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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이야기가 있는 길] ④ 진흥왕순수비 길따라 마애불 만나러

김신조가 달렸던 능선에는 ‘서울의 배반’이 흐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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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93호 편집팀⁄ 2010.11.03 17:52:56

이한성 동국대 교수 지하철 경복궁역에서 3번 출구로 나와 버스를 타고 자하문(창의문) 고개를 넘는다. 예전부터 이곳을 자문밖(자하문밖)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서울에는 지역별로 특산품 장수가 있었는데, 예를 들면 마포 새우젓장수, 누각골 쌈지장수, 시구문 끈목장수, 애오개 놋각(유기)장수…. 자하문밖에는 화초장수가 유명했다. 버스가 세검정을 지난다. 이곳은 40여 년 전만 해도 능금나무 고장이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여름이 오면 가족놀이를 나서는데 우리 집이 있던 굴레방다리에서 하이어(택시의 일본식 표현)를 타고 이곳으로 왔다. 대중교통이 없던 시절이라 아버지께서 과용을 하신 것이리라. 이 날 엄마는 새벽부터 찬합에 맛있는 찬도 준비하시고 김밥도 싸시고(이 때만 해도 김밥은 최고의 별식이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양산을 받치셨는데 우리 형제들은 덩달아 신이 났다. 아, 나무마다 조랑조랑 매달려 있던 풋능금들, 한 입 베어 물면 그 시큼한 맛이 저절로 얼굴을 개구쟁이로 만들던 추억의 과일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버스가 탕춘대옛터를 지나 구기동에 닿는다. 상념을 떨친다. 이곳은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은평면의 여느 촌마을과 다름이 없었다. 초가집과 낡은 기와집이 모두 합쳐 20여 채나 되었을까? ‘가나안 농군학교’의 김용기 선생이 농장을 개간해 나간 곳도 이 곳 구기리로 ‘삼각산농장’이 지금의 ‘가나안 농군학교’의 초기 활동무대였다. 그러던 이곳이 70년대부터 개발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봄이면 ‘고향의 봄’ 노래의 가사처럼 복숭아꽃,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시골마을이 헐리면서 빌라와 담 높은 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소나무 숲이 우거진 옆 동네 평창동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풍수 하는 이들은 구기동이 비봉에서 두 용맥(龍脈)이 내려오는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 아름다운 여인이 비단을 짜는 형태)의 좋은 동네라고 말한다. 정치인, 공직자, 기업인들에게 좋은 곳이라고도 한다. 오늘 답사 코스의 방향은 구기파출소 건너 빌라에서 구기계곡 쪽으로 잡는다. 주택가를 지나는 계곡물이지만 분리 하수관을 묻었기에 물은 맑고 버들치들도 힘차게 뛰어 논다. 500m 쯤 가면 가파른 비탈 위로 관음사라는 절이 보인다. 이 절 마당에는 바위에 감실(龕室: 불상을 모시기 위해 판 자리)을 파고 단아한 모습의 관세음보살을 봉안하였는데 관심 있는 이들은 들려 보는 것도 좋다. 길이 많이 가파르니 마음 준비는 단단히 하시라. 절마당에 오르면 옷 벗은 여인네가 비스듬히 누운 듯한 산 능선 나타나 男心을 유혹하고… 이윽고 구기탐방지원센터에 도착한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계곡과 숲길이 이어진다. 계곡은 아름다운데 특별보호구역이라 계곡에 내려가는 것은 금지돼 있다. 아쉽지만 계곡을 헤엄치는 버들치들의 유연한 자태를 보면서 쉬엄쉬엄 올라가자. 나무다리도 운치 있게 만들어 놓아 사진이라도 한 장 찍으면 느낌이 좋다. 지원센터로부터 20여분 걸으면 갈림길이 나타난다. 직진 하면 북한산성의 대남문으로 오르고, 좌향좌 하면 승가사~비봉으로 가는 길이다. 갈림길에는 비교적 너른 터에 나무식탁과 의자가 여럿 있어서 길손의 쉼터가 된다. 승가사(僧伽寺) 길로 접어들자. 계곡수가 흘러내려 손도 씻고 땀도 씻을 수 있다. 이윽고 30분이 채 걸리지 않아 승가사 입구에 도착하면 길손을 맞는 샘물이 있다. 서울시 약수 기준이 엄격해져 ‘음용불가’ 표시가 붙어 있을 수도 있으니 살펴보고 드시기를. 이제 승가사에 다 왔구나 생각하는 순간 막상 승가사는 나타나지 않고 가파른 오르막만 나타난다. 오르막길 중간에 경천사 10층탑을 본받은 10층 석탑이 있다. 웅장하기는 한데 탑 표면에 석수의 정(釘) 자국도 없이 플라스틱 제품처럼 매끄럽기만 하니 인위적 느낌만 준다. 탑을 뒤로 하고 잠시 오르면 절마당에 닿는다. 비구니 스님 절답게 단아하다. 어떤 호사가들 의견으로는 이곳에서 보이는 사자능선이 좌청룡(左靑龍)인데 그 형세가 나부반와상(裸婦半臥像: 옷 벗은 여인네가 비스듬히 누운 모습)이라서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라고도 한다. 승가사는 신라 경덕왕 15년(서기 756년)에 창건한 절이다. 승가굴이라는 자연석굴이 있는데 그 속에 있는 인도의 승려 승가대사의 상은 고려 현종 때 제작한 것으로 보물 1000호이며, 굴 앞 약수에 있는 영천(靈泉)이란 글씨는 추사의 글씨라고도 한다. 승가사의 압권은 역시 마애불이다. 승가봉의 기를 받아 내려온 절 뒤편 자연 암벽에 거대한 마애불이 있다. 절 뒤편 산 쪽으로 108계단이 있는데 108번뇌를 안고 그 계단을 오르면 웅장한 마애불이 내려다본다. “수고하시었네. 이제 내게 와서 속세에서 묻은 번뇌 다 내려놓고 가시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듯하다. 보물 215호로 지정된 10세기 고려 초기 마애불이다. 석가여래상이라 하는데 미륵불 느낌도 난다. 승가사 마애불은 ‘힘든 짐 내려놓으라’는 듯 미소 짓지만, 사실 이 거대한 불상은 중앙정권에 맞서는 지방세력의 힘 과시 위해 세운 것. 고려는 각 지방 토호(土豪: 지방 토착세력)들의 연합체 국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태봉국의 궁예는 나라를 세우자 각 지방 세력을 누르고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펴 나갔다. 이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길 것을 걱정한 각 지방의 토호들이 연합해 개성 지역의 토호 왕건을 앞세우고 궁예에게 반기를 들어 건설한 국가가 고려였다. 그런 고려였기에 왕권 못지않게 토착세력의 힘은 막강했다. 세력의 힘을 표현하는 방식 중 하나가 각 지방에 세워진 거대한 석불이다.

파주 용미리석불, 관촉사 은진미륵, 부여 태조사 석불, 하늘재 미륵사 석불(마의태자 석불) 등이 모두 이러한 경향을 띠고 있다. 이 곳 승가사 마애불도 고려의 남경(서울) 지방을 대표하는 막강한 힘을 지닌 토호의 지원 없이는 조성하기 힘든 석불이었다. 다시 절 입구로 내려오면 샘물 옆에 비봉으로 오르는 산길이 있다. 길이 가파르다. 40분 남짓 된비알을 오르면 능선길로 들어선다. 오르면서 흘린 땀을 시원한 바람이 씻어 준다. 비봉(碑峰)과 사모바위 사이로 오른 결과다. 이 길은 비봉능선이다. 서쪽으로 가면 비봉~향로봉~족두리봉 지나 불광동으로 내려가게 되고, 동으로 가면 사모바위~승가봉~문수봉 갈림길~깔닥고개~청수동 암문~대남문에 이르게 된다. 능선을 넘어 반대편 골짜기로 넘어가면 진관사로 간다. 오늘의 답사는 사모바위 비봉까지만 가기로 한다. 능선 길로 5분 쯤 가면 전통혼례에 신랑이 쓰던 모자를 빼어 닮은 바위 사모(紗帽)바위를 만난다. 여기서 시작하는 북쪽 능선이 응봉(매봉)능선인데 그 끝에 진관사가 있다. 진관사에서 사모바위에 이르는 길이 1968년 1월 북한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이 지나온 이른 바 ‘김신조 루트’다. 세간에 우이령을 김신조 루트라 부르는데 이는 잘못이다. 임진강을 건넌 김신조 일당은 파평의 파평산을 지나 법원리 삼봉산, 비학산에서 일박하고 광탄의 앵무봉, 고령산을 지나 산줄기를 타고 내려오면서 노고산 줄기를 넘어 진관사 근처에서 일박한 후 사모바위에 도달했다. 허기지고 추위에 떨던 이들은 방향감각이 무뎌져 제 자리를 맴돌다가 어두워지면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구기동을 지나 상명대 삼거리에서 창의문으로 넘어 왔던 것이다. 이후 사모바위 지역은 민간인 통제구역이 되고 군부대가 자리 잡기도 했다. 지금 사모바위 앞 넓은 공터는 그 때 군막사가 있던 자리로서 남북대치의 생생한 역사를 증거한다. 이제는 많은 이들이 편안히 식사하는 자리가 되었다. 서울 땅을 놓고 온조는 마한왕을, 신라는 백제를 배반했으니 서울은 배반의 기운이 서린 땅이려나. 눈을 돌려 비봉을 바라본다. 석양 빛 아래 정상에 비석이 우뚝 서 있다. 비봉까지는 10분 정도 거리다. 오를 수는 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오르지 마시라. 이따금 실족 사고가 발생하는 곳이다. 지금부터 2050년 전, 고구려 주몽의 왕비 소서노는 온조, 비류 두 아들을 데리고 믿을 수 없는 남자 주몽을 떠나 지금의 서울 지역으로 내려온다. 그러나 주인 없는 땅이 어디 있으랴? 이곳은 경기, 충청, 전라 지역의 맹주 마한의 땅이었다. 온조는 마한왕에게 허락을 받아 이 곳 서울에 삶의 터전을 구한다. 그러다가 힘을 키운 온조는 마한이 어지러운 틈을 타서 마한을 점령해 버렸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첫 번째 배신이 서울 땅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 후 600년이 지났다. 고구려의 장수왕은 남하정책으로 백제를 쳐서 서울 땅(한수 이북)에 도읍한 개로왕을 사로잡아 처형했다. 이에 그 아들 문주왕은 도읍을 공주(웅진)로 옮긴다. 이후 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을 맺고 힘을 합쳐 고구려를 쳐 551년 백제의 한강 이북(지금의 서울)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553년 신라의 진흥왕은 백제의 뒤통수를 쳐 이 곳 서울 땅을 빼앗아 버린다. 또 배신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그런 후 신라 진흥왕이 세운 비석이 바로 비봉에 있는 비석이다. 이 비석의 이름은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로서, 비봉이란 이름도 이 비석에서 비롯되었다. 동물의 수컷들이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듯이 자신의 영역임을 표시한 비석이다. 그 후 백제는 배신자를 응징하지 못하고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이 비석이 기록에 나타난 것은 이중환(숙종~영조)선생의 택리지이다. 팔도총론 경기도편에 무학대사가 도읍을 정하려고 백운대에서 산맥을 따라 만경대에 이르고 서남으로 비봉에 이르렀다. ‘무학오심차지(無學誤尋此地: 무학이 이곳에 잘못 찾아온다)’라고 도선이 세운 비를 보고 북악으로 가서 결국 도읍을 정했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이 비를 ‘무학대사오심비’ 또는 글자가 없어졌다고 ‘몰자비(沒字碑)’라고 불렀다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가만 보면 몹시 음모의 냄새가 난다. 어찌 신라 말에 살던 도선이 수백 년 뒤 무학이 새 도읍을 찾아 이곳에 올 것을 알았단 말인가? 이는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한양에 천도하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던 하늘의 뜻이라고 주장하려는 조선건국 세력의 술수가 아니었을지? 다시 이 비가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1816년이었다. 승가사에 놀러 갔던 추사 김정희와 친구 김경연은 비봉에 올라 이 비석 탁본을 떠 왔는데 문득 읽은 글자가 ‘..력지?간남천군주사...(力智?干南川軍主沙)’이었고 삼국사기에서 읽었던 ‘북한산주(北漢山州)를 폐하고 남천주(南川州)를 설치한다’는 대목의 ‘남천(南川)’이란 글자가 키워드가 되어 68자를 해독할 수 있었다. 드디어 1250년 만에 진흥왕순수비라는 비석의 비밀이 밝혀진 것이다. 지금 이 비는 국보3호로 지정되어 국립박물관 금석문실에 보관돼 있으면 비봉 정상에는 재현품이 세워져 있다. 1250년 만에 의미 밝혀진 진흥왕순수비의 옆면에 “내가 이 비석을 훼손했네”란 기록을 추사 김정희가 버젓이 남기셨으니… 그런데 이 비석을 훼손한 사람이 두 사람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은 그 문화재 훼손범 중 한 사람이 추사 김정희란 점이다. 이듬해인 1817년 추사는 친구 조인영과 다시 올라 비석 측면에 다음과 같은 글을 새겨 넣었다. “이는 신라진흥대왕순수비이다. 1816년 7월 김정희, 김경연이 와서 읽다. 1817년 6월 8일 김정희, 조인영이 남아 있는 글자 68자를 조사하여 정하다. (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 丙子七月 金正喜, 金敬淵 來讀, 丁丑六月八日 金正喜, 趙寅永 審定殘字六十八字 )” 또 하나의 훼손 사건은 6.25 동란 중에 일어났다. 지금도 이 비석 뒷면에는 20여발의 총흔이 깊게 파여 있다. 훼손범은 알 수 없다.

碑峰所懷 비봉에서 三角一流行酉方(삼각일류행유방) 삼각산 한 줄기 서쪽으로 뻗어 와 峻然蓄氣立碑峰(준연축기입비봉) 우뚝 기를 모아 비봉을 일으켰네 千年石碣藏哀史(천년석갈장애사) 천년 돌비석은 아픈 역사 품었건만 削髮沙彌叩夕鐘(삭발사미고석종) 파르라니 사미니는 저녁 종만 울리네 -사미니(沙彌尼) ; 갓 출가한 어린 여승 이제 올랐던 길을 되돌아 승가사로 내려간다. 승가사에서 구기동으로 내려가는 길은 계곡 대신 포장길을 택해본다. 승가사에서 포장길로 500여m 내려가다 보면 작은 계곡을 만나는데 이곳에서 계곡길로 10여분 오르면 원통사지 마애불이 있다. 현재는 보호구역으로 출입을 금하고 있으니 다음 기회에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 아쉬움을 달래고 거의 산을 다 내려오면 우측에 혜림정사가 있다. 이 곳 주지스님은 ‘느리게 사는 행복, 청산별곡’이란 시집을 낸 시인이다. 불교도라면 들러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산을 마쳐 큰 길로 나가면 장안에서도 소문난 두부집(옛날 민속집, 원조 할머니집)이 있고 흑도야지로 유명한 ‘삼각산’도 있으니 들러서 탁주 한사발로 목도 축이시기를.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 50m 앞. 시내버스 7022, 0212 타고 구기동(구기파출소) 하차. ? 지하철 3호선 녹번역 3번 출구 은평 방향 30m 앞. 시내버스 7730 타고 구기동 하차. ? 지하철 3호선 불광역 1번 출구 횡단보도 건너 30m 앞. 시내버스 7211, 7022 타고 구기동 하차. 걷기 코스 구기파출소 앞 ~ 구기계곡길 ~ 구기탐방지원센터(옛 매표소) ~ 대남문-승가사 갈림길 ~ 승가사 ~ 비봉능선 ~ 사모바위 ~ 비봉 ~ 승가사(회귀) ~ (원통사지) ~ 혜림정사 ~ 구기동.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CNB저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주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하게 됩니다. 3~4시간정도 가벼운 등산을 하며 조상들의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이번 달은 인왕산 길 탐사를 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30일(토) 오전 9시30분까지 경복궁역 3번 출구 밖으로 오십시오. 참여하실 분은 다음 연락처로 이메일을 보내주시거나 전화 주시기 바랍니다. (조운조 편집주간 comtou@hanmail.net , 010-9013-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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