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영화 ‘닥터 봉’에서 바람둥이 홀아비 치과 의사와 노처녀 가요 작가로 호흡을 맞췄던 배우 한석규와 김혜수가 15년 만에 한 작품에서 다시 만났다. 11월 25일에 개봉되는 영화 ‘이층의 악당’에서 한석규와 김혜수는 ‘닥터 봉’에서 그랬던 것처럼 각각 윗집과 아랫집에 살면서 정분을 일으키는 찰떡궁합 연기를 선보였다. 그러나 ‘닥터 봉’에서와 다르게 이번 작품에는 수상한 관계라는 설정이 추가돼 스릴 넘치는 재미까지 선사할 예정이다. 영화 ‘이층의 악당’은 2006년 순 제작비 10억 원에 미치지 못하는 적은 예산과 신인 감독, 톱스타 없는 캐스팅, 청소년 관람불가라는 제한 상영에도 불구하고 230만 관객 동원에 성공한 ‘달콤, 살벌한 연인’의 손재곤 감독이 4년 만에 발표하는 서스펜스 코미디다. 이 영화는 한 지붕 아래에 살게 된 두 남녀가 각자 다른 속셈을 갖고 서로를 필요악으로 만들면서 생기는 이야기를 그린다. 한석규는 소설가로 위장한 정체불명의 세입자 창인을, 김혜수는 신경쇠약 직전의 집주인 연주를 연기했다. 특히 그동안 쿨하고 대범한 여인상을 대변해온 김혜수는 별일 아닌 일에도 눈물을 쏟고, 입만 열면 독설을 내뿜는 30대 중반의 ‘까칠녀’로 변신해 기대를 모은다. 10월 27일 서울 압구정CGV에서 영화 ‘이층의 악당’ 제작보고회가 열렸다. 이날 김혜수는 히스테릭한 배역과 180도 다르게 차분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40대란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외모만큼이나 우아했다. 그녀는 한석규를 ‘석규 오빠’라고 불렀다. -김혜수 씨는 영화계의 모든 시나리오를 받는다고 하는데, 수많은 시나리오 가운데 이 작품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정말 모든 시나리오가 제 손을 거쳐 갔으면 좋겠네요.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요(웃음). ‘이층의 악당’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는 정말 단숨에 읽었어요. 시나리오가 너무 재미있고 캐릭터들이 살아 있었거든요. 실은 손재곤 감독님의 대표작 ‘달콤, 살벌한 연인’을 제때 못 봤어요. 그래서 감독님과 미팅하기 전에 그 영화를 보고 시나리오를 봤더니 이 영화가 어떤 포인트로 만들어질지 구체적으로 보이더라고요. ‘아! 정말 해볼 만한 연기다’하는 기대와 ‘정말 잘해야 하는데 잘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작품이라 선택했습니다. 모든 배우가 그렇지만 작품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역할에 대한 매혹이에요. 그래서 용기를 내봤습니다.” -메이킹 영상을 보니 촬영현장이 아주 명랑하더군요.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소개한다면? “영화감독은 대부분 잘난 분이 많고 카리스마가 넘치는데, 우리 감독님은 조용하고 수줍음이 많아요. 한 번은 감독님과 계단에서 지나친 적이 있는데요, 촬영하면서 많이 만났는데도 저를 보기가 부끄러우신지 헛기침을 하면서 대본을 보는 척하더라고요(웃음). 또 연주 집의 외경을 찍을 때 동네 주민 한 분이 ‘감독님이 누구냐’면서 화를 냈죠. 그럴 때는 보통 제작부가 무마하곤 하는데, 우리 감독님은 저랑 대화하다가 한숨을 쉬더니 주민에게 가서 진심으로 이야기하더라고요. ‘늦은 시간에 주의했어야 했는데 죄송하다’며 머리를 조아렸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 감독님은 좋은 분이구나’ ‘모든 감독이 정말 저래야 하는데’라고 생각했어요. 촬영하는 내내 카리스마보다 더 힘을 주는 감독님의 인간적인 따뜻함에 감동 받았어요.”
-김혜수 씨에게는 특별히 어떤 배려를 해줬나요? “이번 영화에는 여배우가 저와 아역 배우인 지우 둘인데요, 감독님은 여자보다 아이가 먼저인 분이세요. 엉덩방아를 찧는 간단한 장면도 본인이 먼저 해본 다음에 아이가 하기에 괜찮은지를 점검하세요. 솔직히 한 장면을 얻기 위해 본의 아니게 아역 배우에게 잔인할 때가 많거든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당시엔 삐친 척 했지만 속으론 좋았어요. 석규 오빠에게는 연기하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촬영하는 내내 오빠랑 다시 하니 좋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석규 오빠는 점잖기 때문에 애드리브를 안 할 줄 알았는데, 촌철살인의 애드리브가 순간순간 나와서 웃음을 참다가 NG를 많이 냈어요. 그중에는 실제 영화에서 삽입된 애드리브도 있고요. 현장 분위기는 매우 따뜻하고 진지하고 유쾌했어요. 프로덕션 기간이 짧아서 아쉽긴 했지만 밀도 있게 촬영했습니다. 더운 여름이었지만 배우와 스태프가 혼연일체가 돼 내적으로는 감동적이고 밖으로는 유쾌하게 작업했습니다.” -15년 만의 호흡인데요, 어떤 변화를 느꼈습니까? “배우들도 작품에서 만나지 않으면 서로 어려운 게 있어요. 하지만 석규 오빠는 어릴 때 만나서 달라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석규라는 사람은 변함이 없어요. 오히려 더 깊어졌죠. 오빠는 저와 함께하는 열망이 있다고 말했지만, 석규 오빠는 영화배우를 떠나 관객으로서 저의 세대에 인생의 영화를 남겨준 배우입니다. 그만큼 오빠는 개인적으로도 영화배우로도 특별한 분입니다. 함께하게 돼서 감동적인 순간도 많았지만 그동안 함께한 많은 배우 중에 저를 ‘우리 혜수’라고 불러주는 사람은 오빠밖에 없어요. 정말 짠합니다.” -연기하면서 한석규 씨에게 도움을 받았나요? “제가 연기를 마음껏 할 수 있었던 데는 석규 오빠의 도움이 있었어요. 화합하려고 의식하지 않아도 이미 오빠같이 진중한 사람이 온 마음을 열어서 받아주니, 저는 너무 편하게 연기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오빠 고맙습니다.” -언제 자신이 선배 배우라는 사실을 체감합니까?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다 보니 경험하지 않아도 정서적·감정적으로 공감하게 돼요. 최근 영화와 방송에서 성숙한 배우들이 점점 좋은 연기를 선보일 수 있는 이유는 그런 이유 아닌가 싶어요. 나이를 먹으면 외적으로는 잃는 게 생기지만 배우로는 진정한 실체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딸 가진 어머니를 연기했는데요,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사실 어머니 역할은 어릴 때부터 해왔어요. 저의 TV 데뷔작이 1987년에 방영된 ‘사모곡’인데요, 저는 16세부터 40대 중반까지를 연기했어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엉터리 분장으로 나이를 가렸죠. 아들로 나온 배우는 저랑 6살 차이밖에 안 났고, 신랑은 제 나이의 두 배였어요. 그때는 어린 배우가 엄마 역할을 한다고 하면 기특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엄마 역할은 심심치 않게 해왔지만 포인트가 항상 모성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모성이 어필된 작품은 ‘분홍신’이었죠. 이번 영화도 어머니의 역할과 모성의 역할이 부각되진 않는 것 같아요. 너무 어린 나이에 아이를 갖게 됐고, 자기 인생을 이렇게 만든 원인 중 하나를 아이라고 생각하는 콤플렉스까지 느끼는 캐릭터니까요. 사실 저는 어머니가 돼 있어야 하는 나이가 맞긴 합니다. 제 언니가 저보다 한 살이 많은데 아이 엄마고, 친구 중에는 초등학생을 둔 엄마가 많고요. 하지만 꼭 엄마가 아니어도 엄마 역할은 할 수 있고, 관객의 인식도 바뀌었기 때문에 좌절하거나 고민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관객들에게 인사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우리 영화는 코미디에요. 코미디 자체로도 즐겁게 볼 수 있지만 성숙한 코미디이기 때문에 영화를 보고 나면 ‘아! 인생은 이런 거다’라고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걸 못 느끼는 분은 단순히 즐겁게 즐기시면 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