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성 동국대 교수 복원한 초가집 비우당은 무성의하게 보인다. 기둥마다 반듯하게 잘라낸 제재목(製材木)이다 보니 자연스러움이 없다. 기왕에 복원할 것이라면 여느 시골 마을에 가도 만나듯이 자연스럽게 휘어진 소나무로 기둥을 세웠더라면 운치 있지 않았겠는가? 여기만이 아니다. 지정문화재가 아닌 옛 흔적을 복원한 것을 볼라치면 고증(考證)은커녕, 복원이란 명목 아래 국적불명, 시대불명의 창작품들을 무수히 만나게 된다. 이제 이런 일을 하는 분들도 눈높이를 높이고 공부도 적극적으로 해서 이왕에 하는 일, 후세들에게 도움이 되게 해 주기를 바란다. 이곳에 살던 유관(柳寬) 대감에게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우리가 흔히 황희정승의 일화로 알고 있는 비새는 집 이야기는 유관 대감의 일화였다. 유관 대감의 집은 정승답지 않게 동대문 밖 지봉(芝峰) 아래 작은 초가였다고 한다. 어느 날 비가 내리니 방에 비가 줄줄 샜다. 대감은 우산을 쓰고 비를 막으면서 그 아내를 보고 하는 말이 ‘우산도 없는 집은 이 비를 어찌 막을고?’였다. 이런 마누라 속 박박 긁는 소리가 있나? 그런데 그 남편에 그 아내라고, 유 대감 사모님이 빙그레 웃었다고 한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힘들어도 모두 이 대감과 마님처럼 넉넉한 마음이라도 갖고 살기를 기원해 본다. 이제 비우당 마당으로 들어선다. 빗장이 걸린 사립문을 열 때는 반드시 안내판에 쓰여 있는 관리자에게 전화를 하실 것. 그대로 들어가면 센서에 감지돼 관리인이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오는 수고로움을 끼치게 된다. 마당에 들어서면 오른 쪽으로 비우당기(庇雨堂記) 비문(碑文)이 있다. 지봉 이수광 선생이 지었다는 비우당의 내력이 적혀 있다. 1930년대에 이곳을 찍은 사진이 남아 있는데 서낭당인지 부군당인지 조그마한 기와집이 자리하고 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곳은 지봉 바위 밑에 자리한 신성한 자리였던 것 같다. 집 뒤로는 바위 면에 자지동천(紫芝洞泉)이란 각자(刻字)가 새겨 있고, 그 옆으로 깊게 판 샘물이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단종대왕의 비(妃) 정순왕후(定純王后) 송(宋)씨가 폐서인이 되어 이곳에서 시비(侍婢)들과 옷감에 물을 들여 그 삯으로 삶을 이어가던 샘물이라고 한다. 정순왕후 송씨는 무슨 사연이 있길래 이곳에서 물감을 들이며 살아갔던 것일까? 잠시 시간을 뒤로 돌려 이야기를 펼쳐 보자. 성군 세종대왕에게 뜻밖의 사실은 이 분이 상당히 정력(精力)이 왕성하셨다는 점이다. 부인 6명, 자식을 22명이나 두셨으니 조선의 어느 왕보다도 왕성한 정력의 소유자였다. 단종 비 정순왕후가 찬물에 옷감 물들이며 살았다는 ‘비 피하는 집’. 임금 계신 영월 바라보느라 동망봉(東望峰) 됐으니… 그런데 그 장자인 문종은 아들 하나, 딸 둘 낳아 놓고 즉위 2년 4개월 만에 명(命)을 달리하니, 대를 이은 이가 단종(端宗)이다. 단종이 왕위에 오른 나이가 불과 12세였다. 이에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 셋째 아들 안평대군 등은 문종의 아우들로서 조카 단종을 보위해 왕실을 굳건히 해야 할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다분히 야심을 품고 있었다. 수양대군은 곧 이어 계유정란을 일으켜 실권을 잡고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는 왕위를 찬탈했다. 어린 단종은 3년 2개월 만에 상왕으로 밀려나고, 이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돼 영월 귀양길에 올랐다. 지아비가 귀양길에 올랐으니 비록 왕비의 몸이었지만 단종의 비도 군부인(郡夫人)으로 강등돼 폐서인이 되었다. 서인(庶人)이 어찌 궁중에서 살 수 있겠는가? 야사에 전해지기로 개천(청계천의 옛 이름)에 있던 영도교(永渡橋: 동대문 밖에서 왕십리, 송파나루 쪽으로 가는 가장 큰 돌다리였음. 경복궁 중수 때 석재를 떼어다 사용했다 함)에서 부부가 눈물로 이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삶의 터전으로 자리 잡은 곳이 동망봉 아래 자리 잡은 청룡사(靑龍寺)였으며(고친 이름은 정업원淨業院: 왕가의 여인이 머물던 곳이라서 내불당과 같은 개념으로 청룡사를 정업원이라 고쳤다) 그곳에서 한 많은 일생을 지냈다. 이제 단종대왕비 정순왕후 송씨의 가슴 아픈 삶의 길을 더듬어 보자. 정순왕후 송씨는 15세 되던 1454년 1월 22일 한 살 나이 어린 단종과 혼인하였다. 세자나 세손이 아닌 정식 왕과 결혼한 최초의 왕비인 것이다. 그 이듬해인 1455년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니 단종은 노산군으로, 비는 군부인(郡夫人: 종친의 처. 정1품 또는 종1품)으로 강등돼 그 후 궁궐을 떠났다. 그 후 그녀가 일생을 보낸 곳이 이곳 창신동 산골짜기였다. 비우당을 나와 다시 낙산의 동쪽 산줄기(현재는 양쪽이 모두 아파트촌으로 바뀌고 능선은 아스팔트 포장길이 되었다)를 타고 동쪽으로 간다. 비록 차 다니는 길이지만 예전 숲이 우거진 산능선을 마음으로 그리며 걷는다. 그 옛날 산을 넘던 고갯길, 남쪽은 우산각골, 북쪽은 탑골승방이 자리한 옛 고갯길에 닿는다. 임금만 바라보고 궁에서 살았던 궁인들은 언젠가는 궁을 나와야 하고, 갈곳이 없어 비구니 절에서 ‘업을 닦으며’ 살았으니… 앞으로 계속 가면 다시 산으로 올라 동망봉(東望峰)에 이르는 호젓한 산길이었지만 이제는 집, 집 사이 골목길일 뿐이다. 상념을 떨치고 현실로 돌아오면 차들이 다니는 여느 재개발 지역의 높다란 언덕 위 사거리에 불과하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청룡사(靑龍寺), 정업원 옛터(淨業院舊基), 왼쪽으로 가면 보문사(普門寺), 미타사(彌陀寺)로 내려가고, 앞으로 가면 동망봉이다. 정순왕후 흔적을 더듬기 전에 잠시 좌측 탑골(보문동)로 내려가 본다. 조선시대 서울 주변에 대표적 니사(尼寺: 비구니 승들이 거주하던 절)가 네 곳 있었다. 새절승방(현 청룡사), 탑골승방(현 보문사, 미타사), 두뭇개승방(현 옥수동 미타사), 돌곶이 승방(청량리 청량사. 석관동이 돌곶이인데 홍릉과 국립수목원이 들어서면서 이전함)으로서, 이 절들은 많은 궁중 여인들과 관계가 갚다. 조선은 유학의 나라였으나 영혼의 세계와 사후 세계는 불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여인네들은 복을 빌 일도 많았고, 마음을 의지해야 할 곳도 필요했다. 더구나 궁중 여인들은 임금의 특별한 은총을 받지 못하는 한 언젠가 궁을 떠나야 했다. 왕가 사람이 아니면 궁에서 최후를 맞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많은 궁인(宮人)들은 나이 들면 궁을 떠나야 했다. 결혼한 적이 없는 궁녀에게 자식이 있을 수 없고 다행히 친정이라도 있으면 그곳으로 돌아가련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절에 들어가 몸을 의탁했다. 지금 절에 남아 있는 불화(佛畵)를 비롯한 많은 문화재들이 이들 궁녀들의 시주로 조성됐다. 위에 기록한 네 절은 물론, 서울 주변의 많은 비구니 절에는 이런 궁인들이 머물렀다. 10여분 걸어 고갯길을 내려오니 왼쪽으로 큰 사찰을 만난다. 세계 최초의 비구니 종단 보문종(普門宗)의 본사인 보문사다. 새로 조성한 보문사 석굴암 앞에서 기왕에 개당했으니 큰 비구니가 나와서 ‘달라이라마’나 ‘마더 테레사’처럼 세상의 빛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다시 발길을 옆 절 미타사로 옮긴다. 시내 한복판에 있는 절 같지 않게 절집 문으로 들어서니 고요하다. 온 길을 되돌아 고갯길 사거리로 되돌아간다. 이곳에서 좌측 골목길을 거쳐 봉우리로 올라간다. 동망봉이다. 정순왕후가 60여년을 동쪽 영월을 바라보던 동망봉. 혼인한 후 남편과 정(情)도 채 나누지 못한 채 남편을 여위고 일생을 홀로 살면서 남편 떠난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을 동망봉. 10대에서 80대까지 긴 세월 그 하루하루가 얼마나 길고 긴 그리움과 인고의 세월이었을까? 내 가슴이 미어지듯 무너져 내린다. 이제는 체육공원으로 정리해 놓은 정상부를 한 바퀴 돌아본다. 영조 임금이 썼다는 ‘東望峯’이란 어필(御筆: 임금이 친히 쓴 글씨)은 채석장으로 사용하면서 흔적도 없어지고 새로 비석을 세워 ‘東望峯’을 알리고 있다. 비석은 작더라도 그 의미는 크다. 500년 전에는 정순왕후가 바라보았지만 이제는 새해(新年)에 새 해(太陽)가 떠오는 동쪽을 바라보는 동망봉으로 이곳에 서야겠다. 동(東)은 아침이며 시작이며, 새 일의 씨앗이니. 온 길을 다시 내려가 고갯마루 사거리에 오면 이제 좌향좌. 남쪽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채 100m도 내려오지 않아 청룡사를 만난다. 이곳이 정순왕후가 머리 깎고 일생을 의탁한 옛 정업원이다. 자신은 허경(虛鏡: 빈 거울), 세 시녀는 희안(希安), 지심(智心), 계지(戒智)라는 법명으로 일생을 마음 공부하면서 지낸 곳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조 공민왕비 혜비(惠妃: 이제현의 딸)가 공민왕 사후에 이 절로 출가를 했다. 이어 태조 이성계의 셋째 공주인 경순공주도 태종 방원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으로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친 오빠 방번, 방석이 살해되자 이 절에 일생을 의탁했으니 왕가 여인들과 인연이 깊은 절이다. 대웅전과 마주 보는 건물이 있는데 우화루(雨花樓)다. 꽃비가 내리는 집이라니 낭만적이다. 석가모니불이 영취산에서 설법할 때 꽃비가 내렸다 한다. 느낌이 원체 좋은 이름이다 보니 찻집 이름에도 빌려다 쓰고, 운치 있는 정자 이름에도 빌려다 쓴다. 16살때 단종과 헤어져 65년을 혼자 산 정순왕후는, 죽어서도 단종 곁으로 못가고 홀로 묻혔으니 그 외로움 가슴에 미어져… 사람들은 정순왕후와 단종이 이곳에서 눈물로 헤어졌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여부는 몰라도 나도 그것이 사실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별이란 그에 걸맞은 곳이어야 더 찡하지 않겠는가.
청룡사 문을 나서면 담 끝으로 정업원 옛터(서울 유형문화제 5호)를 만난다. 작은 비각이 있으며 그 안에는 정순왕후가 세상을 떠난 지 251년이 되는 1771년 영조가 친필로 써서 세운 비석이 있다. 정순왕후의 한은 1698년(숙종 24년)에 복위되면서 풀리기 시작해, 영조가 1771년(영조 47년)에 정업원옛터 비를 세웠다. 실록 영조 47년 8월 28일조에 보면 왕이 명해 비와 비각을 세우도록 한 일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다행히 이 분의 묘(墓)도 능(陵)으로 격상돼 사릉(思陵)으로 모셨다. 남양주에 있는데 다른 능에 비해 초라할뿐더러 영월에 잠들어 있는 단종과는 500년이 지난 지금도 헤어져 있으니 그것이 마음 아프구나. 길을 내려온다. 기왕이면 골목을 택하는 것이 좋다. 깨끗하지는 않지만 아직도 서울의 옛 고샅길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골목을 벗어나면 거리 이름이 적힌 편액이 있는데 이름이 ‘우산각길’이다. 비우당과 유관 선생을 떠올린 이름이다. 옆으로 지하철 6호선 창신역이 있다. 이제 창신초등학교 방향으로 내려온다. 1km 이상 걸어야 한다. 우측으로 창신초등학교를 만난다. 여기에서 정문으로 들어가 후문으로 나와 보자. 이 지역이 옛 서울 골목길이라 미로 같은 길들이 이어져 있다. 여기에서 우측으로 돌아 옛 당고개를 넘으려는 바로 그 곳에 안양암이 있다. (창신초교로 들어가지 않고 두산 아파트까지 내려와 들어와도 이 길을 만나다. 이때는 길 입구에 ‘불교박물관’이란 표지판이 있다.)
안양암(安養庵)은 100여 년 전에 지어진 절이다. 오랜 역사적 자취는 없지만 이처럼 100여 년 전 작은 절집 모습이나 불교 유물이 고스란히 보존된 절도 드물다.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된 이곳에서 소중한 문화유산이 없어질 위기를 혼신의 노력으로 막아낸 분들 덕분에 불상, 마애불, 탱화 등 무수히 많은 유형문화재가 지켜졌다. 절이지만 불교박물관이란 이름을 함께 쓰고 있다. 1909년 조성된 마애관음보살상과 절 뒤 언덕에 감실을 파고 모신 아미타마애불이 마음에 닿는다. 불교 미술이나 민속학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반드시 들려 보시기를 권한다. 필자가 처음 이 절집에 갔을 때, 골목길의 여염집 같은 절에 실망했지만 불당 속에 들어가 보고는 감탄해 쉽게 나올 수 없었다. 그만큼 진하게 전해오는 옛사람의 손길이 있었다. 거리로는 짧지만 내용은 결코 짧을 수 없는 이야기를 여기서 접는다. 교통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1번 출구 걷기 코스 혜화역 1번 출구 ~ 일석기념관 ~ 낙산 ~ 삼군부총무당 ~ 비우당 ~ 미타사(탑골승방)/보문사 ~ 동망봉 ~ 청룡사/정업원구기 ~ 우산각골 ~ 안양암 ~ 창신역 또는 동묘역