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8호 편집팀⁄ 2010.11.29 14:40:59
이한성 동국대 교수 북한산성길을 가고자 하면 사람들은 주로 구파발을 지나 북한산성 입구로 들어선다. 그러나 오늘은 3호선 지축(紙杻)역에서 내려 보자. 이곳에서 077 마을버스를 타면 오래된 마을길을 돌아 북한산성 입구에 닿을 수 있다. 차가 쌩쌩 달리는 큰 길보다 구불구불한 마을 고샅길을 지나면 한결 분위기가 산다. 조선조 숙종~영조 연간에 북한산성에서 주석하던 승려 성능(聖能)의 ‘북한지(北漢誌)’에 의하면 이곳 지명이 지장리(紙匠里)로, 종이 만드는 이들이 거주하던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그 옆 동리는 아마도 싸리골(杻里)이었을 것이다. 1914년 일제는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마구잡이로 글자 쪼아 맞추기를 했는데 그 때 지(紙)와 축(杻)을 합쳐 지축이 되었다. 우리가 전통의 상징으로 알고 있는 인사동(仁寺洞)도 1914년 일제에 의해서 관인방(寬仁坊)과 대사동(大寺洞: 지금의 탑골공원인 원각사가 있어서)이 짜깁기되어 인사정이 되었다가 해방 후 인사동이 되었으니 뒤끝이 찜찜하다. 마을버스가 북한산성 입구에 내려 준다. 상가 지역은 산성마을에서 이주해 오는 이들이 새로 상가를 조성하느라고 바쁜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잘 뚫린 아스팔트길로 해서 북한산초등학교,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에 이른다. 전에는 이곳에서 포장길을 벗어나 계곡 산책로로 접어들었건만 요즘은 환경복원 공사가 길을 막고 있다. 아쉽지만 아스팔트길로 오른다. 차량 통행이 줄어 쾌적하게 걸을 수 있다. 이윽고 대서문(大西門)에 닿는다. 대서문은 사실상 북한산성의 정문에 해당한다. 다른 문들은 산 위로 올라간 곳에 세운 반면 대서문은 구파발로부터 평지를 따라 접근할 수 있었기에 옛사람들의 북한산 통로는 대부분 대서문으로 통했다. 숙종(肅宗) 37년(1711년) 북한산성이 축성되면서 소로가 뚫렸고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하면서 당시 경기지사 최헌길(崔獻吉) 씨가 미군 불도저를 동원하여 5m 폭의 길을 냈다고 한다. 이 길을 기반으로 해서 그 후 길이 넓혀지고 북한동 산성마을까지 포장이 되었다. 이제는 산행 인구가 늘면서, 대서문길도 차가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점 이외에는 정문으로서 큰 의미는 없다. 일제 때 홍예(虹霓: 문 아래 석물로 무지개처럼 된 부분)만 남고 문루(門樓: 나무와 기와로 만든 건축 부분)는 멸실되었던 것을, 최헌길 지사가 1958년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대서문이라고 쓴 편액(扁額)은 이승만 대통령의 글씨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유학한 분이라 한학을 모를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는 국내에 있을 때 한학을 깊게 공부한 분이다. 지금도 편지글이 많이 남아 있는데 어지간한 학자도 읽기 어려운 초서체의 글들이 많다. 대서문을 지날 때면 문루는 그냥 그러니 놓아두고, 석재건축 부분은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 좋다. 특히 용머리 누혈(漏穴: 빗물 빠지는 곳)을 보면 용의 입으로 물이 빠져 나가게 만든 수작임을 알 수 있다. 그나저나 북한산성의 문은 몇 개나 있을까? 북한산 등산을 어느 정도 한다 하면 도전하는 코스가 북한산성 일주 코스다. 흔히들 ‘12성문 종주’라 하는데 일반적으로 그 출발은 대서문에서 하고 성벽을 한 바퀴 다 돌고 대서문으로 돌아오면 12개의 성문을 만난다. 북한산성의 성문을 보통 12개로 알지만, 숨은 문 두 개가 더 있어. 홍수에 씻겨 내려간 水門, 그리고 ‘성문 안의 성문’ 중성문 남아 있어. 그렇다면 북한산성의 성문은 12개였을까? 답은 ‘아니다’이다. 대서문 옆 계곡에 수문(水門)이 있었는데 1915년 홍수에 무너졌으며, 나머지 유구(遺構)도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깨끗이 씻겨 나갔다 한다. 또 하나의 문은 중성문(中城門)이다. 북한산성이 축성된 다음해(숙종 38년 1712년) 숙종은 친히 이 성을 살폈는데 대서문이 있는 서북 방향이 평지라서 적의 침략에 취약하므로 성 안에 겹쳐 성을 쌓았으니 중성(重城)이며, 이 성의 문 이름을 중성문이라 하였다. 그러니 북한산성의 문은 14개였으며 지금은 수문을 뺀 13문이 남아 있다.
대서문을 지나면 바로 우측에 무량사(無量寺)란 절이 나온다. 큰 길 옆에 있으나 관심 갖는 이도, 들려 보는 이도 드물다. 그러나 이 절은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李垠) 공의 어머니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가 100일 기도하여 영친왕을 잉태한 원찰(願刹)이다. 조선의 슬픈 멸망사를 이 절은 잊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무량사를 지나 10분이 안 되어 북한동(北漢洞, 과거의 북한리) 마을에 도착한다. 파전, 빈대떡, 막걸리 냄새가 가득 찼던 이곳은 이제 상가가 모두 아래로 떠나고 한두 집만이 마지막 산객을 맞고 있다. 이곳 북한산성 마을은 참으로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4대 개루왕(蓋婁王) 5년(132년) 춘이월에 북한산성을 쌓았다(春二月 築北漢山城)는 기록이 있고, 23대 개로왕(蓋鹵王) 15년 10월에는 병사를 나누어 북한산성을 지키게 했다(冬 十月, 分北漢山城士卒戍之)고 기록됐다. 또한 고려의 최영 장군도 요동 정벌을 위한 준비를 이곳에서 했으니 마을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군인들의 처자권속이 거처했을 것이다. 조선 숙종 37년(1711년)에는 북한산성을 쌓는 역사가 시작되고 삼군영(三軍營: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군사들이 상주했기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백제나 고려를 제외하더라도 300년의 역사를 가진 마을인 것이다. 이제 국립공원 내의 환경보호를 위해 이 곳 마을은 폐쇄되고 주민들은 아래 북한산성 입구로 이주했다. 자연을 지키기 위한 고육책인 것을 알면서도 300년 된 마을이 흔적 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다. 사실 북한동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승병이 강제 해산되자 사찰들의 폐사됐고, 1907년 이곳에 주둔하던 삼군영의 병사들이 일제에 의해 쫓겨나면서 더욱 피폐해졌다. 한 술 더 떠 의병의 근거지가 될 만한 건물은 모두 파괴하고 일본 헌병까지 이곳에 주둔하였다. 하늘도 무심해 1915년 홍수에 이어, 1925년 을축년 대홍수까지 겹쳐 북한산성과 북한동은 극도로 피폐해졌고 쓸 만한 건물은 남아나지 않았다. 그래도 주민들은 어려움을 딛고 윗마을 40가구, 아랫마을 40가구가 농사짓고, 나무해다 팔고 살았다는데 6.25를 맞으면서 또 한 번 초토화되었다. 1.4후퇴 당시 중공군이 몰려오자 UN군은 방어라인을 수색, 연희고개, 녹번에 구축했는데, 텅 빈 북한산성에 인민군들이 진을 치자 연합군은 사방에서 공격을 퍼부어 1,000 명이 넘는 인민군이 죽거나 부상당한 치열한 전투지역이기도 했다. 다행히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제의 핍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에 원효봉 상운사에 기거한 인연이 있었다 한다. 그뿐인가? 그 어머니는 문수봉 아래 문수사(文殊寺)에서 100일 기도한 후 이승만을 낳았으니 이승만 대통령이야 말로 북한산의 아들인 셈이다. 그런 인연으로 이곳을 방문한 이 대통령은 주민들을 위해 관광사업을 추진키로 했다 한다. 그런데 4.19로 하야하자 이곳 주민들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고 이때부터 놀이객을 상대로 장사를 시작한 것이 북한동의 파전, 도토리묵, 막걸리 장사의 시작이었다. 신문기사에 의하면 마지막 55가구가 곧 이주한다고 한다. 북한동 마을은 이제 파란만장한 세월을 접고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셈이다. 지친 다리로 산에서 내려오면 파전, 도토리묵에 막걸리를 팔고 산성입구까지 봉고차로 날라 주던 북한동의 기억이 떠오른다. 마을 다리를 건너면 삼거리다. 여기에서 좌로 방향을 바꾼다. 이제는 보리사가 된 등운각(이승만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해 지은 영빈각) 앞을 지나면 약간 오르막길로 바뀌면서 좌로 계곡을 낀 본격적인 산길이 이어진다. 물소리와 새소리가 섞인 산길이다. 조선시대에 백운대 쪽으로 가려면 주로 이 길을 이용하였다. 지금의 우이동 도선사길은 일제가 백운대에 오를 수 있게 쇠말뚝을 박고 줄을 연결한 1927년 이후부터 주로 이용된 길이다. 500여m 오르자 원효봉과 백운대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온다. 좌측 원효봉길로 들어선다. 가파른 등정길이 시작되려는데 양쪽의 나무기둥에 쓰여 있기를 ‘입차문내 막존지해(入此門內 莫存知解: 이 문을 들어서면 알음알이를 지니지 마라).’ 10여분 오르자 오른쪽으로 갈림길이 나오고 그 끝에 상운사(祥雲寺)가 있다. 안내판이 서 있는데 한자가 많이 틀려 있는 것이 거슬린다. 성능의 북한지(北漢誌)에 의하면 상운사는 영취봉 아래 133칸이며 승려 회수가 창건했다. 조금 더 언급하면 상운사는 경종(景宗) 2년(1722년)에 승병장 희수가 창건한 절로 북한치영(北漢緇營: 승군 본부)의 승려들이 거처한 곳이다. 창건 당시 이름은 노적사(露積寺)였다.
지금 노적봉 아래 노적사는 옛 진국사(鎭國寺) 터에 60년대에 중창한 절이다. 숙종 37년(1711년) 북한산성 축성을 마친 후 조정에서는 이 산성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로 고민하였다. 그 고민의 해결방법으로 절을 지어 승려를 머물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삼군영의 군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이 때 지어진 절이 용암사, 보국사, 보광사, 부왕사, 서암사, 원각사, 국녕사, 상운사, 태고사, 진국사, 봉성암, 원효암으로, 승려(승군) 360명과 삼군부 군사 1000여 명이 지키게 하였다. 여기 승군의 총대장을 팔도도총섭(八道都總攝)이라 불렀고 전국 승려를 거느리는 역할을 맡겼다. 절로 들어서니 흰둥개가 몹시 짖어댄다. 지난 여름 새끼를 낳았다 한다. 대웅전 옆에는 400년 된 향나무가 길손의 눈길을 잡는다. 고양 유형문화제(190호)인 목조아미타삼존불이 있고, 약사전에는 영험하다고 알려진 약사여래가 있다. 탑도 보이는데 3층 석탑으로 고려 중기 석탑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 옆으로 무너진 석등도 보인다. 옛 승군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확 트인 경치를 보면서 절문을 나서서 원효봉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10여 미터 오르다 보면 바위들이 나타나고 우측으로 평평한 한 뼘 땅이 보인다. 그 앞 우뚝 선 암벽에 마애불이 선각돼 있다. 아마도 조선 후기 제작된 마애불 같다. 바위에 홈을 판 흔적으로 보아 비바람을 가리는 구조물을 설치했었을 것이다. 평평한 땅 안쪽으로는 그다지 세월 흐르지 않은 세 기의 부도(浮屠: 고승들의 유골을 모시는 탑)가 눈에 띈다.
마애불을 만나고 나오면 다시 오르는 길이 계속되는데, 200~300m 더 오른 곳에 산성의 북문이 자리 잡고 있다. 홍예만 남고 문루는 복원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다지 다니지 않는 위치이다 보니 그윽한 비밀의 문 같은 느낌을 준다. 이곳에서 우측 등선을 따라 가면 염초봉(영취봉)을 거쳐 백운대로 이어진다. 그러나 절대로 이 코스로 가서는 안 된다. 해마다 사고로 여러 사람이 소중한 목숨을 잃는 북한산 최악의 험한 코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 갈 길은 좌로 이어진다. 가파른 성벽길을 10분 오르면 드디어 평평한 지대가 나타나면서 시야가 트인다. 원효대(봉)이다. 산봉우리의 이름 대(臺)와 봉(峰)을 구분하는 명확한 기준은 없으나 정상이 평평하면 ‘대’라 부르고, 뾰죽하면 ‘봉’이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원효봉은 정상이 평평하기에 원효봉, 또는 원효대라 부르고 있다. 가파른 성벽길을 오르면 탁 트인 원효봉 나와. 북한산에 봉우리 많지만 가슴 뻥 뚫리게 연봉을 바라보기에는 원효봉이 최고. 원효봉은 필자가 다녀 본 북한산의 곳곳 어디보다도 북한산의 모든 봉우리와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는 최고 전망대 위치다. 앞과 옆으로 펼쳐지는 북한산 연봉을 바라보노라면 가슴이 뻥 뚫린다. 좌로는 백운대, 망경대, 노적봉으로 이어지는 북한산 주능선, 우로는 의상봉, 용출봉, 용혈봉으로 이어지는 의상봉 능선이다. 원효대사가 아니라도 이곳에서 선(禪)에 들어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사진 몇 장 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성길을 따라 내려간다. 초보자는 겁낼 만큼 불뚝 솟은 바위 봉우리에 올라 쇠줄을 잡고 내려가야 하는 난코스를 잠시 만난다. 시야는 시원하지만 다리에 극도의 신경을 써야 한다. 성벽 길을 따라 계속 내려가면 조그만 암자 원효암에 닿는다. 북한지에 따르면 승려 성능 자신이 창건한 10간짜리 작은 암자였다고 한다. 암자 안에는 암벽이 서 있는데 그 밑에는 샘이 있어 절을 존속케 하고, 암자 끝에는 마치 어느 시골집 화장실 같은 작은 건물이 있는데 문을 열고 보면 산신각이다. 진한 채색의 산신도에 산신과 범이 오는 이를 반기니, 종교를 가지고 있건 아니건 산신도 한 번 보시기를 권한다. 필자가 어느 해 겨울, 눈이 푸욱 쌓인 날 이 산신각에 왔었는데 아름다운 여인이 검은 색 양장을 하고 기도하고 있었다. 채색 산신도를 배경으로 기도하는 그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이곳에 오면 그 날이 생각난다. 元曉臺懷元曉庵(원효대회원효암) 원효대 품 원효암에는 霏霏白雪寸三深(비비백설촌삼심) 펄펄 흰 눈이 세 치나 내렸는데 山神前俯一佳人(산신전부일가인) 산신님 앞 고개 숙인 미인은 何願曲盡客心擒(하원곡진객심금) 무엇을 빌기에 산객 마음을 잡는지요? 원효암에서 10여분 내려오면 문루 없는 작은 성문을 만난다. 공식 이름은 서암문(西暗門), 속칭 시구문(屍口門)이다. 산성 안에서 목숨을 다한 이는 떠날 때 대문으로 나가지 못하고 이 곳 암문으로 나갔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주검이 나가는 문’ 즉 시구문이 되었다. 이제 성벽 길을 버리고 숲 속 능선길을 타고 효자리로 향한다. 편안히 이어지는 길이라서 더운 여름 한낮에도 시원하게 걸을 수 있다. 20여분 걸어 드디어 효자리(동)에 도착한다. 이 곳 효자리(孝子里)는 조선말의 효자 박태성(朴泰星) 선생의 효성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선생은 서울 효자동 사람인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곳에 장례 지내고 삼년을 하루 같이 시봉(侍奉: 무덤 곁에서 움집을 짓고 모심)하였다. 그 효성이 널리 알려져 고종 30년 계사(1893년) 때 나라에서 정려비(旌閭碑)를 세웠다. 선생의 무덤과 정려비는 지금도 효자리에 있다. 교통편 3호선 구파발역 1번 출구 ~ 환승 704, 34번 버스 타고 북한산성 입구에서 하차. 또는 3호선 지축역 ~ 환승 077 마을버스 타고 북한산성 입구에서 하차. 걷기 코스 북한산성 입구 ~ 산성탐방지원센터 ~ 대서문 ~ 북한동 마을(삼거리 좌로) ~ 등운각(현 보리사) ~ 원효봉 삼거리(좌로) ~ 상운사 ~ 북문 ~ 원효봉 ~ 원효암 ~ 시구문 ~ 효자리(동) -CNB저널은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 낮에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유적지를 탐방 합니다. 3~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본지 Art In 편집주간)로 메일 보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