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구 박사 (이종구심장크리닉 원장)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은 거듭되는 실연과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데 대한 절망과 고난을 겪었지만 ‘교향곡 9번’을 통해 음악적으로 희망과 환희의 세계를 만들어 우리에게 선사하였다. 음악 역사상 가장 존경받고 위대한 작곡가로 추앙받는 베토벤은 그의 마지막 ‘교향곡 9번’ 제4악장을 독일 최고 문인 중 한 사람인 쉴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의 ‘환희의 송가’를 가사로 합창곡을 만들었으며, 심포니에 합창곡이 포함된 것도 처음이었다. 매년 연말이 오면 세계의 거의 모든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이 음악을 연주하면서 관객들에게 새해의 새로운 희망을 전해 준다. 이 4악장은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으며 베토벤의 자필 악보는 런던의 소더비에서 미화 3300만 달러로 경매되면서 세계 최고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4악장은 다음과 같은 가사로 끝난다. 모든 사람들아, 이 포옹을 받으라. 온 세상을 위한 거스른 성차에 오른 형제여, 살아 계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포옹을 받아라! 환희여, 하느님의 아름다운 성광이여, 천국의 딸이여! 환희여, 하느님의 아름다운 서광이여! 아마도 쉴러의 시를 곁들인 베토벤의 9번 4악장보다 더 큰 감동을 주는 음악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위안을 주는 음악을 선물한 베토벤의 인생은 환희가 아니라 고난의 연속이었다. 베토벤은 독일 본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할아버지는 플랑드르(네덜란드) 출신의 베이스 가수로서 본의 음악감독이었으며, 아버지는 테너 가수 겸 피아노와 바이올린 선생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심한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젊은 베토벤이 온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 베토벤은 20대에 세계 음악의 수도 비엔나로 가 처음에는 최고의 피아노 비르투오소가 되었으며 후일에는 비엔나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작곡가가 됐다. 비엔나에 도착한 그는 하이든을 만나 그로부터 작곡(대위법)을 배웠으며 바이올린도 배웠는데 때때로 살리에리에게도 레슨을 받고 작곡도 하였다. 그리고 1796년에는 프라하,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베를린 등 중유럽 도시에서 피아노를 연주해 유럽의 가장 유명한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얻기도 했다. 베토벤은 스물여섯이 되던 해인 1796년부터 귀에 심한 이명을 호소하기 시작하였으며 청력이 감퇴하기 시작하였다. 청력 상실의 원인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부검에서 그의 내이가 부어 있었으며 티푸스 같은 열병이나 바이러스의 감염으로 인해 청력 신경에 이상이 생긴 것으로 추청된다. 천재로 떠오르는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가 청각 장애인이 되는 것보다 더 큰 절망과 고뇌는 없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더 크게 더 크게”라고 외쳐야 했으며 청각 장애를 갖게 되면서 그의 성격도 많은 변화를 보였다. 의사들은 그를 하일리겐슈타트로 휴양을 보내는 등 다양한 치료를 권했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으며 베토벤은 이 무능한 의사들에게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의 인생 최고의 작품인 ‘교향곡 9번’을 본인이 지휘하였지만 소리가 안 들리기 때문에 관객이 볼 수 없는 곳에 보조 지휘자를 둘 수밖에 없었다. 심포니가 끝난 줄을 모르고 그가 지휘를 계속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가 관객의 환호소리를 듣지 못하자 한 단원이 베토벤의 몸을 관객 쪽으로 돌리게 하였으며 기립박수로 열광하는 관객을 보고 그는 눈물을 흘렸다. 평생 최고의 음악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베토벤에게는 또 하나의 고난이 있었다. 그는 많은 여자를 사랑했지만 그의 사랑은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하고 평생 독신으로 쓸쓸하게 인생을 마친 것이다. 1800년 귀족인 브런스비크 가정의 줄리에타(Giulietta)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는 ‘피아노 소나타 14번(월광)’을 그녀에게 헌정하였다. 그러나 그녀 아버지의 반대로 그 사랑은 깨져버렸다. 베토벤이 귀족의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왕궁에서 음악인은 하인이나 다름없었으며 귀족들은 살롱에서 음악을 즐기고 대가로 돈을 지불했지만 결코 같은 신분이 될 수는 없었다.
조세프 데임(Deym) 역시 귀족 출신의 미망인이었는데 베토벤과 가까워졌으며, 베토벤은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했지만 그녀는 평민과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귀족인 자신의 의무라 생각했다고 한다. 1810년에는 테레사 말파티(Malfatti)를 사랑하여 ‘엘리제를 위하여’를 헌정하였지만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베토벤은 많은 연애편지를 썼지만 그중에도 불멸의 연인(Immortal Beloved)을 위해 쓴 3통의 편지가 가장 유명하다. 이 편지 내용은 영화로 제작되기로 하였는데 베토벤의 팬이라면 볼 만한 영화이다. 1811년과 1812년에 베토벤의 건강이 악화되자 의사들은 베토벤을 보헤미아의 휴양지 테플리체로 보냈으며 이곳에서 그는 이름과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한 여인에게 불타는 듯 한 열정의 편지를 썼고 이 편지는 그가 죽은 후에야 발견되었다. 이 편지의 내용을 보면 이 두 사람은 상당 기간 연인이었으며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면서 쓴 편지이다. 이 여인의 이름과 다시 만날 장소가 명시되지 않은 것을 보면 이 여인은 사회적 신분이 높거나 만나서는 안 될 사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베토벤은 약 15년 간 죽을 때까지 이 편지를 간직하면서 그 애인을 가슴에 담고 살았던 것 같다. 독일에서는 이름에 ‘Von(from)’이 붙으면 귀족 신분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베토벤은 귀족으로 인정받기를 원했지만 베토벤의 조카의 양육권을 두고 제수와 재판을 할 때 처음에는 귀족만을 위한 법정에서 재판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의 할아버지의 고향 네덜란드에서는 ‘Van’이 귀족의 신분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그는 평민을 위한 재판소에서 재판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사건과 조카가 베토벤의 심한 통제와 간섭에 항의하여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한 것은 베토벤에게는 또 하나의 커다란 실망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베토벤이 사망한 후 그가 두 명의 형제에게 쓴 한 통의 편지 ‘하일리겐슈타트 유서(Heiligenstadt Testament)’가 발견되었는데 이 편지에서 그는 심각하게 자살을 고려한 일이 있다고 고백했으며 사람들이 자신을 괴짜라며 비난하고 있다면서 자신의 본성이 그렇지는 않지만 청각 장애인이 된 자신의 비운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하기도 하였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로 보아 베토벤은 독불장군의 천재로서 친해지기 어려운 성격의 사람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그의 자존심은 하늘 높은 줄을 몰랐으며 살롱에서 연주 도중 참석자들이 잡담을 하거나 자신의 연주에 열중하지 않으면 거침없이 연주를 중단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괴팍한 천재로서 여성들이 좋아하는 우아하고 부드러운 남자가 될 수 없었으며 평생 사랑하는 아내가 차려주는 따뜻한 식사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채 마음에 안 드는 가정부에게 소리만 지르면서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인생의 절망과 고난을 극복하고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 그리고 환희의 상징이 된 음악을 유산으로 남겨준 천재이자 위대한 음악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