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구의 음악이야기]유럽의 음악 페스티벌을 찾아서 <2>

마에스트로 아바도의 루체른 여름축제와 브레겐츠의 ‘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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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86호 편집팀⁄ 2010.09.06 17:28:53

글·이종구(이종구심장크리닉 원장) 2009년 8월, 필자는 예술의전당과 성남아트센터의 후원회원들과 함께 피아노의 백건우 선생이 이끄는 디나르(Dinard) 페스티벌, 아바도가 감독하는 루체른(Lucerne) 페스티벌, 그리고 브레겐츠(Bregenz)의 수상 오페라 페스티발에 다녀왔다. 지난 여름에 펼쳐진 디나르 하기 페스티벌은 폴란드의 작곡가 펜데레츠키(Penderecki, 1933년생)가 지휘를 맡았으며, 자신이 작곡하여 마에스트로 백건우에게 헌정한 <피아노 협주곡 부활, 제2편곡>을 백건우 선생이 연주하는 뜻깊은 야외 콘서트였다. 아바도(Abbado, 1933년생)는 전 세계적으로 존경과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는 지휘자의 한 사람이다. 카라얀과 번스타인이 서거한 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지휘자를 뽑는다면 다니엘 바렌보임(Barenboim), 주빈 메타(Mehta)와 아바도를 들 수 있다. 이 중에서도 베를린 필을 23년 간이나 감독하고 말러 챔버오케스트라와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창립한 아바도의 업적은 가장 뛰어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루체른 페스티벌은 1998년에 건립된 루체른의 KKL 콘서트홀(Culture & Congress Center)에서 열린다. 루체른 호숫가에 위치하고 있는 이 건물은 세계 최고의 음향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 물 위에 떠 있는 듯 보이는 이 건물의 자태는 뛰어난 주위의 경관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콘서트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루체른 페스티벌은 1938년에 시작되었는데, 첫 공연은 토스카니니가 지휘했다. 그 당시 토스카니니는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였기 때문에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는 지휘를 할 수 없었으나, 중립 국가인 스위스의 루체른에서는 지휘가 가능했던 것이다. 1938년에 창립된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1993년에 해체되는 비운을 맞았으며, 이 음악 페스티벌은 객원 오케스트라로 유지되고 있었다.

아바도는 위암 치료를 받으면서, 1982년부터 맡아왔던 베를린 필의 음악감독을 사임하고, 2002년에 오늘의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창립했다. 이에 앞서 그는 유럽 청년 오케스트라(1978)를, 그리고 1986년에는 지금의 말러 챔버 오케스트라의 전신인 말러 청년 오케스트라를 창립하는 등 젊은 세대의 음악인 양성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아바도는 카라얀으로부터 베를린필을 인계받기 전에는 라 스칼라 오페라단(1968~1986), 비엔나 국립 오페라단(1981~1991),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1979~1987),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1982~1986)를 지휘하는 등 최고로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외에도 그는 수많은 음반과 DVD를 내놓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리고 2000년에 아바도는 위장의 3분의 2를 절제하는 대수술을 받고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체중이 감소하였으나, 이 위기를 더 큰 도약의 기회로 만들어 루체른 페스티벌을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축제로 발전시켰다.

8월 12일 우리 일행은 이날 밤 루체른 페스티벌의 초야 공연을 보았다. 이 콘서트는 프로코피예프(Prokofiev)의 으로 시작되었으며, 피아니스트는 중국의 유자 왕(Yuja Wang, 王羽佳)이었다. 유자 왕은 1987년생의 젊은 피아니스트이지만, 지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피아니스트인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우리를 인솔한 음악해설가 장일범 씨에 의하면, 유자 왕은 최고 수준의 연주를 보여주었으며, 빠른 속도와 포르테 연주에는 젊은 천재답게 최고의 기량을 과시했으나, 느린 피아니시모 부분에서는 아쉬운 점이 있었다고 평하였다. 그러나 내가 가장 기대했던 곡은 역시 말러의 <심포니 1번>이었다. 나는 루체른 페스티벌에는 처음으로 참가했지만, 그들의 말러 심포니 3번, 5번, 6번 등 DVD를 여러 편 보았기 때문에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우선 아바도가 건강한 모습으로 열정에 넘쳐 지휘하는 모습을 보니, 그는 위암을 완전히 극복한 듯이 보였다. 루체른 페스티벌에는 유럽의 멋쟁이들은 다 모이는 듯하였다. 화려한 긴 드레스 차림의 여성들과 턱시도를 입은 멋쟁이 신사들이 콘서트가 시작되기도 전에 샴페인을 마시면서 대화하는 모습은 몹시 우아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음악에 조예가 깊은 클래식 팬은 아닌 듯하였다. 말러의 <심포니 1번> 1악장이 끝나자 박수가 나왔는데, 아바도가 손을 번쩍 들어 박수를 제지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즉, 음악을 듣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멋진 옷차림으로 잘 보이기 위해서 온 관객들도 더러는 있던 것 같다.

‘거인(Titan)’이란 제목이 붙은 말러의 <심포니 제1번>은 1884년부터 1888년 사이에 교향시로 작곡되었다. 말러는 베를리오즈(Berlioz)의 와 리스트(Liszt)의 와 같은 설명이 붙은 표제음악으로 시작하였으나, 1889년에 <교향곡 D major>로 완성한 것이다. 1악장은 '영원한 봄'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새 소리가 들리고 꽃이 피어나는 대자연 속 봄의 탄생을 축복하는 음악처럼 들렸다. 제2악장은 무곡(Landler)으로서 경쾌한 민속음악처럼 들렸다. 제3악장은 동물들이 사냥꾼의 장례식을 치르는 장송곡이 주제인데, 세계의 모든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노래 의 멜로디를 주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이었던 4악장은 “폭풍이 들이닥치듯 동요하고 정열적”으로 연주하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말러는 “나에게 심포니는 우주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생각하며 124명의 세계 최고 수준의 단원들이 만들어내는 4악장을 들으면서 나는 우주가 빅뱅으로 탄생할 때 이런 소리가 들렸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선율의 에너지는 영원히 팽창해 나가고 있는 우주의 에너지를 상징하는 듯하였다.

8월 13일 다음날에는 말러 챔버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었다. 이 오케스트라는 1977년에 아바도에 의해 창립되었으며, 약 50명의 단원으로 구성되었는데, 대부분의 단원들은 말러 유스 오케스트라 출신이다. 그리고 이들이 매년 여름에 모이는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핵심 멤버가 되는 것이다. 이들은 여름에는 루체른 페스티벌에 참여하지만, 연중에는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연주를 하고 있다. 이번에는 영국의 현대 작곡가 겸 지휘자인 조지 벤저민(George Benjamin)이 지휘를 맡았는데, 자신이 작곡한 를 지휘했다. 그 외에도 와그너(Wagner)의 <지그프리드의 목가>와 요르단 비드만이 2009년에 작곡한 <오보에 콘체르토>를 스위스 태생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보이스트 하인츠 홀리거(1939년생)가 초연하였다. 이 모두가 한국에서는 들어보기 어려운 곡들이다. 8월 14일 다음날, 우리는 좀 더 오래 머무르면서 다양한 음악을 체험할 수 없었던 일정을 아쉬워하면서, 브레겐츠의 수상 오페라 <아이다>를 보기 위해 이 아름다운 루체른 호숫가 공연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브레겐츠의 <아이다> -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의 이야기 2009~2010년에 브레겐츠는 현대식 무대로 장식된 베르디의 <아이다>를 공연하였다. <아이다>는 이집트의 나일강변을 배경으로 한 오페라이다. 그러나 과거의 <아이다>들은 강물을 배경으로 작품을 올리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사막을 배경으로 하였다. 하지만 콘스탄스 호수를 나일강으로 상상하면 <아이다>의 수상 무대도 전혀 어색하지 않아 보였다. 이 <아이다>의 감독은 그래힘 빅(Vick)이며, 무대 디자이너는 폴 브라운(Brown)이다. 이 두 사람은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깨뜨린 모습을 한 ‘깨어진 여신상’을 무대로 만들었는데, 이것은 하나의 가상 공간이다. 3500년 전 이집트의 나일강변일 수도 있지만, 오늘의 뉴욕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제작자들은 왜 깨진 자유의 여신상을 무대로 만들었을까? 오늘 이 세상에는 고대 이집트처럼 노예는 없지만 자유를 박탈당한 자는 많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과 아주 가까이 살고 있지 않은가? 나는 이 오페라를 보면서, 제작자들이 <아이다>를 통해 억압을 하는 자와 억압을 받는 자, 즉 자유를 뺏은 자와 빼앗긴 자들의 이야기를 펼쳐내려 한 의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다>를 볼 때마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왜 승리의 장군 라다메스가 왕의 딸 암네레스를 마다하고 노예가 된 아이다를 택했을까 하는 점이다. 과거의 <아이다>에서 암네레스는 뚱뚱하고 그다지 아름답지 못하면서 억압적인 여인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이번 브레겐츠에서는 암네레스 역을 날씬하고 뛰어난 미모의 이아노 타마르가 맡았는데, 이 메조소프라노가 모든 출연자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노래도 잘 부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공주는 노예를 개처럼 끌고 다니면서 국민을 억압하는 못된 인간으로 묘사되었다. 그리하여, 라다메스 장군은 공주와 결혼하면 이집트의 모든 영광과 부, 그리고 왕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음에도 그 모든 것을 저버리고, 자신의 조국과 부모를 지극히 사랑하는 흑인 아이다를 사랑하며 죽음까지 택하게 된 것이다. 이 오페라의 가장 유명한 하일라이트는 개선장군 라다메스가 궁전으로 돌아오는 장면이다. 베로나에서는 개선행진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수많은 병사들의 호위 속에 라다메스가 살아 있는 코끼리를 타고 나타난다. 그러나 이번 브레겐츠에서는 라다메스 장군이 황금으로 된 코끼리를 배에 태워서 돌아온다. 이 황금빛의 코끼리는 살아 있는 코끼리보다 승리의 호화찬란한 분위기를 더 잘 만들어준다. 이번 오페라에서 또 하나의 특징은 이집트의 사제 대신에 화려한 복장을 한 가톨릭 사제들이 왕(권력)의 편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는 그래힘 빅이 과거 이집트 시대의 <아이다>를 현대판 <아이다>로 만들면서 국가의 권력과 가까이 지내며 부유해진 교회를 고발해보려는 뜻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작년의 <토스카>에서 가톨릭 성직자들이 권력의 편에 서서 등장하는 내용도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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