 이는 더 나이가 들어서도 걸어 다닐 수 있도록 미리부터 인생의 설계를 준비한 유 대표의 앞선 생각에서 나왔다. 진화랑의 진도 우리가 흔히 아는 진·선·미의 진(참 진-眞)이 아닌 유위진 대표의 진(보배 진-珍)을 딴 이름으로 유 대표는 이름에 대해서도 남다른 자부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화랑을 운영함에 있어 자본도 중요하지만 자신만의 철학과 꿈을 위한 굳은 의지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유 대표는 “화랑은 결코 쉬운 사업이 아니기에 어려움을 뚫고 나갈 개척정신과 다른 사람을 생각할 줄 아는 배려심이 아주 중요하다”고 말했다. 나만 잘되는 게 아니라 모두가 잘돼야 자신도 더불어 잘 될 수 있다는 유 대표의 오랜 경험이 보여주는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