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김윤식 序幕- 운명의 질곡을 넘어 이승과의 영원한 작별 사천성 아미산(峨眉山) 정상 한 모퉁이에 ‘석양의 낭떠러지’라고 불리는, 무려 3000미터 높이의 가파른 절벽이 도도하면서도 기묘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유난히도 청명했던 오늘, 어느덧 해거름이 가까워오자 고운 비단실로 수(繡)놓은 듯한 오색영롱한 하늘이 석양의 낭떠러지를 사뿐히 감싸기 시작했다. 저 멀리 아득하게 보이는 하늘 끝 언저리에는, 벌겋게 물든 태양이 햇무리와 어깨동무하면서 아미산 서녘을 향해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웅장해 보이는 석양(夕陽)이 영채로운 저녁놀을 연신 휘감아 올리더니, 아미산 기슭의 끝없는 운해(雲海) 위에 펼쳐 보이고 있다. 그 장관이 어찌나 황홀한지 이 순간만은 천지만물도 넋을 잃고 숨을 죽이고 있는 듯했다. 이윽고 낙양(落陽)이 하늘 끝과 입맞춤하면서 이지러지기 시작하자, 갑자기 선명한 꽃무늬로 치장한 나비 한 마리가 수만 길 낭떠러지 아래로 아스라이 떨어졌다. 언제 나타났는지 이번에는 날개옷으로 곱게 단장한 천사가 황혼에 반사된 연보랏빛 나래를 휘날리면서, 희뿌연 운해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잠시 깊은 적막 속에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고요가 흘러갔다. 그 사이 석양은 가슴까지 잠긴 채, 마지막 열정을 남김없이 불사르기라도 하듯 저녁 하늘을 붉디 붉게 태우고 있다. “다들 정말 고맙습니다. 저세상에서는 좋은 모습으로 다시 만나요. 저 먼저 갑니다……” 말쑥하게 차려 입은 젊은 청년이 형언할 수 없는 연민의 눈물을 머금고는, 마지막 인사말을 채 맺기도 전에 석양의 낭떠러지를 뒤로하고 저녁 안개가 자욱한 운해로 뛰어 들었다. “어머나!” “아아……” 아미산 정상에서 천길 만길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진 두 명의 젊은 처자와 청년 한 명의 ‘이승과의 작별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 속에서, 야트막한 외마디 비명과 함께 한탄스런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알 수 없는 전율이 느껴지고 소름이 돋을 만큼 적막에 휩싸였던 절벽이, 그제서야 몇몇 사람의 웅성거리는 소리로 약간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또 한 젊은 처자가 잠시 들썩이는 주위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절벽 끝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저 멀리 아득한 산마루터기에 반쯤 잠긴 낙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잠시 상념에 빠져드는 듯했다. 거기에는 열 예닐곱 명 정도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녀를 말리려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그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애절한 눈빛으로 자신의 혼란스런 심정을 혹 누가 눈치라도 챌세라, 남몰래 가쁜 호흡만 내쉴 뿐이었다. “아아~ 안돼요! 잠깐만요~!” 젊은 처자가 막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지려는 찰나, 어디선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청아한 목소리의 어린 소년의 외침이 긴박하게 들려왔다. 그 외침은 곧장 메아리가 되어 삽시간에 절벽 아래 운해 속에 회돌아 울려 퍼지면서, 저녁 노을에 흠뻑 젖어든 석양의 낭떠러지에 일순간 긴장감이 스며들었다. 젊은 처자는 순간 멈칫하며 놀라는 표정으로 뒤돌아보면서, 반사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 동시에 나머지 사람들 모두가 황혼의 정적을 깬 곳으로 일제히 몸을 돌려 시선을 집중했다. 저만치서 사람들을 정중히 헤치며, 세 사람이 무리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동자승(童子僧)이 맨 앞에서 길을 열고, 연로한 두 스님이 그 뒤를 따랐다. 군데군데 해지고 기워진 바랑을 등에 멘 채, 오래 묵어 색이 바랜 목탁을 들고 있는 삭발한 스님은 위엄스러우면서도 인자한 인덕이 물씬 풍겨 나왔다. 다른 한 스님은 허름한 삿갓을 깊게 눌러 쓰고 기다란 나무 지팡이를 짚고 있는데, 팔목에 건 굵은 염주와 어깨 너머까지 치렁치렁 흘러내린 은빛 머리칼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무애(懋涯)야!” 삭발한 스님이 이내 발걸음을 멈추더니, 옆에서 시중하는 동자승을 점잖게 불렀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곁들인 눈짓으로 뭔가를 얘기하는 것 같았다. 무애는 두 손을 합장하고 깊게 머리 숙여 염화미소(拈華微笑: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과 마음이 통하여 깨달음을 얻음)로 화답한 뒤, 발 빠르게 젊은 처자에게로 다가갔다. 처자는 뜻밖의 상황 발생에 굳은 몸으로 어리둥절한 채, 낭떠러지 끝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앞에 다가선 동자승은 아무 말 없이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영문을 모르는 처자는 수줍은 듯 엷은 홍조를 띠며 조금 당황하는 눈치였다. 무애가 제법 의젓한 몸짓으로 조그맣고 앙증스런 손을 내밀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처자는 알 수 없는 위압감과 문득 느껴오는 따뜻한 정감에 아무 저항도 못하고, 희고 가녀린 손을 무애가 내민 손에 살포시 포갰다. 민망스러움이 앞서는지 고개를 떨구고,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이내 솟구치는 설움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 어린 동자승이 그녀의 발길을 돌리려 살며시 손을 당기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연신 훔치면서 무거운 걸음걸이로 따라나섰다. 삭발한 스님은 마음이 급했는지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 젊은 처자의 두 손을 꼭 잡으며 반갑게 맞이했다. 처자는 더욱 감정이 복받쳐 오는지,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감싼 채 계속 흐느꼈다. 그 모습을 못내 안쓰러워 하던 스님이 처자의 어깨를 살며시 어루만지며, 인자함이 넘치는 미소로 위로하고 달래 주었다. 그 스님은 바로 당대 아미산 최고의 고승으로 추앙받고 있는 담운 선사(覃雲禪師)였다. 어느 샌가 석양의 낭떠러지와 망망운해를 감싸던 장엄한 황혼이 홀연히 사그러지나 싶더니, 저 아래 아미산 기슭부터 짙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