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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이야기가 있는 길] ② 윤동주 시인 올랐던 언덕엔 ‘천왕폐하만세’ 돌도 서있고…

서울 물길 발원지부터 ‘인조반정’ 핏빛어린 홍제원 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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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91호 편집팀⁄ 2010.11.03 17:53:25

이한성 동국대 교수 자하문(紫霞門, 원 이름은 창의문) 고개에서 버스를 내린다. 이곳에서 동으로 오르면 북악산, 서로 오르면 인왕산이다. 주말에는 제법 사람들이 붐빈다. 서울 성곽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이 늘기 때문이다. 서두르지 말고 주위를 한 번 둘러보자. 씩씩한 기상의 동상 한 분이 서 계시다. 1968년 1월 21일, 공비(共匪)라는 단어를 새삼스럽게 쓰게 한 북한의 1.24군 부대 특공대의 청와대 침투를 막다가 이곳에서 산화한 최규식 경무관이다. 조선 초기 풍수의 대가 최양선이라는 이가 있었다. 왕조실록(태종 13년 6월 19일, 1413년) 기록에는 그가 ‘창의문과 숙정문(성북동 쪽 도성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서’ 문을 내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고 나온다. (야사에는 ‘이 문을 열면 아랫마을 여자들이 바람이 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이를 두고 중신들과 말도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두 문은 닫혀 있던 세월이 열려 있던 세월보다 더 길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청계천 발원지 표석이다. 예부터 청계천(옛 이름 개천開川)은 이 곳 백운동에서 발원해 인왕산 청풍계 물과 합쳐지고 다시 삼청동 계곡수, 남산 청학동 물, 낙산 반촌 쌍계동 물과 합쳐져 오간수문(동대문 옆 청계천)으로 빠져 나갔다. 그러니 이 지점은 수도 서울 물줄기의 시원이다(요즘은 세종로 광장 한 쪽에 청계천의 인공 발원지를 만들어 놓아 발원지를 대신하고 있다). 이곳 바로 아래 동네 이름이 청운동(淸雲洞)인데 이는 이곳 물줄기인 백운동과 인왕산 청풍계에서 따온 이름이다. 조선 시대에는 장동이라 불렸고 장동 김씨(안동 김씨 중 이 곳에 살던 이들)는 조선 세도가의 대명사였다. ‘가노라 삼각산아’의 김상헌 선생과 송강 정철 선생이 모두 이 곳 장동 출신이다. 눈길을 북으로 돌려 창의문으로 가 보자. 이 문이 북소문인데 외진 곳에 있다 보니 조선시대 4대문, 4소문 중 가장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문루로 올라가면 편액에 인조반정 공신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귀, 김유, 김자점…. 인조에게는 공신이지만 역사적으로는 병자호란의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들 목록이다. 윤 시인이 올랐다는 언덕에서 멀지 않은 코 우뚝한 미륵불은 민초의 염원인가 광해군은 북인과 함께 정권을 이끌어 나갔는데 다수파인 서인은 자연히 찬밥 신세가 됐다.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앞세워 정권을 탈환하려 했던 서인들을 광해군이 핍박하자 “패륜”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했다. 이후 조선은 서인과 노론(서인의 한 파)의 나라가 됐고, 힘의 균형이 깨지면서 몰락하고 말았다. 이번 답사길의 종착점은 홍제원 옛터. 거기 모인 인조반정군이 창의문을 통해 들어와 궁궐을 덮쳤다. 오늘 답사 길은 반정군의 출발과 도착지를 잇는 선이다. 길을 서쪽 인왕산 방향으로 잡는다. 잘 정리해 놓은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길손을 맞는다. 가을의 양광(陽光) 아래 윤 시인의 서시(序詩)가 쓰인 비(碑)가 서 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왜 이 곳에 윤동주 언덕이 있을까? 사연인 즉 연희전문(연세대 전신)을 다니던 윤 시인의 하숙집이 저 아래 누상동에 있었는데 자주 이 언덕에 올라 시상을 다듬었다고 한다.

이제 인왕스카이웨이길 옆 소로를 따라 500m쯤 가면 우측에 인왕산으로 오르는 층계를 만난다. 이윽고 서울성벽에 닿는데, 성벽을 따라 오르는 길이 가파르다. 숨 다듬으며 30여 분 오르면 전망대 초소가 있고 정상이 눈앞이다. 그 아래로 인왕의 늠름한 암벽들이 서 있다. 그 암벽에는 글자를 쪼아낸 흔적이 역력하다. 일제는 이 땅을 빼앗은 뒤 사람만 핍박한 것이 아니라 자연도 핍박했다. 조선 시대에 인왕산(仁王山)이던 산 이름이 인왕산(仁旺山)으로 바뀐 것도 그들의 소행으로 짐작된다. 바위에는 ‘천황폐하만세’라는 글자를 비롯하여 내선일체(內鮮一?: 일본과 조선은 한 몸)를 조장하는 글이 총독부 학무국 이름으로 새겨 있었다고 한다. 해방 후 쪼아냈지만 바위는 곰보가 되어 그 아픔을 말하고 있다. 눈을 돌려 아름다운 서울 경치를 내려다보며 아픔을 잊어 본다. 여기서 정상으로 오르지 않고 성벽 넘어 북능선길로 가면 ‘기차바위’라는 이정표가 서 있다. 이 길은 인왕산 길 중 가장 걸을 만한 길이다.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도’에 창의문을 그린 것이 있는데 백련봉(기차바위)이 위용 있게 담겨 있다. 기차바위에서 부암동 쪽으로 내려다보이는 골짜기가 무계동(武溪洞)이다. 안평대군은 무릉도원 꿈을 꾼 뒤 그 정취를 안견에게 전해 천하의 명품 ‘몽유도원도’를 세상에 남기게 하는 한편, 자신은 이 골짜기에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지어 그 꿈을 실현했다. 이제 몽유도원도는 일본 천리대학의 소장품이 되고, 무계정사는 자리만 남았다. 그리고 후세 사람이 쓴 무계동(武溪洞)이라는 글자만 남아 이곳의 이야기를 전한다. 북능선으로 계속 걸으면 세검정으로 이어지는데 오늘은 좌향좌 해 홍제동 능선길로 내려선다. 가파른 흙길을 500여 미터 내려오면 좌로 갈라진 샛길을 만난다. 이 길 안쪽이 인왕산에서 가장 은밀한 곳, 작은 계곡수가 흐르는 골짜기다. 골짜기에 이르기 전 손바닥만 한 공터에 약수가 있고, 이어서 계곡을 따라 잠시 내려가면 왼쪽 언덕 공지에 운동시설이 있다. 이곳이 옥동약수터다. 1.21 사태 이전까지는 암자가 있었다. 마당 바닥을 보면 깨진 기와 파편들이 보인다. 굴도 하나 있는데 아마도 실록에 등장하는 인왕산 호랑이가 이 굴에서 살았음직하다. 굴은 막아 놓았지만,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샘물이 흐른다. 바위에 확인되지 않는 각자(刻字)도 보이는데 아마도 불(佛) 자 같다. 시원하게 물 한 잔 들이켜고 계곡을 따라 500m쯤 내려가면 갈림길이다. 좌는 청련사, 우는 환희사로 가는 길이다. 옛 고갯길처럼 고즈넉하게 보이는 청련사 쪽 길로 접어든다. 10여 분 걷다 보면 공터를 만나고, 자연암반 밑에 의자도 있고 거울도 걸려 있는 약수터 체육시설을 만난다. 노스님이 꿈꾼 뒤 논두렁에서 업어왔다는 마애불은 어떻게 모딜리아니 그림에서 걸어나온 듯한 미소를 띄고 있는 것일까 이곳이 흥인 약수터로 옛 절터다. 암반 앞을 돌아가면 콧날이 우뚝하고 당당한 석불이 서 있다. 우뚝한 콧날이 배우 주진모를 연상시킨다. 예술성은 없어도 힘든 현세에 구원을 전할 메시아를 기다리는 민초들의 염원이 모인 미륵불이다. 이제 오늘의 가장 아름다운 마애불을 만나러 더 걷자.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산등성이를 넘어 내려가면 포장된 길에 닿는데 그 곳에 환희사가 있다. 안주인이 곱게 가꾸어 놓은 정원 같은 마당에 환희사가 있다.

대웅전 옆에 용화전(龍華殿) 문을 열면 모딜리아니의 모델 같은 소박한 마애불이 있다. 보살님께 이 부처에 대해 묻자 “지금은 돌아가신 노스님이 꿈을 꾸고 어느 논바닥에서 업어 왔다”고 한다. 토속적인 민불(民佛)인데 오히려 현대적으로 보인다. 용화전에 모신 것을 보면 석가모니불 세상 떠나신 후 56억 7천만년 뒤에 와서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불인가 보다. 환희사를 나오면 우측에 능선으로 오르는 나무계단이 보이는데 여기로 올라 능선길로 접어든다. 능선에서 좌측으로 몇 발자국 옮겨 오른 편 마을 쪽 길로 내려서 문화촌 현대아파트 뒤 채석장 공원으로 간다. 돌 따낸 벽면에 근세에 누군가 마애관세음보살상을 새겨 놓았다. 김정호 선생의 ‘수선전도’를 보면 홍제원 위쪽에 ‘미륵(彌勒)’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치상으로 이곳쯤 될 것 같다. 추측컨대 마애불이 있던 바위를 채석하고는 그 대신 새겨 놓은 것 같다. 동네 노인들께 여쭈어도 아는 이가 없다. 근처 홍제근린공원의 마애불도 근세에 공원을 조성하면서 수난을 당했다 한다. 문화재로 이름 올리지 못한 이 땅 선배들의 손길은 이렇듯 우리들 손에서 사라져 간다. 마애불을 뒤로 하고 홍제천으로 내려간다. 물을 맑게 관리하여 걸을 만하다. 그러나 민간에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이곳은 병자호란 때에 청나라로 끌려갔던 이 땅 여인들의 아픈 역사가 있는 곳이다. 인조실록 16년 3월경에 보면 장유라는 사람은 청에 끌려갔던 며느리를 못 받아들이겠다 하고, 승지 한이겸은 끌려갔던 딸이 돌아왔는데 사위가 딸 버리고 새 장가 가려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무수히 많은 여인네들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버림받은 것이다.

환향녀(還鄕女: 고향에 돌아온 여자)가 화냥년이라는 몹쓸 이름이 되어 저주를 받은 것이다. 그 시대를 산 못난 남자들의 모습이 서글프다. 실록에는 최명길이 이 문제를 거론하여 돌아온 여인네들을 구제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사관의 의견이 붙어 있는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면서 최명길을 질타하고 있다. (그렇게 잘난 사관, 당신은 어찌하여 임금이 그 수모를 당하고 이 땅의 여자들이 그 아픔을 당하는데 벼슬 살면서 치사하게 그 목숨 보존했더란 말이냐?) 야사에 의하면 홍제천에서 목욕하고 오면 모든 것을 씻은 새 사람으로 인정했다는 설도 있다. 나도 손 한 번 씻고 홍제원 옛터로 향한다. 홍제역 2번 출구에서 무악재 쪽으로 30m 쯤 올라오면 길가에 홍제원 유지 표지석이 있다. 조금 더 올라가면 홍제4동 주민센터 길이 있고, 이 길로 접어들면 곧 소공원을 만나는데 ‘홍제원터’라는 석물을 새로 세웠다. 의주대로의 첫 역이며, 중국 사신이 입궐 전 옷을 갈아입은 곳이고, 인조반정군이 출발한 역사의 현장이다. 이제는 소공원이 되어 할머니들의 마실터가 되었다. 내려앉은 가을 볕 속에 문득 한 줄기 바람이 스친다. 교통편 1.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 2. 전방 50m 시내버스 0212, 1020, 7022 탑승 ~ 자하문 고개 하차 걷기 코스 자하문고개 ~ 윤동주 언덕 ~ 서울도성 인왕산 구간 ~ 전망초소(우향우) ~ 백련봉(기차바위) ~ 홍제동 능선 ~ 옥동약수(옛절터) ~ 흥인약수(옛절터) ~ 환희사 ~ 개미마을 ~ 채석장 마애관음 ~ 홍제천 ~ 홍제원 옛터 CNB저널은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주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회비는 없으며 간단한 간식거리와 물을 가져오면 됩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본지 Art In 편집주간)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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