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 우리가 쓰고 있는 언어가 지닌 여러 가지 정의들을 정리해 놓은 책이다.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있는 정의들에 특별한 의문을 갖지 않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 정의가 과연 10년 후에도 100년 후에도 여전히 똑같을까?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변하면서 이전에는 없던 말이 생기고 새로운 정의가 나타나기도 한다. ‘정의’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어쩌면 현재 진행 중이고 계속 변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권기범이 확정적이지 않은 ‘모호한 형상’ 들로 풀어가고자 하는 것도 이런 변해가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권기범의 작업은 고정돼 있지 않고 항상 변화무쌍한 유동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기보다는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두는 동양 예술과도 맥락이 닿아 있다. 특히 이런 점은 자연의 힘을 응용한 벽면 드로잉 ‘점블 페인팅(JUMBLE PAINTING)’ 시리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권기범은 고무줄을 인위적인 힘이 아닌 중력 같은 자연의 힘이 닿은 모습 그대로 자유롭게 풀어헤쳐놓는다. 그런 고무줄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그 모습을 벽면에 옮긴다. “벽면 드로잉 작업을 하는 것은 저이지만 물감을 흘러내리게 하는 것은 중력입니다. 자연과 제가 함께 작업을 한다고 볼 수 있겠네요.”
권기범은 변하고 있는 것들을 가장 여실히 보여줄 수 있는 이 시대의 문화 아이콘들에 주목한다. ‘모호한 형상’ 시리즈에서 그는 인체의 미세한 부분을 단면화 시켜 다시 재구축해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그 중 ‘아오키(AOKI)’ 시리즈에서는 혼혈인 모델 아오키를 그리면서 과거와는 달라진 인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전에는 혼혈인이 흔하지 않았지만 이젠 동서양이 함께 섞인 혼혈인이 이 시대의 문화 아이콘이 되는 등 많은 관심을 받고 있죠. 이는 과거에서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모습으로 어떤 이미지가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얼마든지 다르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어요.” ‘모호한 형상’ 시리즈는 ‘모호한’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뚜렷하기보다는 안개에 싸인 듯 흐릿한 형상을 취하고 있다. 권기범은 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하얀색 파우더를 덮는 작업을 반복한다. 그렇게 반복되는 과정 속에 흐릿해지는 그림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잊힌 기억들을 보여준다. 그의 무의식 속에서 나온 이미지들은 집적되면서 또 다른 애매모호한 이미지를 구축한다. 그 불확실한 이미지는 확정적이지 않아 오히려 자유롭다. “제 그림을 볼 때 모든 사람들이 다 다른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사고의 영역을 제한하고 싶지 않아요. 답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보면서 ‘이게 뭘까?’하며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싶습니다.” 02)733~1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