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쇄
  • 전송
  • 보관
  • 기사목록

[이한성의 이야기가 있는 길] ③ 흥선대원군 따라 걷는 길

대원군 발자취 많은 화계사부터 홀로 깨친 마애불 웃는 정릉까지

  •  

cnbnews 제192호 편집팀⁄ 2010.11.03 17:53:06

이한성 동국대 교수 오늘은 수유리에서부터 길을 떠나 보자. 4호선 전철을 내리면 마을버스를 탈 수 있다. 수유리(水踰里)는 그 지명이 말하듯이 물이 넘치는 동리, 즉 ‘무너미’였다. 지금은 복개되어 물길을 알기 어렵지만 대동여지도에 보면 화계사 옆으로 물길이 있다. 지금 상류에 흔적이 남아 있는 화계골(화계사 계곡)과 빨래골이다. 이곳은 가을이 되면 소풍코스로 인기가 좋았다. 삼양동(三角之陽, 삼각산의 남쪽)과 수유리의 경계를 이루는 곳의 계곡이 빨래골인데, 이 곳 안내판에는 궁중 무수리들이 빨래도 하고 물놀이도 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사실은 조금 과장된 설명이다. 경복궁, 창경궁과 이 곳 사이에는 좋은 계곡물이 많아서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가 없었다. 다니다 보면 많은 곳의 안내판이 내 고장을 자랑하려고 지나치게 견강부회하는 일을 만나게 된다. 수유리의 또 하나 중요한 내력은 조선시대 한성부의 북쪽 경계였다는 점이다. 이곳을 지나면 경기도 양주(楊洲)로 접어든다. 70년대까지도 도봉산 등산을 가려면 이곳을 지날 때 군경합동검문소가 있어 어김없이 검문을 당하곤 했다. 이 검문소가 지금은 도봉산역과 다락원 경계로 옮겨 갔다. 서울의 경계인 셈이다. 또한 수유리는 서울 흥인지문(동대문)을 떠나 신설동, 안암, 수유현, 의정부, 송우리, 포천, 철원, 김화, 철령 등을 지나는 통로였다. 김종서 장군이 개척한 육진(六鎭)의 하나인 함경북도 경흥에 이르는 길인 ‘경흥대로’가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태조 이성계를 설득하기 위해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는 함흥차사들도 이 길로 갔을 것이며, 삼수갑산으로 귀양 간 많은 충신들도 이 길 위에서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화계사는 궁중 사람들과 인연이 깊어 ‘궁절’이라 했다. 궁 사람들과 관련된 많은 흔적들이 남아 있고 근세 명필들의 글씨도 많다. 편액(扁額)과 주련(柱聯)에는 추사의 제자인 위당 신관호, 조선 후기의 명필 몽인 정학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작품 등 귀중한 글씨들이 걸려 있다. 희방사에서 옮겨 온 동종이나 목어(木魚)도 보물로 지정된 소중한 물건들이다. 이곳은 1933년 이희승, 최현배 선생 등 한글학자 9분이 모여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탄생시킨 소중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세상에 알려진 스님들도 여러 분 있다. 서양 제자를 많이 길러낸 숭산스님이 이곳에서 주석하였고, 그의 제자로 하버드대학 출신인 현각도 이곳에서 자리를 잡았었으며(저서: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삼배일보로 알려진 수경스님도 이 곳 주지를 역임했다. 그러나 우리 길손은 조선 말기의 승려 만인(萬印)에 대해 들어보자. 흥선대원군에게 ‘2대에 걸쳐 왕위 오를 풍수지리 비책’ 알려 준 만인스님이 있던 화계사는 한때 ‘왕궁의 절’로 불려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천하를 호령하던 조선 말기. 종친(宗親, 임금의 집안) 이하응은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마음 깊은 곳에는 큰 뜻이 있었지만 종친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꼬리 내리고 세도가에게 신세나 지면서 사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이하응이 화계사에 무료함을 달래러 왔다가 여기서 만인스님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이야기 속 도사들이 그렇듯이, 이하응을 본 만인은 한 눈에 왕기(王氣)를 알아보고 이하응에게 비법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부친의 묘를 500리 남쪽 예산 가야산 옥양봉 아래 가야사 자리로 옮기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2대에 걸쳐 임금이 나올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二代天子之地). 부친 남연군은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7세손인데 아들이 없던 정조의 이복동생 은산군의 양자로 들어갔기에 왕과는 가까운 종친이었다. 이하응은 만인의 비법대로 부친의 묘를 옮긴다. 이 일이 있은 7년 뒤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조대비에 의해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은 12살에 조선 26대 고종으로 등극한다. 어린 임금을 대신해 이하응이 섭정을 하게 되니 바로 흥선대원군이다. 그 후 화계사는 대원군의 원찰(願刹)이 되어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다. 이런 연유로 화계사에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지금도 덕산온천 뒤 가야산 옥양봉 줄기에 남연군묘가 자리 잡고 있다. 풍수(風水)를 배우는 이들에게는 명당의 교과서 같은 자리라서 요즘도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우리 시대 이름을 날리던 육관도사 손석우 씨도 스스로 자신의 음택(무덤자리)을 이 산줄기에 잡았다고 한다.

그런 남연군묘도 한 때 수난을 당했다. 역사 시간에 배웠던 ‘오페르트 도굴사건’을 기억하시는지?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개항을 요구했다가 대원군에 의해 묵살되자 야밤에 이 묘의 도굴을 시도한 것이다. 다행히 회(灰)로 단단히 봉해진 무덤이라 관을 열지 못하고 새벽 동이 트면서 서해로 가 배로 도망쳤다. 이제 415년 된 느티나무 세 그루와 이별하고 절문을 나서 좌측 계곡으로 내려간다. 절 담 건너에 샘이 있다. 생각보다 작은 샘물인데 유명한 오탁천(烏琢泉: 까마귀가 쪼은 샘)이다. 무너미 마을에 착한 효자가 있었다. 그 어미가 심한 피부병에 걸렸다고 한다. 백약이 무효라 견딜 수 없었기에 효자는 산으로 약초를 구하러 갔다가 깜박 잠이 들었고, 산신령이 나타나 “화계골 바위를 파면 샘물이 나올 것이다. 그 물로 어미를 씻어 드려라” 고 알려줬다. 효자는 그 길로 바위를 파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바위가 너무 단단해 힘은 빠지고 지쳐서 끝내는 목숨이 끊어졌다. 그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까마귀가 바위를 쪼아 샘물이 솟아 나왔다고 한다. 그 어미는 이 샘물로 피부병을 고쳤고, 흥선대원군도 이 물로 피부병이 나았다 한다. 그런데 왜 하필 까마귀일까? 자오반포(慈烏反哺)라는 옛말이 있다. 자애로운 까마귀는 어미새가 스스로 먹이를 구할 힘이 없으면 어미의 은혜를 갚아 모이를 구해다 먹인다는 말이다. 까마귀는 효자 새라는 얘기다. 또한 까마귀는 의로운 새이기도 하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소지왕 이야기가 나오는데, 소지왕은 까마귀의 안내로 암살을 면하고 자신에게 위협이 되던 궁주(궁녀, 왕의 여인)와 정부를 죽일 수 있었다. 이 은혜를 갚으려고 찰밥으로 까마귀 제사를 지낸다. 이 찰밥이 약식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산으로 오르는 작은 계곡은 걷기에 그만이다. 들꽃도 많다. 누리장나무의 흑진주 같은 까만 열매, 우아하지만 이름은 모욕적인 누린내풀, 물봉선, 돌양지…. 작은 계곡길은 꽃밭이다. 계곡 중간에 작은 공터가 있는데 그 곳 우뚝한 바위에 좀 이상한 느낌의 마애불이 있다. 연화대 위에 앉아 정병(淨甁)을 든 모습은 관세음보살인데, 눈의 모양은 용왕의 눈이고, 쓴 관(冠)은 칠성탱화에서 북두칠성(칠원성군)의 도교식 관(冠)이니, 민초들이 만들어 낸 마애상이다. 그렇지만 제법 규모를 갖춰 새긴 것을 보면 초보 석수의 솜씨는 아니다. 불상에 대해 식견이 없다 보니 자신이 보았던 이것저것을 섞어 새긴 것이리라.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관세음보살이라 썼고, 정씨, 양씨, 박씨가 발원하였다. 불기 2963년 병인년에 세웠다고 하니 1936년이다. 일제의 악랄함이 극에 달했던 때에 관세음보살께 그 마음을 의지하였던 것이다. 마애불을 뒤로 하고 계곡길을 오른다. 빨래골에서 오르는 길과 만난다. 이제 칼바위능선 방향으로 길로 접어들면 5분도 못가 삼성사가 있다. 작년에 왔을 때는 삼성암이더니 어느새 암(庵; 작은 절)이 사(寺: 큰 절)가 되었다. 이렇게 바뀌면 어째 낯설다. 함께 놀던 옛 친구가 크게 성공해 멀어져 가는 느낌이다. 삼성사 앞에서 좌향좌 하면 샛길로 산등성이를 오르게 된다. 가파른 길을 30여 분 오르면 칼바위능선길의 본길과 만나는 마당바위에 닿는다. 이곳에서 한 숨 돌리고 물도 한 컵 마시면서 뒤를 돌아보자. 서울 시가지의 전망이 개운하다.

칼바위능선의 끝이 북한산성 보국문이다. 말이 칼바위이지 보국문 가까이 가기까지는 편안한 흙길이다. 한 20분 갔을까? 정릉으로 내려가는 갈림길 삼거리에 이정표가 서 있다. 이곳에서 좌향좌 해 서서히 내려온다. 오르내리는 사람이 드물어 주말에도 한가하다. 20분쯤 내려오면 우측으로 내원사라는 절이 자리 잡고 있다. 중생 구할 메시아 나온다는 정릉 ‘내원궁’에서 돌계단 오르면, 젊은 나이에 진리 깨친 ‘마애독성’이 넉넉한 미소 짓고 있고…. 내원(內院)…. 미래에 인류를 구할 메시아인 미륵불이 설법 중인 곳이 도솔천 내원궁(內院宮)이다. 따라서 이 절집 이름은 말없는 가운데 ‘미래를 열어 주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1800년대 중반 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수선전도에 내원암으로 표시돼 있는 것을 보면 역사가 꽤 있는 절이다. 절마당에서 대나무통으로 흘러내리는 감로수 한 바가지를 시원하게 들이킨다. 돌계단 난간에는 ‘역천겁이불고 긍만세이장금(歷千劫而不古 亘萬歲而長今: 천겁을 지나도 옛날이 아니요, 만세를 뻗어도 늘 지금이라네)’라는 글귀가 쓰여있다. 문득 어느 책에선가 읽었던 ‘Yesterday is History, Tomorrow is Mystery, Today is Present: (어제는 역사, 내일은 신비, 오늘은 선물)’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돌계단을 오르며 그 끝에 다보장(多寶藏: 많은 보물을 간직한 곳)이란 작은 건물이 있다. 그 건물 안에 뒷산 바위가 발을 뻗었는데 그 바위 위에 마애독성(磨崖獨聖: 바윗돌에 새긴 나반존자)이 웃고 있다. 다른 절집 독성은 혼자 깨우치느라 노인이 다 되었건만 이곳의 독성은 넉넉한 얼굴에 편안함이 가득하다. 또 만날 것을 기약하고 돌계단을 내려와 속세로 접어드는 길 뒤로 범종이 은은히 울린다. 兜率天中內院鐘(도솔천중내원종) 도솔천 내원궁 종소리 風鳴日暮喚愚人(풍명일모환우인) 다 저녁 바람결에 나를 부르는군. 駐躇回視華山麓(주저회시화산록) 발멈추고 돌아 본 북한산 산록에 一片斜陽便更新(일편사양변갱신) 한 조각 비낀 햇볕 문득 다시 새롭구나. - 이한성 작 산길을 내려오니 정릉(청수골) 계곡이다. 산과 속세의 경계에 북한산 탐방안내소가 있다. 과거 청수장(淸水莊) 건물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리모델링한 건물이다. 청수장은 60, 70년대에 서울에서 산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이름이다. 한국이 일본에 병합되던 1910년 일본인의 별장으로 지어진 천수장은 해방 뒤 서울을 대표하는 요정으로, 사교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1954년 6.25 직후 우울하고 갑갑한 시기에 소설가 정비석은 서울신문에 ‘자유부인(自由夫人)’을 연재하여 낙양의 지가(紙價)를 높였다. 작품 속에서 교수 부인인 주인공 오선영이 외간남자와 댄스를 추던 곳이 청수장이었다. 이제는 탐방소 건물로 개조되어 지난날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추억을 전하고 있다. 길을 모두 마치고 버스 종점으로 내려온다. 시원한 탁주 한 잔 할 집들이 즐비하다. 버스 종점에 자리 잡은 두부집도 제 격이다. 밑반찬도 깔끔하고, 일행이 많으면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방도 내어 준다. 교통편 1) 4호선 수유역 3번 출구 환승 / 02번 마을버스 ~ 한신대앞 2) 서울역, 안국동에서 시내버스 151번 ~ 한신대앞 동대문, 신설동에서 시내버스 152번 ~ 한신대앞 걷기 코스 한신대 ~ 화계사 ~ 화계사 계곡 ~ 오탁천 ~ 마애불 ~ 삼성사 ~ 칼바위 능선 지능선 ~ 마당바위 ~ 칼바위 능선 ~ 정릉갈림길~ 내원사 ~ 북한산 탐방안내소 ~ 정릉 버스종점 CNB저널에서는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주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숨겨진 길을 문화유적지 탐방을 하게 됩니다. 3~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회비는 없으며 간단한 간식거리와 물을 가져오면 됩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본지 Art In 편집주간)로 메일 보내주십시오.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많이 읽은 기사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