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환 (미술평론가) 천강에 비친 달. 정산 김연식이 근작에 부친 주제이면서, 사실상 자신의 전 작업을 아우르는 주제의식이다. 달은 하난데, 그달이 천개의 강에 비치면서 천개의 달이 된다. 하나의 실체와 천개의 반영상. 실체는 오직 하나일 뿐, 만유는 그 하나로부터 유출된 반영이며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로써 세계는 그대로 그 하나를 비추는 거대한 거울이 된다. 이와 함께 천개의 강은 천개의 존재를 상징하고 천개의 다른 마음을 상징한다. 그 다른 마음의 거울에 다른 달이 비친다. 실상의 달은 그대로인데, 저마다 다른 마음이 다른 달을 반영하고 욕망하도록 미혹한다. 실체는 그대로인데, 반영은 움직인다. 이렇게 달은 저마다의 마음속에서 상실한 고향이나 원형을 일깨워주고, 누이를 떠올리게 하고, 동화적이고 신화적인 상상력을 자극하고, 어스름 달빛 아래서 저 홀로 눈물을 훔치거나 칼을 씻게 만들고, 피폐해진 영혼을 달래주거나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주제가 실제와 가상, 원본과 복제의 관계와 관련한 ‘시뮬라시옹’마저 건드리고 있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시뮬라크라는 없는 것을 있는 양하는 것이다.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이미지가 공공연한 시대에 달은? 달의 실체는? 모니터 위에 떠 있는 달과 하늘 위에 떠 있는 달의 차이는? 픽처레스크. 그림 같은 풍경이란 말이며, 여기서 그림은 풍경의 기준이 된다. 모니터 위에 떠 있는 달이 하늘 위에 떠 있는 달의 모태며 모본이 된다? 실체와 반영의 전복? 공간설치. 작가는 성냥갑 크기의 포맥스 위에 인쇄물을 콜라주하고, 그 위에 붓(엄밀하게는 매니큐어 붓)으로 달을 그려 넣는다. 여기서 콜라주 된 인쇄물은 잡지 등 각종 대중매체에서 발췌한 것으로서 세상만사와 인간사를 상징한다. 그리고 그 위에 그려 넣은 달 그림은 달의 감각적 실제 그대로를 옮겨 그린 재현적인 것이기보다는 그저 붓을 들어 한 획에 그린 것으로서, 그 드러나 보이는 형식은 드로잉에 가깝고, 대상과의 유사성을 따지자면 달을 관념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상형한 것에 가깝다.
작가는 이렇게 성냥갑 크기의 오브제 수천, 아니 수만 개를 만든다. 그리고 그 낱낱의 오브제를 단위원소 삼아 첩첩이 병렬시키는데, 이미지가 그려져 있지 않은 흰 측면이 전면을 향하도록 직각으로 세워 벽면에다 부착하는 방법으로 전시공간의 내 외벽을 여백이 없이 감싼다. 이렇게 건물 외벽에다 <천강에 비친 달>을 조형한다. 이렇듯 오브제로 건물을 통째로 감싼 탓에 원래의 건물은 온데간데없고, 건물 자체가 하나의 작품으로 탈바꿈된다. 시선을 이동시키면서 보면 오브제의 한쪽 면에 달이 그려져 있고, 반대쪽 면은 하얗게 비어 있다. 한쪽에서 보면 달이 보이고, 다른 쪽에서 보면 텅 빈 화면이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비친 달, 반영된 달, 저마다의 마음속에 떠 있는 달을 조형한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건물 외벽을 빌려 달을 조형하고, 건물 내벽을 통해서는 <무>(無)를 주제화한다. 똑같은 크기의 포맥스 위에 이번에는 달을 그려 넣는 대신 한자 무(無)를 써 넣었다. 사실은 큰 화면에 한자 무(無)를 쓰고, 이를 성냥갑 크기의 오브제로 나눈 것이다. 달을 그릴 때와 마찬가지로 매니큐어를 이용해 문자를 쓰는데, 색상의 점진적인 변화를 꾀하는 점이 달 작업과는 다르다. 이렇게 조성된 작업에서는 보는 시점에 따라서, 저마다의 관점 여하에 따라서 그 실체가 달라져 보인다. 즉 한쪽 면에서 보면 아무런 이미지도 없는 흰 바탕 면이 드러나 보이고, 반대편에서 보면 이미지가 드러나 보인다. 더불어 시점을 이동하면서 보면 검정에서 은회색으로, 어두운 화면에서 밝은 화면으로 점차 변해가는 색상 스펙트럼이 드러나 보인다. 이로써 어두운 화면에서 밝은 화면으로, 물적 화면에서 관념적 화면으로, 찬 화면에서 빈 화면으로의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무(無)의 관념을 상형한다.
구. 한편으로 작가는 건물 외부에 벽면 설치작업과 함께 거대한 스테인리스 구를 설치했다. 벽면 설치작업에서 달이 상징적이고 암시적으로 상형 됐다면, 이 구는 상대적으로 달의 원형적 실체에 근사한 경우로 보인다. 그 구는 그대로 달이면서, 천개의 달을 반영하는 천강처럼 저마다 다른 마음의 질감이면서, 거울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주이기도 하고, 지구이기도 하고, 만화경처럼, 파노라마처럼, 수정 공처럼 일순간에 세상만사를 반영해 보이는 삶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그 원형 거울에 자기를 비춰보고, 다른 상들이 비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또한 작가의 작업을 관류하는 핵심논리랄 수 있는 실상과 허상, 유와 무가 서로 통하는 열린 경계에의 인식, 혹은 양가성 내지는 상호내포적인 관계에의 인식을 또 다른 형식으로 변주해낸 경우로 볼 수 있다. 구는 시작과 끝이 따로 없고, 그 구의 거울에 비친 상은 있으면서 없고, 존재하면서 부재한다. 매니큐어 그림. 작가는 매니큐어로 달을 그리고 문자를 쓴다. 웬 매니큐어냐고 하겠지만, 생각해보면 매니큐어 만한 그림 도구도 따로 없지 싶다. 손에 쏙 들어오는 손잡이며 그 끝에 달린 붓, 그리고 게다가 온갖 현란한 색채에 이르기까지. 그런데, 천강에 비친 달이나 무(無)와 같은 불교의 교의를 그림으로 도해한 도상을 매니큐어로 그리는 것은 좀 그렇다. 아무래도 매니큐어에 대한 막연한 선입견과 속된 의미가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개념과는 선뜻 매치되지가 않는다. 작가는 이런 선입견을 불식시키기라도 하듯(매니큐어를 속된 의미로 보는 것이야말로 마음이 불러일으킨 작용이며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매니큐어를 재료로 달을 그리고 부처를 그리고 불법을 쓴다. 매니큐어는 특히 부처 그림에서 그 빛을 발한다. 화려하고 현란한 부처, 욕망과 애욕의 화신으로 현현한 부처가 부처에 대한 선입견을 불식시키고, 고전적 부처를 현대판 부처로 재생시킨다. 금기가 인간의 율법이라면, 자비가 부처의 계율이다. 세속적인 상식으로는 제도가 욕망을 조장하고, 그 욕망을 구실 삼아 욕망을 금지하는 금기를 만들어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사실 처음부터 욕망은 없었다. 욕망이 없었으므로 욕망을 금지하는 금기도 없다. 욕망이나 금기나 다만 마음이 불러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