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0호 편집팀⁄ 2010.11.03 17:53:52
이한성 동국대 교수 길 떠나며 - 길에는 바람이 있고 빛이 있고 계절이 내려앉고 옛사람들의 발자취가 서려 있다. 배낭을 매고 길 위에 서면 번잡한 일상은 뒤에 남고 홀가분한 마음이 된다. 그래서 한번 길을 나서 본 사람들은 또 길 위에 서게 된다. 올 가을에 떠나는 길들은 조선시대 한양을 둘러싼 경계(한산~아차산~관악산~덕양산)를 크게 넘지 않으면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한나절에 다녀 올 수 있고, 3~4시간 정도 산길-구릉길을 걸을 수 있는 코스로 구성했다. 주로 마애불(磨崖佛)을 볼 수 있는 산길들이다. 굳이 불교 신자가 아니라도 마애불에 담긴 우리 민족의 미의식과 삶에 대한 소망을 새롭게 발견하며 답사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길들이다. 인왕산 남녘 길로 첫걸음을 옮긴다. 경복궁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조금 후면 옥인아파트에 도착한다. 이 골짜기는 본래 옥류동으로 조선시대에는 청운동 뒤 계곡인 청풍계와 함께 인왕산을 대표하는 물 맑은 곳이었다.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의 집 ‘비해당(게으름 피지 않는 집)’이 옥류동 골짜기 옆 수성동에 있었고, 안견이 ‘몽유도원도’를 탄생시킨 꿈도 아마 이 근처에서 꾸었을 것이다. 또한 겸재 정선도 이 골짜기 아랫동네에 살았는데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인왕산제색도’는 이 근처 풍경을 그린 진경산수화의 정수다. 그러던 이곳이 개발바람에 휩쓸려 골짜기는 복개되고 시민아파트가 세워졌었는데 다행히 이제 아파트를 철거하고 옛 모습을 조금이나마 회복한다고 한다. 철거가 진행되는 옥인아파트 옆을 지나 인왕산길로 올라선다. 도로 위로 들어서 우측으로 30m쯤 가면 산으로 오르는 돌층계가 나타난다. 초병이 어디 가냐고 묻는다. 석굴암에 오른다고 대답하자 친절히 길을 알려 준다. 무장간첩 침투 사건인 1.21사태 이후 인왕산의 모든 길이 막히고 절과 암자는 대부분 폐사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석굴암은 폐사를 면했다. 가파른 계단과 산길을 15분쯤 오르니 돌층계 끝에 조그만 절 석굴암이 나타난다. 자연 암반 속에 대웅전을 꾸민 그야말로 석굴암이다. 산신각에는 암벽에 그린 인왕산 산신도가 있다. 이 절집 좌측에 마른 계곡이 있는데 이곳을 건너면 큰 암벽 아래 마애 산신이 있고 그 옆에는 마애미륵불이 서 있다. 마애미륵불상의 시선은 서울 시내를 그윽이 내려다본다. “오늘도 모두 편안하시게!”라고 자애롭게 말하는 듯하다. 한시 한수를 지어 마애불님께 여쭤본다. 다음 갈 길은 두 갈래가 있다. 산을 오르기 힘든 이들은 올라온 층계로 다시 내려가면 된다. 내려가다 인왕산길 순환도로에 닿거든 우향우! 좌로 가면 부암동 창의문이니 오른쪽으로 간다. 15분 정도 걸어가면 서울 성벽을 만나는데 50m쯤 직진하면 왼편에 공중화장실이 있다. 이 곳 앞이 건축자재가 쌓여 있는 공터인데 이곳으로 들어 가 조금만 더 가면 아름다운 오솔길이 나온다. 그 끝이 국사당이다. 또 다른 한 길은 정상으로 가는 길이다. 산을 오를 만한 이들은 석굴암 옆 마른 골짜기 길로 올라가자. 예전에는 석굴암으로 해서 정상에 오르던 등산로였으나 이제는 아는 사람만 일부 다니는 길이라 다소 흐릿하다. 20분 정도 오르면 성벽 길에 도착한다.
폐비 신씨의 치마바위가 바로 코앞에 성벽길에서는 치마바위가 바로 코앞이다. 500년 전, 연산군에 반대하는 세력이 반정을 일으키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니 바로 중종이다. 이 분의 부인이 신(愼)씨였는데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과 처남·매부 사이였다. 그래서 남편이 왕이 된 지 일주일 만에 폐비가 되어 궁에서 쫓겨났으니 기구한 신세였다. 쫓겨난 신씨는 경복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 곳 치마바위에 당신의 붉은 치마를 걸어 놓아 서방님이 보시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끝내 폐서인으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는데, 230년이 지난 영조 때에 와서야 복위가 되어 지금 장흥 온릉에 잠들어 계신다. 한편, 중종은 조강지처 버린 뒤에 비빈을 11명이나 두었다. 성벽을 따라 5분을 가면 인왕산 정상이다. 금년이 경인년(庚寅年)이다. 경인은 오행으로 보면 서백호(西白虎)다. 서울의 풍수를 보면 인왕산이 서백호이니 인왕산이 바로 2010년 올해의 산인 것이다. 이를 아는 많은 이들이 금년 새해 해맞이를 인왕산에서 했다. 늦었지만 아직 인왕산에 오르지 않은 이들은 해 넘어가기 전에 인왕(仁王)에 오르시라. 반드시 범의 용맹함으로 기가 넘치실 것이다. 성벽을 따라 내려오면 도로와 만난다. 이 지점부터는 위에 설명한 길과 중복된다. 오솔길 지나 국사당에 닿는 길이다.
남산서 쫓겨난 조선 국사당도 이곳에 국사당은 본래 남산 정상에 있었다.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뒤 백악산(지금의 북악산)과 목멱산(지금의 남산)에 신사를 짓고 매년 제사를 올렸다. 그 중 목멱신사가 바로 국사당인데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조선 신궁을 짓는다고 목멱신사를 지금의 인왕산 선바위 아래로 옮겼다. 일본신을 모신다고 주인인 조선신을 쫓아냈으니 나라 잃은 설움이 이에 더하랴? 국사당에 국사로 모셔져 있는 무학대사가 통탄했을 것이다. 남산 팔각정 옆에는 국사당 터였다는 표지석을 세워 놓았다. 지금의 인왕산 국사당은 무속의 중심처가 되어 굿이 자주 벌어진다. 민속자료인 무속 그림들이 눈길을 끈다. 이곳에서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 운동하는 곳과 약수터를 지나고 길 끝 바위에 조그만 마애불이 있다. 동네 사람들이 망치만 들고 새겼음직한 민불인데 풍우에 많이 마모되었다. 이 동네 사람들은 이 마애불을 제석님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 모습을 살펴보면 민초들 머릿속으로 그려낸 석가여래가 아닌가 싶다. 너무도 순진한 모습에 가슴이 찡하다. 다시 내려 와 국사당 앞 언덕으로 오르면 돌층계 위에 장삼을 두른 두 스님 모습의 선바위(선암 禪岩)가 있다. 이곳에서 기도하면 아들을 낳는다 해서 기자암(祈子岩)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부터 있어 온 오랜 전통이다.
필자가 아는 처사님도 딸만 넷을 둔 뒤 이곳에 올라 자주 기도하시더니 그 뒤로 아들 셋을 두셨다. 정말로 이 선바위가 영험이 있었던 것일까? 또는 운동효과였을까? 선바위를 둘러싸고 유명한 이야기가 야사에 전해져 온다. 서울 도성을 쌓을 때 무학대사는 선바위가 도성 안에 있도록 경계를 잡자고 했고, 삼봉 정도전은 불교가 성행할까 걱정해 선바위가 도성 밖에 놓이도록 성벽을 쌓자고 했다고 한다. 두 사람 의견이 좁혀지지 않자 태조 이성계가 결론을 내렸다. 어느 날 눈이 내렸는데 그 눈이 내린 흔적대로 성을 쌓으니 지금의 서울 도성이라 한다. 결국 선바위는 도성 밖으로 밀려 나고 조선은 유교국가가 되었다는 야사의 한 토막이다. 선바위에서 우측으로 내려가면 허름한 민가 같은 암자들이 있는데 그 끝 우측 바위 아래 또 한 분 마애불이 있다. 역시나 민초들이 모신 미륵불이다. 예술적 가치는 없어도 민초들의 염원이 살아 지금도 많은 보살들의 기도처가 되고 있다. 하산 길은 무악 현대아파트의 남쪽 길, 또는 북쪽 길 어느 길이나 무관하다. 하산하면 3호선 독립문역이다. 여기서 그냥 전철을 타기에는 너무 아쉽다. 길을 건너면 독립문공원이다. 서대문형무소에도 들러 보자. 일제에 항거하던 그 시절의 모습들이 생생히 재현되어 있고 역사적 흔적들도 많다. 이 곳 관람이 끝나면 독립문과 영은문의 석주(石柱), 모화관의 흔적도 독립문공원에서 만날 수 있다. 이제 출출하거든 서민들의 메뉴로 입맛을 돋우며, 탁주 한사발로 피로를 푸는 것도 좋다. 영천시장에 들어가면 싸고 맛있는 전(煎)집들이 있고, 영천시장 건너편 교북동에는 장안의 유명한 도가니탕집 ‘대성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