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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구 박사의 내 인생의 클래식 - 하이든

촌놈에서 세계 최고 작곡가 된 하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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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93호 편집팀⁄ 2010.10.25 11:29:54

이종구 박사 (이종구심장크리닉 원장) 하이든(Joseph Haydn)은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국경 지역인 시골 마을 로라우(Rohrau)에서 서민의 신분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마을의 관리인이었으며 어머니는 귀족집의 요리사였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이 하이든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 그가 여섯 살 때 좀 더 큰 동네인 함부르크에 사는 먼 친척이자 음악 교사였던 프란츠(Franz) 씨에게 하숙을 시키면서 음악을 배우게 했는데 이후 하이든은 다시는 부모의 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하이든은 하프시코드와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뛰어난 목소리 덕에 여덟 살에 비엔나의 성 스티븐스 대성당의 합창단원이 되어 9년 동안이나 노래를 했다. 소년 하이든은 합창단장의 집에서 살면서 비엔나의 가장 중요한 교회의 합창단원으로 일했지만 음악을 제대로 배울 기회는 없었으며 끼니도 거르면서 살았다. 열세 살이 된 하이든은 변성기를 겪게 되어 소년 합창단원에서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되자 길거리로 나서야만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이후 스무 살이 된 하이든은 이탈리아 출신의 한 작곡가의 심부름꾼이 되면서 그로부터 작곡을 배우고 작곡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는 곧 비엔나의 귀족들로부터 음악선생으로 초대받기 시작하였으며 스물일곱에 모르진 백작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모르진 가문의 작은 앙상블을 감독하고 작곡하는 일을 맡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 첫 심포니를 작곡하였으며 스물여덟이 되던 해에 애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자 그녀의 동생과 결혼했다. 하지만 그 결혼 생활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그는 아이를 갖지 못했으며 부부는 모두 애인을 따로 두고 생활하였다. 그러다 하이든은 고용주가 재정적으로 어려워지자 해고를 당하고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가장 부자이자 존경받는 헝가리의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부지휘자를 거쳐 서른네 살에는 음악감독이 되었다.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앙상블을 감독하고 지휘했는데 가문의 행사를 위해 실내악을 연주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오페라도 작곡하였다. 작곡가 심부름꾼으로 음악인생 시작. 오스트리아 최고의 귀족 가문에 들어가 30년 동안 작곡하며 음악 흐름 바꿔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오스트리아 제국에서는 귀족들의 모든 행사에 실내악 연주가 있었으며, 음악적 수준이 가문의 명예와 위상을 결정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 그를 고용한 니콜라스 왕자는 음악을 무척 좋아하는 후원자이면서 아마추어 음악인이었다. 그리하여 에스테르하지 가문은 유럽에서 가장 든든한 음악적 후원자가 된 것이다. 하이든은 거의 30년간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고용되어 수많은 작품을 만들었는데 거의 독자적으로 음악의 스타일도 발전시켜 나갔다. 시골인 아이젠슈타트(Eisenstadt)에 있는 궁전과 에스테르하지의 하기 궁전 근처에 살면서 세계의 유명도시 비엔나와 파리로부터 떨어져 격리된 생활을 하였으며 외부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후 그의 명성은 널리 퍼지기 시작하여 외부로부터 위탁을 받아 ‘파리 심포니’와 ‘예수님 최후의 7가지 말씀(The Seven Last Words of Christ)을 작곡하였다. 하이든은 쉰둘이 되던 1784년에는 모차르트를 만나서 음악적으로 좋은 친구가 되었으며, 이 두 사람은 실내악을 같이 연주하기도 하고 서로의 음악을 높이 평가했다. 모차르트는 그의 6편의 사중주를 ‘하이든 4중주’라 이름 짓기도 했다. 1790년 니콜라스 왕자가 죽자 음악에는 문외한이었던 그의 후계자는 하이든에게 연금을 주고 해직시켰다. 결과적으로 에스테르하지 가문으로부터 해방된 하이든은 런던으로 초대를 받았으며(1791~1792, 1794~1795) 그의 피아노 연주는 전례가 없을 정도의 대환영을 받게 되었다. 50대 때 모차르트와 만나 절친한 사이 돼. 모차르트는 자신의 사중주 6편을 ‘하이든 4중주’로 이름 붙이기도. 런던을 방문하는 동안 그는 ‘놀람(Surprise)’ ‘군대(Military)’ ‘드럼롤(Drumroll)’ ‘런던 심포니(London Symphony)’ 같은 유명한 음악을 작곡하였다. 예순셋이 된 하이든은 비엔나로 돌아와 ‘합창곡(Oratorio)’ ‘천지창조(The Creation and the Season)’ 같은 대곡을 작곡했다. 그리고 다시 에스테르하지 가문을 위해 6편의 미사곡, ‘트럼펫 콘체르토’, 9편의 4중주, ‘5번’ ‘ 황제’ ‘놀람’ 등 104편의 심포니, 25편의 콘체르토, 15편의 오페라와 수많은 실내악을 작곡하였다. 일흔이 되면서 하이든의 건강은 악화되기 시작해 작곡을 하기가 점점 어려워졌지만 그는 피아노 곁을 떠날 줄 몰랐으며, 그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작곡한 멜로디가 후일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애국가에 인용되기도 했다. 하이든은 1809년 나폴레옹이 비엔나를 공격하기 시작한 후 일흔일곱에 생을 마쳤다. 황제와 귀족 시대에 가난한 평민으로 태어난 하이든은 자신의 뛰어난 재능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심포니와 현악 4중주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받을 정도로 클래식 음악의 발전에 크나큰 기여를 했으며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과 더불어 인류역사상 가장 중요한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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