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률 30%를 돌파해 최고 인기라는 드라마 <추노>에는 가끔 대사에 별난 자막이 따라붙는다. 이런 식이다. 대사: 반노(叛奴) 일로 심상(心傷)하여 분루(忿淚)가 종횡무진(縱橫無盡)하더니, 이리 추쇄(推刷)하여 만분다행(萬分多幸)일세. (자막: 도망 노비 때문에 열 받아서 눈물 날 지경이었는데, 그나마 잡아서 다행일세.) 극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대사 처리에 대해 “식자층을 만나면 영어를 자꾸 섞어 쓰는 모습을 보고 생각해냈다”고 말했다. 역사극의 묘미는 당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데 있지 않다. 그대로 보여줄 수도 없다. 이 드라마의 무대가 조선조 제16대 인조(1595~1649년) 당시라니, 지금과는 언어 생활이 달랐을 당시의 말로 연기를 하면 시청자들이 알아듣지도 못한다. 그래서 역사극은 항상 ‘지금, 여기’ 사는 사람 입장에서 만들고 보면서 현재의 교훈을 꺼내게 된다. 그런 면에서 이 드라마에서 양반님네들의 언어 생활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인조 때 양반님네들의 언어 생활과 현대 한국인의 언어 생활은 얼마나 다른가. 위의 대사처럼 중국말도 아니고 조선말도 아닌 말을 당시에 했다면, 현대 한국인들은 배운 사람일수록 영어도 아니고 한국말도 아닌 언어 생활을 하고 계신 것 아닐까? 영어를 잘하는 것과 영어를 섞어 쓰는 것은 완전히 다른데… 영어를 잘하는 것과 영어 단어를 말이나 글 속에 섞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인데도, 한국인들은 이 두 가지를 헷갈려 한다. 영어를 잘해야 대접받는 세상이 되다 보니, 영어는 잘 못 해도 어떻게든 영어 단어를 입에 올리려 애쓴다. 사회의 리더일수록 이런 현상이 심하니, 보통 사람들은 더 확실하게 망가진다. 예를 좀 들어보자. 어느 빌딩의 엘리베이터를 타니 ‘E/L에서는…’으로 시작하는 안내문이 있다. E/L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단어는 어느 나라 말인고? 엘리베이터를 이렇게 표현한 모양인데, 미국 사람이라도 한참 헷갈릴 단어다. ‘엘리베이터’라는 긴 글자가 들어갈 공간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충분한 공간이 있었다. 승강기 업계에서는 엘리베이터를 E/L로 쓰는지도 모르겠다. 자기들끼리 약자로 쓰는 거야 자기들 마음이지만, 안내판에는 그렇게 쓰면 안 되는데 거기까지는 생각이 안 미치는 모양이다. 국적불명의 ‘콩글리시’ 써서 망신을 사는 깊은 뜻은? 어느 헬스클럽에 가니 큰 글자로 ‘Be the Hardest’라고 써놓았는데, 이건 또 무슨 뜻인가? 아마 Study hard(열심히 공부하라)라는 문장에서 hard를 따와, ‘제일 열심히 하는 사람이 되라’고 써놓은 것 같은데, hard라는 단어는 동사랑 함께 쓸 때나 ‘열심히’란 의미가 되지, 동사 없이 쓰면 ‘딱딱하다’는 의미가 기본이다. 그렇다면 뜻은 ‘가장 딱딱한 사람이 되라’는 뜻? 고객이 대부분 남자인 헬스클럽에서 ‘가장 딱딱한 남자 되라’는 구호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좀 야하다. 한국인이 폼 잡으려 쓰는 영어가 망신거리 또는 조롱거리가 되는 순간이다. 어느 차는 뒤창에 ‘Childs in Car’라고 스티커를 붙여놓았다. 그런데 childs란 단어는 영어에 없는 단어인데? ‘아기가 타고 있어요’란 아름다운 우리말이 있는데 왜 콩글리시를 써서, 외국인은 헷갈리게 만들고, “무식하기는”이란 비아냥거림을 받으려 하는지 그 깊은 뜻을 모르겠다. 아니면, 자신은 무시당해도 만인에게 웃음을 주겠다는 깊은 뜻일까? 그렇다면 고차원이긴 한데, 별로 우습지는 않다. 간결하면서도 정확한 한국어를 써야 할 기자들마저 P/T니, ICL법이니, 도대체 원어민도 못 알아먹을 콩글리시 단어들을 아무 설명 없이 마구 기사에 써대니, 도대체 제정신들인지 모르겠다. 배운 한국인들이 이처럼 무지막지한 영어를 마구 써대면, 정말 현대판 양반님네들의 말에는 ‘추노식 자막 처리’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