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성 동국대 교수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4번 출구를 나오면 좌측으로 GS주유소가 있다. 이 주유소를 끼고 좌향좌한다. 2차선 차도인데 다소 길이 어수선하다. 직진하면 좌측에 낙성대아파트가 있고 약간 오르막길이 나타나면서 다세대 주택들과 만나게 된다. 50m 정도 앞쪽에 비전스터디 학원, 운산빌라가 있는데 학원과 빌라 사이 길로 접어들면 곧 마을의 비교적 큰 길과 만나면서 우측으로 은혜할인마트가 보인다. 이 할인마트 20m앞 골목길로 접어들면 곧바로 강감찬(姜邯贊) 장군이 태어난 옛 집터, 즉 낙성대 유허(落星垈 遺墟)가 나온다. 주택가의 조그만 놀이터만하기 때문인지 근처에 사는 이들도 잘 알지 못하는 곳이다. 그곳의 강감찬 나무라고 불리던 고목이 고사하자 같은 형태의 중간치 나무를 대신 심어 놓았다. 또한 거북석 등 위에 반듯한 유허비(遺墟碑)를 세워 놓아 이곳이 강감찬 장군의 탄생지임을 알리고 있다. 세종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면 강감찬 장군의 탄생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어떤 사신 하나가 밤에 시흥군(始興郡)에 큰 별이 인가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아랫사람을 보내 그 집으로 가 보니 부인이 아들을 낳았다. 사신이 마음으로 이상히 여겨 데리고 가서 길렀는데 그가 강감찬이다. 후에 송(宋)나라 사신이 강감찬을 보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절을 하면서 이르기를 ‘문곡성이 보이지 않은 지 오래 되었더니 이제 여기에 있었구려(文曲星不見久矣 今在此云)’라고 하였다고 한다.” 문곡성이 도대체 어떤 별이기에 송나라 사신이 자신도 모르게 절을 하였을까? 회심곡(回心曲)의 가사는 ‘어머님 전 살을 빌고, 아버님 전 뼈를 받고, 일곱 칠성(七星)님 전에 명(命)을 받고, 제석님 전 복을 빌어…’ 이렇게 이어진다. 동양적 정서로 사람은 그냥 태어나지 않는다. 어머님 아버님께 몸을 받았다면, 명(命: 목숨과 운명)은 칠성님(北斗七星) 즉, 일곱별로부터 그 정기를 받는 것이다. 그 일곱별의 이름이 탐랑성(貪狼星) 거문성(巨文星) 녹존성(祿存星) 문곡성(文曲星) 염정성(廉貞星) 무곡성(武曲星) 파군성(破軍星)이다. 그 중에서 문곡성은 권(權)을 뜻하는데 이는 저울추이기도 하고 권력이기도 하다. 균형과 정의를 추구하는 별이며 힘이 필요하면 힘을 쓰는 별이다. 사람은 몸을 부모로부터 받지만 목숨과 운명은 칠성님, 그 중에서도 기준이 되는 문곡성으로부터 받는다는데… 송나라 사신 입장에서 볼 때 강감찬 장군은 균형과 힘을 갖춘 하늘의 신이었으니 자신도 모르게 넙죽 엎드렸을 것이다.
이제 낙성대로 향한다. 옛 집터에서 나와 골목길 우측으로 200여 미터 가면 골목길이 끝난다. 이곳에서 계속 500미터 가량 오던 방향으로 간다. 관악구민종합체육센터가 나오고 이어서 낙성대가 있는 낙성대 공원이 나타난다. 70년대 이순신 장군의 현충사가 그렇듯이 이곳도 새로 단장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落星垈’란 글씨가 자연석 위에 새겨져 있다. 서울시 유형문화제 4호인 고려 3층 석탑도 단아한 모습으로 탐방객을 맞는다. 정면에는 사당이 있는데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모신 안국사(安國祠)다. 무관 복장의 당당한 장군 모습이 1천년이 지난 뒤 이 땅의 후손들을 맞는다. 장군은 본래 무관이 아니다. 문과(文科)로 급제하여 문신으로 벼슬에 나아갔으나 당찬 담력과 깊은 지혜로 국난이 있을 때마다 나라의 어려움을 헤쳐 나갔다. 강감찬 장군의 공은 귀주대첩(龜州大捷)으로 대표된다. 한민족은 지금부터 1천 년 전의 귀주대첩을 끝으로 국가 간 전쟁에서 단 한 번의 승리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이순신 장군의 혁혁한 승리는 국지전인 전투에서의 승리였지 국가 간 전쟁의 승리는 아니었다. 충무공이 전쟁을 책임진 도원수였다면 어찌 되었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으나 아쉬움이 크다.) 장군이 살던 11세기 동양의 세력 판도는 대륙의 패자(覇者) 요(遼)나라(거란)가 최강의 국가였으며 송나라는 세력이 약해진 상태였다. 한반도의 고려도 요나라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형편이었고, 만주의 금나라도 요나라 앞에서는 벌벌 기는 형편이었다. 이런 요나라의 소손령이 송나라와 고려의 친밀한 관계를 끊으려고 80만 대군으로 침략하였다. 이것이 거란의 1차 침략인데 거란의 약점을 파악한 서희 장군이 실리외교를 펼쳐 오히려 강동육주(江東六州)의 영토를 확보하면서 강화조약을 성공시켰다. 그 뒤 고려는 거란의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으로 침략한 2차 공격을 힘겹게 견뎌냈다. 이어 1018년 거란 성종의 사위 소배압(蕭排押)의 개경직공(開京直攻: 주위의 성들을 공격하지 않고 서울인 개성을 향해 속전속결로 공격하는 전략)을 하자 장군은 71세의 나이에 상원수(上元帥)의 임무를 맡아 지연작전으로 힘을 빼고, 이어 귀주에서 섬멸시켰으니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민족의 긍지다. 이 후 거란은 점차 쇠약해져 갔고, 고려는 주변국으로부터 강대국으로 인정받았으니, 금나라에서 보내온 외교문서는 “고려국 황제”(이전까지는 중국의 제후국으로 ‘고려왕’이었다)라고 칭하고 있다. 위대한 선조 강감찬 장군께 고개 숙여 감사드리고 다시 길을 간다. 낙성대 정문을 바라보면 우측 담장을 끼고 능선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이 길로 500미터 쯤 가면 관악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길과 만난다. 편안한 흙길이 계속된다. 낙성대역 4번 출구에서 낙성대를 들리지 않고 직접 이 능선 길로 오르기를 원하는 이들은 GS주유소 뒤쪽에서 02번 마을버스를 타고 인현아파트 앞에서 내리면 이 능선으로 쉽게 오를 수 있다. 관악산을 향해 능선 길을 1킬로미터쯤 오르면 이제부터 바위가 자주 나타난다. 관악산은 바위산이다. 바위산들에는 대개 산 이름에 악(岳) 자를 붙였는데, 경기도에는 경기오악(京畿五嶽: 관악, 감악, 송악, 화악, 운악)이 있다. 약간의 땀을 흘리며 한 시간 정도 오르면 등산 표지판에 상봉약수터가 나타난다. 시원한 약수가 있으니 한 바가지 시원하게 마시면서 잠시 쉬었다 간다. 필자가 이곳에 지방문화재인 마애불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 갔다가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해 한 나절을 헤맨 일이 있다. 이 근처에서 운동하는 이들께 물어 보아도 금시초문이라 하니 그럴듯한 바위가 서 있는 곳이라면 샅샅이 뒤질 수밖에 없었다. 힘은 다 빠지고 해는 넘어가기 시작하고…. 그러다가 약수터로 다시 돌아 와 입구 큰 바위 아래로 내려가 바위를 감싸고 돌아보니 바로 그곳에 저녁 석양을 받으며 마애불이 부끄럽게 숨어 있는 게 아닌가? 너무 반가워 바위를 어루만지고 뺨을 비볐다. 아마도 마애불이 깜짝 놀라셨을 것이다. 그 후 다른 이들에게도 이 마애불을 소개하고 싶어 이곳에 와서 50미터 반경 내에서 마애불을 찾아보라고 퀴즈를 내면 찾는 이가 없었다. 문화재를 관리하는 이들에게 욕도 했었다. 아니 입구에는 커다란 안내판을 세워 놓고 막상 그 뒤에는 어떤 힌트조차 없이 오리무중으로 헤매게 하다니…. 이건 근무태만 아닌가?
마애불의 코를 사람들이 찾아가 뭉개놓으니 낙성대 상봉약수터의 마애불을 찾기 힘들도록 숨겨 놓은 것은 마애불을 보호하려는 뜻일런지… 그러다 문득 나 나름대로 정리를 했다. “일부러 그랬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문화유적을 찾아다니다 보면 많은 곳들이 심하게 훼손된 아픈 상처를 보게 된다. 북한산 아래 평창동에도 마애불과 마애 양각화가 있는데 얼굴은 뭉개지고, 코와 팔은 잘려 나가고…. 너무 아픈 모습들을 보면 이런 외진 곳에 홀로 서 있는 마애불이라면 응당 숨겨 두는 것이 좋으리라 하는 생각을 갖고 되고, 관리하는 이들에게 감사한 마음까지 든다. 이 곳 마애불은 부조(浮彫)와 선각(線刻)으로 새긴 미륵불(彌勒佛)인데 산 아래 낙성대 쪽을 바라보고 있다. 명문에는 미륵존불 숭정삼년 경오사월 일 대시주 박산회 양주( 彌勒尊佛 崇禎三年 庚午四月 日 大施主 朴山會 兩主)라고 기록하고 있다. 56억 7천만 년 뒤에 나타나 미래를 여는 메시아인 미륵불을 새긴 것으로, 숭정(崇禎)이란 명나라 마지막 임금인 의종(毅宗)의 연호다. 우리 것으로 환산하면 인조 30년 1630년이니 약 400년 전에 새긴 것이다. 여기서도 안타까운 것이 우리의 연호로 기록하지 못하고 중국 연호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시주는 박산회 부부가 했는데 박산회라는 이는 역사에 아무 기록이 없으니 아마도 아래 마을에 살던, 밥술은 먹을 수 있었던 민초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나 고려의 마애불은 왕실이나 토호 세력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반면, 조선의 마애불은 대부분 민초들의 자금으로 이루어진 것들이어서 기교나 예술성에서는 부족할지 몰라도 그 정성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
북릉관악마애불(北稜冠岳磨崖佛) 관악 북능선 마애불님 수대가부사백년(誰待跏趺四百年) 사백년 가부좌 틀고 누구를 기다리나요? 민초정성불가망(民草精誠不可忘) 민초의 정성 잊을 수 없어 금시입정좌선언(今時入定坐禪焉) 지금도 입정에 들어 좌선하시는지요? 약수터 축대 아래로 내려가면 아직도 깨진 기와 조각을 찾을 수 있다. 이곳은 잊힌 절터라는 증거다. 가만 살펴보니 돌층계의 흔적도 보인다. 박산회 부부는 이 절의 신도로서 절 뒤 바위에 다음 세상을 열 미륵불을 염원했던 것이다. 믿음 깊었던 부부시여, 부디 미륵이 여는 용화세계에 다시 피어나소서! 약수터를 떠나 주능선을 향해 오른다. 5분이 지나지 않아 사당동에서 올라 연주대로 오르는 주능선에 닿는다. 이곳에서 한 시간 오르면 관악산 정상 연주대로 갈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은 관음사로 하산하려 한다. 주능선이다 보니 하산 길은 잘 다듬어져 있다. 이윽고 바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지점에 사당동과 관음사의 갈림 이정표가 서 있다. 관음사로 내려가는 길은 시야는 좋으나 바위길이 험하다. 무슨 일이든 내려가는 일도 오르는 일만큼 힘들지 않던가? 조물주는 인간세상을 어느 일에서나 힘껏 살도록 만들어 놓으신 것 같다.
대부분 절에는 산신각이 있는데 관악산에는 용왕각이 있으니, 이는 관악의 불 기운을 끄려는 것일까. 시원한 용왕 약수를 한 모금 마신다 30여분 지나서 관음사(觀音寺)에 도착한다. 895년 신라 진성여왕 9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절은 새로 불사를 하여 깨끗하다. 그러데 건물, 탑, 관음상 등에서 뭔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든다. 예전의 자연스럽고 아름답던 건물과 불상을 보던 눈이라 현대적인 것에 낯설어 그런가 보다. 특이하게도 이곳에는 용왕각(龍王閣)이 있다. 산신각은 대부분의 절에 있으나 용왕각은 드문 편이다. 관악이 불의 산이라 용왕을 모셨는가 아니면 물속 중생들을 위해 모셨는가? 용왕각 앞에는 약수가 있는데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약수이다. 용왕각과 약수는 궁합이 잘 맞는다. 내려오는 층계 돌기둥에는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 쓰여 있으니 ‘바로 이 마음이 부처’라고 옮겨야 하나, ‘마음 가는 곳이 곧 부처다’라고 옮겨야 하나 고민한다. ‘관음대장군’ ‘관음여장군’ 두 장승의 배웅을 받으며 절문을 나선다. 사당동으로 내려오는 길은 고즈넉하다. 봄철 꽃이 흐드러진 계절에는 무릉도원 같은 느낌을 주는 길이다. 이윽고 사당동이 보이는 큰 길로 나서는 지점에 도착하는데 이곳이 옛 승방평(僧房坪)이다. 절의 내력을 기록한 범우고(梵宇攷)와 가람고(伽藍攷)에는 관음사가 소개되어 있다. 승방평과 승방교(僧房橋)를 기록했다는데 승려들로 넘쳤던 승방평에는 바쁜 현대인들이 그 뜰을 가득 메우고 있다. 승방교에서는 무동답교(舞童踏橋) 놀이가 장관이었다 하는데 일제강점기 때 없어진 이후 영영 그 맥을 찾을 수 없다. 그나마 위로할 일은 ‘무동(舞童)타다’라는 말이 ‘무등타다’로 바뀌어 오늘날에도 생생히 살아 있다는 점이다. 세월이 가면 땅도 그 주인이 바뀌고 말도 그 모양을 바꾸는 것이리라.
교통편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4번 출구 걷기 코스 낙성대역 ~ GS주유소 끼고 좌향좌 ~ 골목길 직진 ~ 운산빌라 끼고 우향우 ~ 은혜할인마트 20m앞 골목길 ~ 낙성대유지 ~ 낙성대 ~ 낙성대 우측 등산로 ~ 능선길 ~ 상봉약수터(마애불) ~ 능선길 ~ 좌향좌(사당동 방향) ~ 갈림길(사당동-관음사) ~ 관음사길 ~ 관음사 ~ 사당역 CNB저널은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 낮에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유적지를 탐방 합니다. 3~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본지 Art In 편집주간)로 메일 보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